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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구속사 시리즈 발간 10주년 특집 종교개혁 이야기
 글쓴이 : 관리자
 


종교개혁 500주년, 구속사 시리즈 발간 10주년 특집

종교개혁 이야기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특집 연재 순서

1. 종교개혁 전야

2.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3. 장로교회의 탄생

4. 남아있는 종교개혁






전(前) 종교개혁자들

종교개혁에 대한 열망은 로마 카톨릭의 타락과 함께 시작되었다. 시대를 앞서가는 종교개혁 의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후대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던 자들을 가리켜 ‘전 종교개혁자’라고 한다.




당시 카톨릭은 교회가 교회를 사하는 권리를 가진다고 주장하면서 면죄부를 판매하였는데, 전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사실이 성경에 없음을 깨달았다. 존 위클리프는 카톨릭의 중보적 사제 제도나 미사가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만이 죄를 사하는 것이며, 성도들의 영적인 자유를 강조하며 ‘성스러운 언어’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여 보급했다. 위클리프의 사상을 이어 받은 존 후스는 끝내 1415년 ‘성경이 틀리다는 주장 외에는 철회할 수 없다’고 외치며 화형 당하고 말았다. 카톨릭은 종교개혁의 열망을 무참하게 탄압하였지만, 순교자의 외침은 온 유럽으로 퍼져나가며 종교개혁의 배경이 되었다.




마르틴 루터와 독일의 종교개혁

14세기 중엽부터 온 유럽에 치명적인 전염병인 흑사병이 번져나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면죄부와 성물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또한 모든 질병의 원인이 죄 때문이라면서, 교회 계단을 무릎 꿇고 오르거나 자신의 몸을 매일 채찍질로 때렸다. 물론 그 어떤 것도 흑사병을 낫게 할 수 없었다.


루터는 이런 시기에 태어나 누구보다 열심히 자신을 고행의 길로 몰아넣었던 사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 정욕과 계속되는 죄는 그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30세라는 젊은 나이로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가 된 루터는 1515년 32세의 나이로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라는 말씀을 통하여 엄격한 규칙이나 고행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의인을 만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카톨릭의 권위를 뽐내기 위해 성베드로 대성당 건축에 열을 올리면서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 사실에 분노한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카톨릭의 부패를 지적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정문에 붙였다. 그는 라틴어로 이를 작성했지만, 2년 동안 독일어, 덴마크어, 화란어, 체코어 등으로 번역되며 온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사실 루터는 단순히 의식적인 개혁만을 원했지만, ‘95개조 반박문’은 온 유럽을 종교개혁의 열풍으로 몰아넣었다.


루터는 카톨릭의 성례와 중보기도가 성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베드로전서 2:9, 히브리서 6:19, 10:20을 근거로 모든 신자가 ‘영적인 제사장’이라고 주장했다. 교황은 루터의 책을 불태우면서 주장을 포기하라 협박했지만, 루터 역시 카톨릭의 책들과 교황의 교서를 불태워버렸다. 결국 교황은 1521년 루터를 파문하고 이단으로 낙인 찍었다. 루터의 주장에 감명 받은 독일의 제후 프리드리히 공작은 자신의 영지에 그를 1년 간 숨겨주었고, 1522년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와 비성경적인 요소를 제거한 개혁 교회를 세우고 의식 위주의 미사를 말씀 선포가 있는 예배로 개혁하였다.


루터의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온 독일은 카톨릭과 루터 파로 양분되었다. 1526년, 독일의 황제 카를 5세는 ‘각 제후들은 자신의 영지 내에서 어떤 종교를 가질 지 결정할 수 있다’라고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카톨릭 신자였던 황제가 3년만에 결정을 번복하자 루터 파 제후들이 강력하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기독교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인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반대하는 자’)의 유래이다. 루터는 이처럼 정치적인 대립과 카톨릭의 위협 속에서 종교개혁 사상을 지도하다가 1546년 숨을 거두었다. 루터가 열망했던 종교의 자유는 그의 사후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약(和約)을 통

해 현실이 되었다.


츠빙글리와 스위스 종교 개혁의 시작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루터보다 한 살 아래의 츠빙글리를 통해 시작되었다. 그 역시 독실한 카톨릭 사제로 살았지만, 로마 카톨릭의 직제에 대한 의문과 선행 교리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1517년,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는 루터에게 크게 호응하면서 종교개혁을 시작했다. 루터와 츠빙글리의 차이가 있다면, 루터는 ‘성경이 금하지 않는 것은 허락한다’라는 입장이라면, 츠빙글리는 ‘성경이 허락하지 않는 것은 금지한다’라는 보다 엄격한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입장은 후에 영국에 청교도 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츠빙글리의 주장이 퍼져나가며 스위스는 개혁을 주장하는 주와 카톨릭을 주장하는 주로 분열되었다. 취리히를 비롯한 5개 주는 연합하여 ‘슈말카덴’이라는 동맹을 만들었다. 1529년, 정치적으로 위협받던 루터와 츠빙글리는 만남을 가지고 개혁파의 교리에 대해서 논의를 가진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대부분의 교리에 있어서는 일치했지만, 성찬에 대한 교리는 첨예하게 대립했다. 당시 카톨릭은 ‘성찬 시 떡과 포도주는 실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화체설)라고 주장했다. 루터는 이에 대해서 ‘떡과 포도주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임재한다’(공재설)라고 주장한 반면, 츠빙글리는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한다’(상징설)라고 주장했기에 두 사람의 의견 차는 좁혀질 수 없었다. 결국 독일의 루터파와 스위스의 츠빙글리파의 연합은 결렬되고 말았다. 이후 1531년, 스위스의 카톨릭파 동맹은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취리히로 공격했고, 카톨릭과 종교개혁자들 간의 최초로 발발한 카펠 전투에서 개혁파 군대가 패배하고 츠빙글리는 전사하고 만다.


칼빈의 종교개혁

루터와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사상은 칼빈에 와서 완성되었다. 루터와 츠빙글리를 1세대 종교개혁자라고 한다면, 약 25년 후에 태어난 칼빈은 2세대 종교개혁자에 해당한다.


1509년 프랑스 북부 누아용에서 태어난 칼빈은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법학과 인문학을 전공하였다. 파리에서 대학을 다니는 동안 종교개혁사상을 접하여 영향을 받았고, 1532년 법률 공부를 마친 후 루터 사상을 연구하며 카톨릭과 인본주의 사상을 버리고 종교개혁 사상으로 회심하였다. 하나님이 사도 바울이 받았던 바리새인 교육과 다소 대학 교육을 세계 선교의 사명을 위해 사용하셨듯이, 칼빈이 받았던 인문학과 법학 공부는 기독교 교리를 체계화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는 전통적인 카톨릭 국가로 온 유럽으로 번진 종교개혁 사상을 막고자 극심한 박해를 가했다. 이 박해로 인해 칼빈의 동생과 친구들이 순교 당하자, 칼빈은 스위스 바젤로 망명하게 된다. 그는 카톨릭 세력과 상대하기 위해서는 종교개혁 사상의 체계적인 교리 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개혁주의자들의 신앙에 대해서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536년, 기독교 역사상 기독교 교리를 가장 체계적으로 잘 밝히는 빛나는 저술 <기독교 강요> 초판이 출간되었다.



칼빈은 본래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을 하면서 살기를 원했지만, 그보다 20살 많은 1세대 종교개혁자 기욤 파렐을 만나면서 1536년 제네바 종교개혁의 지도자로 초빙 받았다. 초기에는 신앙적으로 어린이에 가까웠던 제네바 시민들이 칼빈과 파렐의 주장이 너무 엄격하다며 그들을 추방하기도 했지만, 결국 1541년 칼빈을 다시 초빙하여 방종과 음란이 가득했던 제네바를 하나님의 도시로 바꿔가기 시작했다. 칼빈은 이 시기에 마틴 루터와 서신을 통해 여러 차례 서신을 통하여 교류를 가졌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종교개혁의 횃불을 밝히는 데 의미가 있고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이 보다 엄격한 종교개혁으로 인도했다면, 칼빈의 종교개혁은 종교개혁 사상을 현실로 만들었다. 칼빈이 지도하는 제네바는 성경적인 원리로 다스리는 신정도시로 거듭났다. 칼빈은 기존의 카톨릭 직제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목사와 장로, 교사와 집사라는 네 가지 직분으로 개편하였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성례를 집행하는 직분자로서, 제네바의 목사들은 분기별로 감독직을 수행하면서 매주 성경연구모임을 통해 이단이나 분열, 성경 연구를 게을리하는 것을 경계하게 했다. 교사는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는 자로 어린이부터 목사 후보생까지 가르치는 오늘날 신학교 교수와 같은 직분을 수행했으며, 장로는 교회를 질서 있게 치리하고 교회의 규칙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살피게 했다. 집사는 교회의 재정과 소유를 관리하고 긍휼 구제를 전담했다. 특히 칼빈은 엄격한 권징의 시행을 강조했는데, 교회 내에 들어오는 이단과 방종, 타락이 온 교회를 무너트리지 않도록 엄하게 다스렸다. 점차 제네바는 엄격한 치리 가운데 자유와 질서가 확립되어 있는 온 유럽 개혁 교회의 중심도시가 되었고, 네덜란드와 프랑스, 이탈리아의 박해 받던 개혁주의자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1554년, 장로교회의 아버지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 역시 칼빈이 치리하던 제네바로 망명왔고, 제네바의 모습을 보면서 ‘사도시대 이후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감탄하며 많은 감화를 받았다.


1559년, 칼빈은 개혁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지도자 양성을 목표로 제네바 아카데미를 개설한다. 이곳에서 양성된 수많은 목회자들은 자신의 모국으로 돌아가 ‘오직 성경’ 사상을 외치며 종교개혁 사상을 전파했다. 같은 해, 칼빈은 <기독교 강요> 최종판을 집필했으며, 이후 계속하여 성경 주석 집필에 힘쓰다가 1565년 2월 최후의 설교를 마지막으로 5월 27일 54세의 나이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종교개혁자들의 대원리는 ‘오직 성경으로’였다. 디모데후서 3:16-17에서는 성경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바르게 함에 유익하다’ 말씀하고 있다. 여기 ‘바르게 함’은 헬라어 ‘에파노르도시스’(?πανορθωσι?)로, ‘개혁, 바르게 하여 회복에 이르게 하다’라는 의미이다. 성경 스스로가 일하여 타락한 카톨릭의 모습을 바르게 개혁시킨 것이다.


1세대 종교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피기 시작했다면, 2세대 종교개혁자들은 종교개혁의 사상을 체계화했다. 하지만 여전히 종교개혁 자들은 사회적으로 억압 당하는 처지에 있었다. 종교개혁자들이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흘려야 할 순교자들의 피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글_정디모데 전도사, 그림_ 박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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