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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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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시체를 뒤지던 그 시절, 불과 60년 전
 글쓴이 : 관리자
 




1950년 6·25 전쟁 발발 당시 28살이었던 이신자 권사, 12살이었던 안중희 장로, 9살이었던 주경자 권사, 그리고 2살 아기였으나 전쟁 통에 얼굴도 모르는 두 형을 잃은 가족사를 지닌 채건석 장로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이 들려주는 6·25 전쟁은 옛날이야기가 아닌 진짜 이야기였고 오늘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6월이 되면 당시의 무서운 기억이 떠오르시겠어요.

주경자 권사 :
무서운 게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어요. 누군가 죽는 소리가 나면 ‘아, 또 죽었구나’, ‘어, 나는 오늘은 살았구나’. 그러면서. 지금 돌아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무서운데, 그때는 무서울 여유도 없었지요.

이신자 권사 :
무서운 게 다 뭐야. 그저 앞뒤로 애들 메고 짐 끌고 그냥 그 많은 인파속에 나 살려 하고 달리는 마당에. 무서울 정신이 어디 있어요.



무서울 여유도 없을 정도로 무섭다는 것, 어떤 건가요?

안중희 장로 :
나는 시체를 참 많이 봤는데, 어린애들이 일부러 시체 더미들 있는 데로 이것저것 주우려 다녔어요. 시체 사이로 다니면서 신발도 벗기고, 시체가 손에 쥔 채로 죽은 깡통도 빼고…. 안주머니에 남아 있는 쌀 한 톨까지 뒤졌는데, 그게 전쟁인 거예요. 요즘 애들한테 시체 더미 사진 보여 줘 봐요. 그럼 무섭다고 얼굴 돌리겠죠? 근데 그 같은 애들이 전쟁이 나고 며칠 못가면 ‘아, 저기 먹을 것 있을지도 몰라.’ 하고 뛰어 들게 되는 거예요. 서로 눈이 벌개져서 경쟁한다니까요. 무서운 것도 배가 부른 다음 일이지, 아휴.

주경자 권사 : 저는 시체를 본 적은 없었지만, 죽는 소리는 참 많이 들었어요. 고려대 근처의 우리 동네에 작은 언덕 같은 산이 있었는데, 그 작은 산에서만 8백 명이 죽었거든요. 꺄악, 소리 지르는 소리와 함께 때리는 소리나 찍어내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럼 ‘또 누가 죽었구나.’ 했지요. 하루는 이화여대 3학년이던 뒷집 언니가 끌려갔어요. 삽을 주면서 땅을 파라고 하더래요. 파낸 구덩이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고서는 이런 저런 질문을 했대요. 그런데 그 언니가 영특해서 빨갱이 암호를 알고 있었나 봐요. 그 암호들을 대고 겨우 살아 나와 그 겪은 이야기를 해줬어요. 그런데 ‘아, 무섭다.’가 아니라, ‘이 언니가 그렇게 해서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겨우 9살인데, 사는 것 죽는 것의 문제에 머리 굴리느라 무서운 걸 느낄 틈이 없었어요.

책으로도 영화로도 많이 봤지만 구체적으로 와 닿지 않아요. 전쟁의 시작은 어떻게 실감하셨나요?

주경자 권사 :
서울에서는 포탄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요. 이승만 대통령도 전쟁이 터진 지 몇 시간이 흘러서 오전 10시에야 낚시하다 전쟁 보고를 받았다고 하잖아요. 탱크를 몰고 그야말로 밀고 들어온 거예요.



안중희 장로 : 나중에 저 멀리서 대포 쏘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 소리로 ‘정말 전쟁이 터졌구나.’ 했지요. 그때는 적군이 이미 서울 가까이 왔을 때죠.

주경자 권사 : 3일 만에 북한군이 서울에 거침 없이 도달했죠. 6월 25일이 일요일이어서 우리 군의 3분의 1이 휴가 중이었으니 이렇다 할 방어도 못한 거지요. 전쟁이 난 건 라디오에서 나오는 이승만 대통령이 남긴 육성으로 알았는데, 북이 침범했는데 우리 군이 곧 무찌를 것이니 국민들은 요동하지 말아 달라는 내용이었어요. 그때는 그나마 그 라디오도 동네에 하나 있을까말까 했어요. 그런데 사실 그 방송 믿고 그대로 남았다가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이기도 해요. 아무튼 그 방송이 있고 정확히 3일 뒤 6월 28일이 전쟁을 실감했던 날인데, 잊을 수가 없어요.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이었는데, 일어나 보니 북한군이 우리 동네에 가득하더라고요. 우리 동네가 서울 위쪽이니까 우리가 아침에 먼저 보고 그리고 서울 아래쪽에 사는 사람들이 오후 쯤 보았을 거예요. 얼떨떨한 가운데 조금 지나니까, 그 사람들이 신발을 신은 채로 우리 집에 막 들어와 뒤지더라고요. 그러고는 창고에 있던 쌀들을 다 가져갔어요. 그때가 6월이니까 전해의 쌀을 저장해 둔 것이 아직 남아 있었거든요. 그리고는 이내 동네 머슴이 북한군의 빨간 완장을 팔뚝에 두르고는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동네의 최고 무서운 감독관이 되었어요. 농민과 노동자가 아닌 사람들은 모두 죽였는데, 공무원이었던 우리 아버지는 전쟁 방송 나자마자 먼저 도망가셔서, 전쟁이 끝나고 제 친구들 중에 아버지가 계신 사람은 저밖에 없었으니 말 다했지요, 뭐.

이신자 권사 : 맞아, 어느 날 눈뜨니 동네 머슴이 동네 왕이 되었어. 그 사람 말이 법이야. 그냥 맘에 안 들면 다 죽이고 아주 끔찍했어.

안중희 장로 : 빨갱이들이 일부러 자기 이름 하나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을 고른 거예요. 그래야 자신들의 말이 잘 흡수되니까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공산주의 사상에 빠지니까 사상이 다르다고 부모도 죽일 수 있게 되더라고요. 우리 동네에는 머슴이 둘 있었는데, 한 머슴이 다른 머슴의 아버지를 잡아와서, 네 아버지 반동분자니까 네가 모범을 보여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머슴이 자신의 아버지를 사람들이 보는데서 똑바로 보고 죽이더라고요.

이신자 권사 : 그런 일이 아주 비일비재했지요, 아휴.



주경자 권사 : 집에 쌀이 다 털리고, 얼떨떨한 마음으로 학교에 갔어요. 그런데 학교 선생님들이 안 계시고 인민군들이 반마다 배치되어 있더라고요. 그때부터 배우기 시작한 인민군가들을 지금도 뚜렷이 기억해요. 왜 잊어버려지지도 않는지, 그 끔찍한 가사들이.

안중희 장로 : 맞아요. 나는 학교에도 못나갔는데, 완장 찬 머슴이 동네를 다니며 사람들 불러내서는 인민군가며 공산주의 사상 가르치던 것들이 잊혀지지 않아요. 너무 싫은데 그 공격적이고 투쟁적인 단어 하나하나가 그때의 기억과 함께 새겨진 것 같아요.

주경자 권사 : 함께 근무했던 선생님들 중 전쟁에 참전했던 분들은 나중에 전쟁 휴유증으로 얼마나 고생하셨던지 지금도 떠올리면 가슴이 아파요. 그중 한 분은 전투할 때 났던 총소리와 고함소리들이 평생 환청으로 들려서 시달리셨는데, 우리 군의 총소리는 ‘딱꾹’ 이고 북한군의 총소리는 ‘따다다닥’ 이라고 하셨어요. 우리군의 총은 매번 장전해서 쏘아야 하는 소총이었고, 북한군의 총은 최신식 따발총이었던 거지요.

왜 어른들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건지 이제야 마음으로 알겠네요. 글로 알았다고 생각했고, 설교를 들을 때는 ‘다 아는 이야기인데’하면서 집중하지 않은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서야 '6·25 전쟁이 정말 있던 일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분명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는 게 아니었던 거예요.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제대로 인정조차 하고 있지 않았던 거예요. 머리에서 뭔가 쿵하는 느낌이 들어요.

채건석 장로 :
나는 너무 어렸을 때라 잘 기억도 못하지만 가족의 한이 어려 있으니 6·25라는 단어 자체에 한숨이 절로 나와요.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노래 부르면서 ‘우리 형들이 그렇게 그 고개 넘어 끌려갔었겠구나.’ 하며 가슴이 미어지죠. 제가 9남매 늦둥이라, 이미 다 성장했던 형들 중에 농구선수였던 형은 감독이 선수들을 다 끌고 갔다고 하고, 다른 형은 북한 의용군으로 끌려갔다니, 분명 그 가사대로 ‘철사줄로 두 손 꼭꼭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그렇게 갔겠지요, 아휴.

이신자 권사 : 그 부모 마음이야 말해 뭐하겠어요. 그러니 내가 자다가도 그 생각이 나면 벌떡 일어나 밤을 지새워요. 우리 애들이 무슨 노인네가 나라 걱정 하냐고들 하는데, 뉴스 봐요. 그 일이 바로 내일 당장이라도 또일어날 것만 같아요. 서울을 통째로 날려버린다고, 지금도 북한이 그렇게 위협하면 우리 같은 노인네들은 심장이 쿵 내려앉고 며칠 잠을 못 자요. 이거 오늘 밤 전쟁 나는 거 아닌가 하면서요. 그런데 우리 정치인과 군인들은 전쟁 나면 몇 배로 보복한다고만 하니, 답답해 눈물이 다 나요. 왜 이렇게 우리말들을 믿지를 않는 건지, 서울 통째로 날아간 다음 보복하면 무슨 소용이예요.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니까, 아휴, 아휴.

안중희 장로 : 맞아요, 다들 옛날이야기로만 생각하니 답답해요.

주경자 권사 : 저는 오래동안 사회 교사로 근무하면서, 아이들만 탓할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매 년 같은 패턴의 웅변대회와 사생대회로 아이들에게 역사를 교육하던 일들이, 빠른 경제 성장과 그 과정에서 싹튼 부패 속에서 반발과 식상함을 불러오기도 했어요. 그들 입장에서 생각 해보면, 무엇을 알겠어요. 우리는 전쟁 끝나고 먹고 살기 바빴고, 우리 아이들만큼은 배고프지 않기를 가장 먼저 바랐잖아요. 그러다 보니 역사 의식 가르쳐 주는 일은 뒤로 미뤄졌으니, 우리가 먼저 회개하고, 이제라도 남은 인생 우리가 피부로 경험한 일들을 틈틈이 들려줄 수 있도록 애써야지요.



안중희 장로 : 그 모든 게 성경하고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 모르겠어요. 성경에서도 전쟁 통에 배고프니까 자기 아이까지 잡아먹는 일이 기록돼 있잖아요. 그런 게 우리는 철석 같이 믿어지는데, 우리 아이들은 과장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끔찍했던 역사를 실감하지 않으면 성경도 진정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성경에서도 그래서 그 끔찍한 역사들이 되풀이 되잖아요.

이신자 권사 : 되풀이 되면 안돼요, 절대. 업고 안고 피난가면서, 아휴, 옆에 같이 뛰던 사람들은 미처 애들 다 못 끌고 가서, 다리 밑에 버리고도 가고, 그래서 그 다리 밑에서 애들 무더기로 많이 죽기도 하고 그랬잖아요.

애들을 버려요? 그냥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일부러 버리기도 했나요?

이신자 권사:
그럼, 내가 죽기 일보 직전이면 사람들 행동이 아주 가지가지가 되지. 애 끌어안고 대신 총 맞아 품속의 아이는 사는 경우도 있지만, 갈대 속에 도망가고 있는데 애가 울어서 들키게 되어 순간 애 놓고 다른 갈대 사이로 몸 숨기다 보니 애 잃어버리는 수도 있었지요. 아니면 그때는 애들이 열 명 되는 경우도 많았으니까 짐 이고 애들 몇 명 데리고 가다보니 남는 아이들은 버리기도 하고. 죽기 아니면 살기였던 그 상황 살아보지 않고 모성애니 뭐니 할 것이 없어요.

안중희 장로 : 사방에 죽은 사람이고, 폭탄 소리 계속 들리고, 사람이 다 미친 정신이지 제 정신이 아닌걸.

채건석 장로 : 성경에 틀린 말 하나 없어요. 살면 살수록 다 있는 일이예요.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피난을 가요? 뭘 챙겨가고, 가서는 어디서 자고 뭘 먹고 사나요?

안중희 장로 :
뭐 기차 꼭대기 위에 붙어 가기도 하고, 문간에 매달려 가고, 그러다 떨어지면 그냥 거기서 죽는 거고. 계획이랄 게 없었어요. 지금 당장 살려면 부산으로 가야한다, 가자, 그런 것이지.

주경자 권사 : 나는 배타고 갔었는데, 그냥 배에서 내린 곳에서 자고, 다음 날로 엄마는 멸치 장사, 열 살배기 나는 다슬기 장사하고 끼니를 연명했죠, 뭐. 처음 전쟁 났을 때는 죽음을 목격하지 않아서 피난 안 가고 남아
들 있었지만, 1·4 후퇴 때는 이미 북한군 치하에서 수많은 죽음을 지켜봤기 때문에 다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떠난 거예요. 열 살배기 내가 어린 동생 업고 물 귀한 부산에서 새벽마다 물 길어오고, 아버지는 바람과 비라도 막으려고 판잣집 짓고…….



말씀들을 들으며 마음이 찌릿찌릿 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잃어버린 가족 분들은 전쟁 끝나고 찾아 보셨나요?

하지만 이 질문이 끝나고 잠시 네 분은 기자를 보고 웃음을 터트리셨다. 그리고는 각자 한마디씩 설명을 해주셨다. 1980년대생의 기자는 그제야 스스로도 미처 몰랐던 그 시절에 대한 무지함에 놀랐다. 기자의 무의식이 지녔던 첫 번째 의문은 ‘전쟁이 끝나고 집에서 만나면 되지 않나?’ 였는데, 일단 대부분의 집들은 전쟁 통에 사라졌다. 서울은 북새통, 시장바닥이었다. 두 번째 의문은 이산가족 방송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동네에 TV는 고사하고 라디오 하나라도 있으면 다행이었다. 핸드폰은 물론이고 전화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장 끼니가 문제였다. 남은 자식들도 굶어 죽을 판에, 잃은 자식 챙길 수가 없는 부모 마음이야 얼마나 처참했을까. 너나 할 것 없이 가족이 온전히 살아 남은 경우는 보기 드물었으니 특히 힘들다 할 것도없 었다고 했다. 말하자면, 태어나서 그때까지 힘들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힘들지 않은 것이 어떤지를 몰라서 버틴 것 같다고 입을 모으실 때는 목구멍이 확 막혀왔다. ‘요즘 애들은 힘들어본 적도 없다가 그런 일 닥치면 어쩌려고 이러나.’, ‘돌아가는 거 보고 있자면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실 때는 두려움에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을 묻자 네 어른은 입을 모아 이런 말씀을 남겼다.


이 시대 늙은이 중 한 사람으로서, 정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해서 가슴 한구석이 조금은 시원해진 기분이 들어요. 우리들은 성경과 구속사 시리즈를 읽다가 스르르 잠들 수 있는 오늘의 무탈한 잠자리가 내 또래 많은 이들의 핏값으로 얻어진 선물임을 잊을 수 없어요.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를 배우며 보내는 내 노년의 하루에 감사한 것은 바로 이런 양심에서 비롯되지요. 그들의 수고로 내가 오늘날까지 살아 남아 이 모든 은혜를 받고 있으니, 살아 있는 내가 그들에게 보탤 수 있는 건 나라를 위한 기도밖에 없지요. 그런 입장에서 젊은 손자 손녀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습니다.
“너희들이 글로 깨우쳐 머리에 넣고 있는 이 나라의 역사들을 우리는 몸으로 겪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아마도 이런 심정으로 성경 속 인물들은 성경이란 글을 남겨 두었을 것이다. 어느 장소에서건, 어느 시대에서건, 역사는 되풀이된다. 그리고 마지막 한 끗의 차이는 모든 것에서의 차이를 낳는다. 하나님은 끝없이 자비로우시고 누구보다 엄하시다. 성경 전체가, 그리고 구속사의 모든 권들이, 그 줄거리를 되풀이 한다. 이제는 깨우칠 때도 되지 않았는가. 세월 잘못 만나 힘겹게 살아온 후에 맞은 우리네 인생의 늦은 황금기를, 지금의 젊은 이들이 지켜주길 바란다.”

글_ 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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