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ㅣ SITEMAPㅣCONTACT US
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HOME > 만남의광장  
 
   
고난주간, 그들은 왜 돌변했을까
 글쓴이 : 관리자
 

고난주간, 그들은 왜 돌변했을까 

2010년 4월호


고난주간 첫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때, 성은 인산인해였다. 국내외에 흩어졌던 유대인 270만명이 유월절을 지키려 모여 들었다. 당시 예루살렘은 문명이 발달하고 크게 번영한 도시였다. 성 안에 모인 이들의 최대 화제는 ‘예수’라는 인물이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5천 명을 먹였다는 불가사의한 기적, 얼마 전엔 죽었던 사람을 살려냈다는 말까지 떠돌았다. 로마의 식민 지배와 유대교 지도자들의 부패에 염증을 내던 민심은 예수라는 새로운 가능성에 들떴다.
불만 당기면 폭발할 듯한 예루살렘, 마침내 예수가 입성하자 온 성은 흥분했다. ‘구원하소서(호산나)’의 함성이 메아리쳤다. 예수님 제자들의 마음은 방망이질 쳤을 것이다. ‘마침내 이런 날이 오고야 마는구나!’
그러나 예수님은 들뜨지 않으셨다. 불과 나흘 후, ‘죽여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 하는 광기에 찬 외침이 바로 이들에게서 터져 나올 것을 보셨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왜 그들은 나흘 만에 돌변하고 말았던 것일까.

영광의 입성, 그러나 예수님이 타신 것은 나귀 새끼였다.
무게를 견디지 못해 뒤뚱거리는 새끼 나귀. 구약의 예언을 이루신 것이지만 열렬한 환영에는 걸맞지 않은 풍경이다. 당당한 구원자답지 못한 외양이다. 환호하면서도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이건 뭐지?’하는 의아함이 똬리를 틀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라고 하시지만 사람은 외모를 본다. 말의 내용이 어떻든 넥타이가 조금만 비뚤어져도, 입가에 김치 국물만 좀 묻어 있어도 혀를 끌끌 차는 게 인간이다.
다음날(권위의 날) 예수님은 부패한 성전 청소에 나선다. 말은 청소지만 지배계층이 보기엔 난동이다. 기물은 파손됐고 상거래는 마비됐다. 모든 이가 신성시하는 성전에서 일어난 일이다. TV 뉴스가 있었다면 특보에 들어갔을 것이고, 신문이 있었다면 ‘성전 난입, 초유의 폭력사태’라는 헤드라인을 뽑았을 것이다. 이런 파격적인 행동에 박수칠 사람은 많지 않다. 흥분했던 민심은 나귀 새끼에서 갸웃하고, 성전 청소에서 기우뚱하기 시작했다.

이런 미묘한 변화를 예루살렘의 종교 기득권층은 놓치지 않았다.
화요일, 대반격이 시작된다(변론의 날). 시기와 탐욕의 대공세였다. 종교적 정통성을 수호하겠다는 대의(大義)를 내세운 이단 논쟁, 그러나 내심은 예수님에 대한 시기로 불타고 있었다. 한 꺼풀 더 벗겨보면 밥줄이 끊기게 된 것이 진짜 이유였다. 사람들이 성전 대신 예수에게로 몰렸기 때문이다. 과부의 가산까지 빼앗아 오던 종교 권력에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악에 받친 그들과 하루 종일 계속된 논쟁. 말 한마디 돕지 못하는 시골 어부 출신들만 곁에 있는 예수님의 초라한 행렬과, 당대 최고의 지식인, 기라성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도열한 양자의 맞대결은 먼발치에서 형세만 엿볼 수 있었을 대중들에게는 착시 현상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침묵의 날), 아예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으신 예수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게다가 십자가를 사흘 앞두고 예수님은 스스로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노골적으로 선포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상식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쉽게 움직인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아침과 저녁이 다르다. 민심의 변화를 직감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실행에 옮기고, 대세가 기울었다고 느낀 가룟 유다는 투항한다. 그리고 군중들은 나흘 만에, 종교 기득권층이 심어 놓은 선동꾼들의 선창 아래 자신들의 구원자를 ‘죽여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그들에게는 믿음의 뿌리가 없었다.
시류(時流)와 분위기에 편승한 감성, 인간적 기준에 근거한 이성, 자기 상식에 입각한 신앙의 껍데기만 있었을 뿐이다. 자기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 발생하고 시류가 바뀌면 금세 무너질 허약한 것들이다.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는 우리는 어떤가. 수시로 바뀔 시류에 들뜨고, 유명한 학자들의 평가에 기대고 있지는 않은가. 여전히 내 이성과 상식으로 말씀을 판단할 자세를 취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요셉의 뼈만은 짊어지고 광야를 건넜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어떤 일이 있어도 말씀만은 지키겠다는 각오다. 하나님의 말씀에 단단히 뿌리박은 믿음만이 말세 성도의 살 길이다.

글_호준석 장로


 
   
 




 
 
예레미야가 사용한 암호 ‘세삭’

“휘선 박윤식 목사님, 사랑합니다.”…

모이자! 축복과 연합의 땅 여주로

성령이 역사하시면 온 세계가 구속사…

구속사를 사랑한 목사님의 작별 편지

참평안에 온 편지

어느 날 찾아온 기쁨의 소식

박수 칠 때 떠나자

구속사에 기록될 나의 2016년

신비로운 칠일의 주기

나의 두 문장은?

말세 성도의 통쾌한 커밍아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