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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종교개혁의 발자취를 따라 3
 글쓴이 : 관리자
 


종 교 개 혁 5 0 0 주 년 기 념 특 집

종 교 개 혁 의 발 자 취 를 따 라 3


말씀으로 세상을 변화시킨 개혁자,

츠빙글리와 칼빈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비텐베르그 성문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게시함으로써 촉발된 종교개혁이 올해로 500주년을 맞는다. 교회 내부적으로는 본 교회의 설립자이신 휘선 박윤식 목사님의 구속사 시리즈가 발간된 지 10주년이 되었고, 목회 사역 6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이에 교회에서는 ‘종교개혁 답사’팀을 구성하여 지난 8월 21일부터 9월 2일까지, 13일간의 일정으로 독일과 스위스, 스코틀랜드 등 종교개혁지를 직접 답사하게 되었다. 루터와 칼빈, 존 낙스 등 오늘날 개신교의 뿌리가 된 개혁자들의 신앙을 배우고, 특별히 휘선 박윤식 목사님의 개혁신앙을 재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글과 영상으로 성도들과 나누고자 특집을 만들게 되었다. 본지에서는 총 4회에 걸쳐 연재하고 있다.

글_홍봉준 목사



루터에 의해 독일이 치열한 개혁의 몸부림을 치고 있을 때, 스위스의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리가 그리고 한 세대 후에는 제네바에서 칼빈이 개혁의 깃발을 펄럭이고 있었다. 츠빙글리와 칼빈에 의해 진행된 스위스 종교개혁의 특징은 사회와 국가의 범위로 개혁의 영역을 확장한 것과 오늘날 장로교 정치체제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검을 쥔 개혁자, 츠빙글리1)

츠빙글리는 1519년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 교회2)에 부임하여 루터파보다 훨씬 급진적이고 철저한 개혁을 이루고자 했다. 그는 조국이 처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칼을 들고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개혁자이자 군인이었다. 1484년 1월, 루터보다 7주 앞서 태어난 츠빙글리는 ‘우리 시대의 키케로’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소유하였다.




취리히와 흑사병

1519년, 츠빙글리가 취리히에 부임하였을 때 흑사병으로 인해 당시 인구 1/4이 죽게 되었다. 목회자로서 츠빙글리는 교우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다 자신도 흑사병에 걸려 석 달 정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고통을 겪은 끝에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츠빙글리는 하나님이 주신 여분의 삶을 종교개혁에 헌신하기로 작정하였다. 당시 그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흑사병의 노래’는 오늘까지 스위스와 독일 개신교회 찬송가집에 수록되어 있다. 총 3절로 된 ‘흑사병의 노래’는 “곤경 속에 있는 나를 도와주소서 죽음이 문 앞에 온 것만 같습니다”(1절)라는 절망의 토로에서부터 “앞으로 하늘의 보상을 기뻐하며 이 세상 안에서 저항할 것입니다. 오직 당신의 도움으로 인하여 완전해질 수 있습니다”(3절)라는 헌신의 고백으로 마치고 있다.


그는 흑사병을 통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 후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았다. 이후의 삶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여분의 삶으로 생각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살아가며, 사역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라는 개혁교회의 표어는 이러한 츠빙글리에게서 시작되었다.


스위스와 용병제도

현재의 스위스는 중립국가를 표방하고 있지만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스위스 국민들의 최대 수입원중 하나는 용병제도였다. 스위스 루체른에 있는 ‘빈사의 사자상3)은 스위스 용병제도의 비극과 참상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상징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 왕가를 수호하다 전멸한 760명의 스위스 용병들의 죽음을 기리는 것으로 ‘스위스 사람들의 신의와 용기’라는 말이 라틴어로 새겨져 있다. 오늘날도 그 ‘신의와 용기’를 인정받아 로마 바티칸의 교황 수비대를 스위스 사람들이 맡고 있지만, 당시 용병제도의 이면에는 로마 가톨릭의 이권과 탐욕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의 출발점이 되었다.


츠빙글리는 1512년과 1515년 두 차례 용병사제로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하였다가 돈 몇푼 때문에 같은 동포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모습을 보면서 용병제도에 반대하고, 그 이면에 있는 인간의 탐욕과 폭력성을 고발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1522년 11월 15일, 취리히 평의회에서 ‘용병제도 금지법’을 가결시켰다. 그리고 스위스 젊은이들을 향해 용병에 참여하기보다 농업과 수공업 등에 종사하기를 독려하였다.


취리히의 소시지 사건

츠빙글리는 용병제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 1522년 사순절 첫 주일인 3월 9일에 12명의 사람들과 취리히 출판업자인 프로샤우어의 집에 모여 소시지를 먹게 되었다. 츠빙글리는 사순절일지라도 사람들이 몸에 필요한 육식을 먹고 건강을 보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행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종교적 규례를 어기는 것보다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몰아세우며 그 살을 취하여 이득을 보는 교회 지도층 인사들의 죄가 금식규정을 어긴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죄라고 여겼다. 이 사건을 발단으로 취리히 시에는 종교개혁의 논의가 본격화되어 용병제도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가운데 베른을 중심으로 취리히 등 개혁파 도시들이 1530년 ‘기독교 시민동맹’을 출범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개혁세력의 확산에 당황한 가톨릭계 도시 연합군 8천명이 1531년 취리히를 급습하여 무참히 패배하고 말았다. 이때 츠빙글리도 중상을 입고 포로로 잡혀갔다가 그의 육체는 갈기갈기 찢겨져 돼지고기와 함께 불태워진 후 버려졌다. 그의 나이 47세인 1531년 10월 11일이었다.4)



츠빙글리는 짧은 개혁의 삶을 진두지휘하였지만 ‘교회와 국가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이를 실천함으로써 참된 신앙인은 자기 개인뿐 아니라 자기가 속한 사회와 나라에 대한 책임도 짊어져야 함을 일깨워줬다. 이는 휘선 박윤식 원로목사의 평생 지론이기도 하다. “나라가 없으면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없다”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예배로 헌신했던 일생을 평강제일교회에 큰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5)

취리히에 츠빙글리가 있었다면, 제네바에는 프랑스 출신 칼빈이 있었다. 칼빈은 루터나 츠빙글리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나 종교개혁을 완성한 적자(嫡子)라 할 수 있다.




‘기독교강요’의 출판과 파렐과의 만남

칼빈은 1509년 프랑스 노용에서 태어나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나 1533년 프랑수아 1세의 대대적인 개신교 박해를 피해 스위스 바젤로 피난을 갔다가 1536년에 ‘기독교강요’를 저술하였다. 이 책의 출판으로 순식간에 유명 인사가 된 칼빈은 바젤을 떠나 스트라스부르크로 가려던 중 스위스와 프랑스간의 전쟁으로 길이 막혀 제네바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이 소식을들은 제네바의 종교 지도자 윌리엄 파렐은 칼빈을 찾아가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진두지휘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정중히 거절하는 칼빈에게 파렐은 “당신이 만일 주님의 일을 돕지않는다면 저주가 임할 것이요!”라고 고함을 질렀다.칼빈은 이 말이 마치 하나님의 음성과 명령처럼 들려 제네바에 정착하게 되었다. 제네바 시의회는 칼빈에게 거룩한 성경말씀을 가르치는 교수‘라는 직위를 주었다. 칼빈은 제네바 시민들을 위한 신앙고백서를 만들고 교육 프로그램 등을 의욕적으로 만들어 제네바 시를 말씀으로 개혁하고자 했으나 반대파들의 저항에 의해 1538년 4월, 추방당하고 말았다.


스트라스부르크의 망명과 제네바의 재입성

제네바에서 추방당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로 가서 3년 동안 프랑스에서 핍박을 피해 떠나온 위그노(프랑스 개신교도들을 지칭함)들을 대상으로 행복한 목회생활을 하였다.6) 400여명의 난민들을 중심으로 세운 칼빈의 교회는 당시 제네바와 프랑스 개혁파 교회들에게 하나의 모범이 되었다. 3년의 시간이 흐른 후 제네바는 칼빈을 지지하는 세력이 의회를 장악하여 다시 칼빈을 초청하게 되었다. 1541년 9월 13일, 제네바에 돌아온 칼빈은 시 의회의 지원 속에 자신들의 개혁정책을 의욕적으로 펼쳐갔다. 12명의 평신도 장로들과 목사들로 당회를 구성하여 교회뿐 아니라 도시 전체의 도덕적 감독 역할을 수행하게 함으로서 공적예배 불참, 음주, 간음, 도박 등에 대한 죄를 엄격하게 처벌하였으며, ‘교회법령’을 마련하여 예배의식과 교회의 제반 관습을 개혁하였다. 그리고 제네바 아카데미7)를 설립하여 교육을 개혁하고, ‘종합 구빈원’과 ‘프랑스 기금’을 통해 사회복지를 실천하는 등의 활동으로 제네바를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도시로 만들어갔다.


이러한 적극적인 칼빈의 개혁정책에 반대파들의 저항도 거세졌지만, 1553년 스페인 출신의 신학자인 세르베투스에 대한 이단정죄와 화형으로 모든 반대의견을 잠재우고 제네바 개혁의 전권을 거머쥐게 되었다. 그리하여 1555년 1월 24일에 ‘교회법령’이 의회에서 비준되었고, 제네바 아카데미를 통해 후학들을 양성하여 다음 세대에도 개혁이 지속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칼빈의 신학과 개혁정책

칼빈이 가장 강조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 교리였다. 루터의 핵심이 이신칭의 교리라면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통해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의 뜻이 절대적으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또한 칼빈은 어거스틴의 예정론 사상을 발전시켜 이를 자신의 중심 사상으로 정립시켰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힘으로 이해할 수 없고 인간의 선택이 자신들의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 없으므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칼빈은 이에 더해 ‘성령’을 매우 강조하였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택자들 안에 계시는 성령의 신비로운 역사로 열매를 맺으므로, 성령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생산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중심사상을 토대로 하여 칼빈은 제네바 시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거룩한 도시로 개혁하고자 하였다.


가장 먼저 예배 개혁을 추진하여 가톨릭의 모든 형상들과 인간적인 전통을 배격하였고,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쉬운 곡으로 시편 찬송가를 만들고 이를 기초로 ‘제네바 시편찬송가’를 완성하였다. 무엇보다도 칼빈은 오늘날 장로교의 정치체제를 갖추는 데 크게 기여함으로써, 공동의회에서 회중의 동의를 얻어 목사를 임직하고, 교회가 선출한 장로들로 하여금 목사를 도와 교회를 치리하였다. 교회의 체제를 갖춘 후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을 세상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의 가장 큰 관심은 ‘성화론’이었다. ‘구원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여 광범위한 사회개혁과 변화를 시도하였다. 그 결과 제네바 시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지저분하고 가난하며 범죄율이 높은 도시였는데, 지금은 가장 깨끗하고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민주주의가 발달되고 번영을 누리는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종교적으로 제네바는 기독교 난민의 성지가 되었다. 6만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핍박을 피해 당시 인구 1만 3천 정도의 도시로 이주한 것이다. 이곳에서 개혁신앙으로 교육받은 자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칼빈의 가르침을 전파함으로써 칼빈주의는 영국, 스코트랜드, 네덜란드뿐 아니라 신대륙에도 퍼져나갔다. 이러한 칼빈의 노력은 1598년 앙리 4세의 낭트 칙령으로 그의 고국 프랑스에서도 종교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열매를 맺었을 뿐 아니라,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속사는 참으로 오묘하고 신비롭게 이어져 왔다. 파렐을 통해 칼빈을 설득하고, 그 이전에 고국에서의 핍박과 전쟁으로 인해 우연히 들렀던 제네바가 칼빈 개혁의 성지가 되어 전 유럽으로 확산되게 하신 것은 칼빈의 의지나 능력이 아니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요 주권의 결과였다. 성경 시대 이후에 종교개혁을 통해 구속 역사의 흐름을 중단 없이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앞에 감사와 영광을 돌릴 뿐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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