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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종교개혁의 발자취를 따라 2
 글쓴이 : 관리자
 


종 교 개 혁 5 0 0 주 년 기 념 특 집

종 교 개 혁 의 발 자 취 를 따 라 2


루터를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구속사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비텐베르그 성문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게시함으로써 촉발된 종교개혁이 올해로 500주년을 맞는다. 교회 내부적으로는 본 교회의 설립자이신 휘선 박윤식 목사님의 구속사 시리즈가 발간된 지 10주년이 되었고, 목회 사역 6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이에 교회에서는 ‘종교개혁 답사’팀을 구성하여 지난 8월 21일부터 9월 2일까지, 13일간의 일정으로 독일과 스위스, 스코틀랜드 등 종교개혁지를 직접 답사하게 되었다. 루터와 칼빈, 존 낙스 등 오늘날 개신교의 뿌리가 된 개혁자들의 신앙을 배우고, 특별히 휘선 박윤식 목사님의 개혁신앙을 재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글과 영상으로 성도들과 나누고자 특집을 만들게 되었다. 본지에서는 총 4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글_홍봉준 목사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공개적으로 선포하며 교서를 불태웠던 루터! 그가 처음부터 이렇게 용맹스런 개혁자였던 것은 아니다. 사실 루터는 법학도가 되길 원했던 부친의 뜻을 따라 1505년 에어푸르트1)에서 문학석사 과정을 마치고 만스펠트에 계신 부모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소위 ‘벼락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동행하던 친구가 벼락을 맞아 죽고 루터는 말에서 떨어져 다리에 낙상을 입게 됐는데, 이 때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루터는 “성 안나여, 도와주세요. 제가 수도사가 되겠습니다.”라는 서약을 하게 됐다. 이로써 루터의 인생에 첫 번째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이때가 1505년 7월 2일의 일이고, 2주 후에 루터는 약속대로 에어푸르트의 어거스틴 은둔자 수도원2)에 입회하였다. 지금은 호텔로 운영되어 수도원 내부는 들여다볼 수 없지만, 루터가 이곳에서 수련했던 방과 교회당은 관광객에게 개방되어 있다.




엄격한 수도원 생활 중에서도 루터는 모범 학생이었다. “자기 의지의 포기, 빈약한 음식, 거친 옷, 철야와 오후 노동, 육신 죽이기, 가난으로 인한 멸시, 구걸의 수치, 은둔 생활의 불편함” 등이 수도사들이 지켜야할 규율 중 일부였다. 1년의 예비 신부로서 수련생활 중에 루터는 정해진 규율을 초과하여 철야와 기도생활에 매진했고 육신 죽이기를 위해 종종 담요도 없이 잠을 잤다. 1년의 수련기간을 마치고 드디어 1507년 4월 3일, 루터는 에어푸르트 마리아 대성당3)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러나 쉽게 감당할 줄 알았던 첫 미사와 사제의 직무에 대해 루터는 두려움과 절망을 더 크게 느꼈다.


루터의 이러한 영적 고민은 우울증과 여러 병증을 동반하였기에, 수도원에서는 내부의 분쟁 해결을 위해 로마에 수도사를 파견할 일이 생겼을 때 루터를 보냈다. 1510년, 생애 첫 로마를 방문한 루터는 “양파를 가지고 갔다 마늘을 가지고 온 격”이라는 표현처럼, 그곳의 부패와 타락의 실상을 목격하고 오히려 더 큰 절망에 빠지게 됐다. 이를 본 그의 스승 스타우피츠는 루터에게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가서 성경을 강의할 것을 권유하였다.




“루터, 성경을 깊이 연구해보게”

이 말 한마디가 루터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된 구속사적 사건이 되었다.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루터는 먼저 시편을 강해하고,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강해를 이어가게 됐다. 시편 강해를 하는 중에는 시편 22편을 통해 그리스도가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통해 큰 감동을 받게 되었고, 로마서 강의에서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을 통해 영적 전율을 느꼈다. 로마 계단성당4)을 무릎으로 걸어가 보고, 수많은 고해와 금식을 통해서도 해결되지 않던 구원의 확신과 영적 갈등이 결국 말씀을 통해 ‘자신의 행위와 공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을 믿는 의’로 채워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회가 출범한 지 1,500년 만에 루터에 의해서 발견된 위대한 발견이 되었다. 이후 루터는 모든 것을 이 말씀의 빛에 비춰 바라보게 되었다. 말씀이 루터를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그때 나는 하나님의 공의는 은혜와 순전한 자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의 순간, 나는 마치 거듭나 열린 천국 문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롬 1:17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와 그 의로 인한 구원의 진리를 깨달은 루터가 고백한 말이다. 휘선 박윤식 목사 또한 지리산에서 3년 6개월 7일간의 기도와 성경연구의 기간 중 첫 번째로 깨달은 말씀이 롬 3:4, 10절 등의 말씀이었다. 곧 “사람은 거짓되되 하나님은 참되시다”(롬 3:4),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는 말씀을 통해 사람의 거짓됨과 죄인됨의 실상을 깨달은 데서 의인의 길로 나가는 구원의 빛을 발견하게 되었다. 루터가 발견한 롬 1:17의 앞뒷면과 같은 구절이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의 구속사는 세상의 거창한 권력이나 계획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진정으로 기도하며 몸부림치는 한 사람의 깨달음과 선포에 의해 진행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행동하는 신앙인, 루터의 발자취

루터는 교회당이나 캠퍼스에 갇힌 개혁자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그는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움직였다. 로마 교황청의 불법적인 면죄부 판매와 교리들의 부당성을 발견하고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 교회의 정문에 게시하였다. 이로써 전 유럽과 인류 역사를 바꾼 종교개혁의 물꼬가 트이게 된 것이다.


교황청은 즉각 움직였다. 이듬해 하이델베르크에 루터를 소환하여 자신의 신학을 옹호하라고 하였다(1518.4.26.). 이에 루터는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이나 그리스도의 공로에 우리의 선행이 추가될 수 있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주장하였다. 루터가 처음 공개적인 신학 논쟁에 참여했던 하이델베르크는 ‘성령교회’와 네카 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워진 이델베르크 성5)이 마치 그림엽서처럼 멋진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후에 이곳은 30년 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이는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촉발된 개혁교회와 가톨릭 간의 종교전쟁으로, 1648년이 되어서야 ‘베스트팔렌조약’을 통해 비로소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게 되었다. 루터의 행동 이후 무려 150년 이후에 피로써 맺은 열매였다.


4개월 후 아우크스부르크에 다시 출두하여 기존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청받았지만 루터는 단호히 거부하였다. 그리고 1519년 7월 라이프치히에서 3차 토론회를 열어 신학자 에크의 날카로운 공격을 받았지만, 루터는 체코의 후스와 같이 화형당할 위협을 감수하고 가톨릭의 문제점과 교황직의 적그리스도 됨을 설파하였다. 이러한 세 번의 논쟁을 거치며 루터는 서서히 개혁의 리더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520년 유명한 첫 번째 저서 ‘독일 귀족들에게 고함’을 통해 독일 기독교 귀족들이 이제 침묵의 시간을 끝내고 불법적인 통치자에 맞서 항거할 것을 촉구하였다. 종교권력의 개혁을 위해 정치권력이 나서야 함을 촉구하는 루터의 이 저서는 루터 편에 선 제후들의 행동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10일 두 번째 책 ‘교회의 바벨론 유수’를 통해 가톨릭의 일곱가지 성례의 비성경적 근거를 지적하며 참된 성례는 오직 ‘세례와 성찬’ 뿐임을 주장하였다. 이어서 11월에 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통해 교황에게 교회의 부패 척결을 촉구하고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밝혔다. 3년 동안 세 번의 공개적 논쟁과 세 권의 저서를 집필하면서 루터는 처음 발견한 ‘이신칭의’ 복음에 근거하여 개신교적 신학의 틀을 잡아갈 수 있었다.




보름스 회의와 바르트부르크의 유폐 :

‘루터의 밧모섬’

이번에는 루터가 먼저 움직였다. 교황의 칙서를 불태우고 황제 카를 5세에게 공의회 소집을 요청한 것이다. 그리하여 1521년 4월 독일 보름스에서 공청회를 열게 되었다. 4월 16일, 보름스에 입성한 루터는 구름 같은 시민들의 환호 속에서 에크와 맞서 자신의 신학을 변론하였다. 후스의 이단에 감염되고 교회와 기독교 제국에 대한 불경스러운 주장들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에 루터는 결연히 맞섰다.


“우리의 권능이 들어올 때 하나님의 권능은 나가고 우리의 권능이 나갈 때 하나님의 권능이 들어옵니다.”라며 루터는 “나의 주장을 철회 할 수도 없으며, 철회하지도 않겠다. ...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여기 내가 섰으니 이젠 달리 행할 수 없습니다.”라며 말씀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개혁의 길에 당당히 자신이 서 있음을 공표하였다. 이로써 루터는 당시 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또 ‘법외자’로 규정되었다. 이것이 1521년 4월 26일의 일이고, 공식 사인은 5월 4일에 이루어졌다. ‘법외자’ 판정은 사람들에게 루터를 죽여도 좋다고 광고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루터의 후원자였던 선제후 프레데릭이 자신의 기마병들을 보내어 루터를 위장 납치하여 바르트 부르크 성6)으로 이끌어왔다. 후에 루터는 그곳을 ‘밧모섬’이라 하였다. 그곳에서 루터는 ‘융커 외르크’라는 이름으로, 기사로 신분을 위장하고살아갔다.




그곳은 8월 24일(목), 오전에 에어푸르트의 성 어거스틴 수도원을 방문하고 점심식사를 마친 후에 들렀다. 한낮의 무더위에 주차장에서부터 20여 분 동안 계단과 비탈길을 걸어 올라가 당도한 바르트부르크 성은 적그리스도의 세력으로부터 루터를 보호하고, 1년여 간의 인고의 세월을 통해 신약성경 독일어 성경을 번역하여 독일인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을 안겨준 산실이 되었다. 루터가 11개월 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악마와 고독과 맞서며 독일어로신약성경을 번역하였던 7)에는 당시 루터가 사용하였던 책상과 의자8)가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하루하루를 두려움에 오직 기도와 성경 번역으로 보내며, 장차 종교개혁의 판도를 바꿀 거대한 무기인 성경을 빚어내던 루터의 땀 내음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다음 날인 8월 25일(금) 아침에는 보름스를 방문하였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의 보름스 국제회의 장소에는 “여기 내가 서 있습니다”라고 당당히 외쳤던 루터의 모습은 없지만 그를 기념한 커다란 신발9)과 종교개혁가들을 모아 새겨놓은 종교개혁 기념 동상10)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훗날 루터는 자신의 업적을 칭송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난 그저 가르치고 설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적는 일만 했다. .. 난 아무 것도 한 게 없다. 말씀이 다 했다.”


‘말씀이 다 했다’는 루터의 고백은 가장 솔직하면서도 성경적인 답변이다. 우리가 감히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단지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로서, 순종하기만 하면 일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다 하는 것이다.


루터의 귀환과 종교개혁의 확산

바르트부르크의 유폐생활을 마치고 루터는 1522년 3월, 비텐베르크로 귀환하였다. 그곳에서 루터는 강의와 설교를 통해 후학들을 양성하고 개혁사상의 확산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와 비례하여 눈엣가시 같은 루터를 제거하고자하는 교황청과 카를 5세의 계획은 점점 집요해졌다. 그러나 루터를 지지하는 제후들의 반대와 지금의 터키 군의 침입 등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평화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526년 슈파이어에서 회의를 소집, 각 제후들이 루터파나 가톨릭 중 어느 하나의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근 20년 만에 루터의 외침이 결실을 보면서 종교자유의 문이 조금 열린 것이다. 그러나 외부적 상황이 변하자 카를 황제가 변심하여 제2차 슈파이어 제국회의(1529년 4월)에서 이전의 합의를 파기하자 이에 맞서 ‘항의’를 하였는데 여기서 ‘항의하다’라는 뜻을 지닌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듬해 아우구스부르크에 모인 양측의 회동은 결렬되어 전쟁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헤센의 필립은 프로테스탄트 세력들을 규합하기 위해 슈말칼덴에 모여 방어전선을 구축하였다(1531). 이로써 슈말칼덴은 1530년부터 1545년까지 개신교 진영의 모임과 회의의 중심지가 되었다. 1547년, 카를 5세는 스페인 출신의 용병들을 이끌고 프로테스탄트와의 전쟁에 돌입하여 뮐베르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이미 루터의 사상은 주변지역으로 확산되어, 1523년에는 덴마크가, 1527년에는 스웨덴이 루터교 국가가 되었고 루터의 사후에도 더욱 확산되어 더 이상 힘으로 누를 수 없는 대세를 형성하였다. 이에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다시 회의를 열어 “제후의 지역에서는 그 제후의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확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의 자유는 유럽이 가톨릭 세력과 개혁파 세력간에 30년 동안의 치열한 전쟁을 치른 후였다. 1648년 베스트팔렌에서 양측간에 조약을 체결하여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가톨릭, 루터파와 더불어 칼뱅파도 공식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았고, 개인이 신앙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한 것이다.




루터의 가정생활과 부르심 : “우리는 거지입니다”

1525년 6월, 루터는 42세의 나이에 16세 연하의 수녀 출신 카타리나 폰 보라11)와 결혼하여 6남매를 낳았다. 평생 공부와 성경연구에만 몰두했던 루터는 결혼을 통해 새로운 삶을 경험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 다음으로, 거룩한 결혼 제도보다 더 소중한 보화는 없다.”고 고백하며 루터는 종종 아내를 ‘내 갈비뼈’, ‘내 주’로 불렀다. 모든 가정경제와 살림을 아내에게 맡기고 루터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기까지 교회에의 설교, 학교에서의 강의, 그리고 집을 찾아온 친구들과 학생들과 식사하며 수많은 주제로 대화하며 말씀의 전파에 힘을 쏟았다.


루터는 숨지기 이틀 전,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다.


“... 1백년을 예언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끌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성경의 저자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다고 생각하여서는 안된다.

... 우리는 거지들이다. 이것은 참되다.”


500년이 지난 후에도 온 독일이 영웅으로 칭송하는 그가 마지막 남긴 말치곤 의외였다. 처음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했던 그가 ‘거지’로 마무리한 것이다. 휘선 박윤식 목사는 1991년 10월 27일 종교개혁 주일 설교에서 “우리는 거지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며 루터의 이 정신을 기념하였다.


“여러분들! 모든 생활에 본전 이상입니다. 내 몸도 주셨다고 했어요. 나의 마음도, 생각도, 나의 전체를 다 주셨어. 내 아내도 선물로 주었습니다. 나의 아들이고 딸이고 선물로 주었습니다. 내 직장도 선물로 주었습니다. 나를 높게 해준 것도 선물로 주었습니다. 내 앞에 머리 숙이고 꾸벅꾸벅 순종하는 부하들도 하나님이 선물로 주었습니다 하면서 나는 거지였지만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에 이제는 거지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제는 큰 부자가 됐습니다 하면서 이 땅에서 씩씩하게 보람 있게 천성을 향하여 전진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는 것입니다.”


50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고 말씀을 깊이 있게 묵상하는 진정한 개혁자들은 영으로 통하고 뜻으로 하나됨을 느끼게 된다. 구원의 확신을 위해 온몸과 영혼으로 전율하였던 루터. 그의 그런 고민과 노력이 말씀과 만나 해결되는 과정은 루터 자신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몸짓이었다. 하나님은 루터를 통해 천년 동안 잠겨 있었던 말씀의 뚜껑을 열으셨고, 그를 등장시키시기 위해 미리 구텐베르크를 통해 인쇄술을 준비시켰다. 100년 전의 후스는 먼저 백조의 탄생을 예견하였고, 자신의 권능을 비우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채운 한 사람을 통해 결국 하나님 자신이 일하셨다. 따라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 우리는 중단 없는 구속사의 놀라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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