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ㅣ SITEMAPㅣCONTACT US
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HOME > 만남의광장  
 
   
전쟁의 광풍(狂風)을 멈추게 하라
 글쓴이 : 관리자
 

겨울이다. 전쟁의 광풍이 매섭게 한반도를 휘몰아치는 엄동설한이다. 어떤 이는 흥분 속에, 어떤 이는 공포와 두려움의 떨린 입술로 ‘전쟁!’을 외치며 한 길로 달려가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 이 공포스런 전쟁은 인류의 발자취와 함께 동행했던 길동무였다는 사실이다. 인류의 역사와 전쟁의 역사는 이처럼 언제나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전쟁사에는 인간의 품성과 문화, 정치, 종교, 과학, 한 시대를 지배한 시대정신과 시대의 흐름 등이 모두 담겨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쟁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면 막연한 공포나 흥분을 넘어 역사의 큰 물결을 바라볼 수 있는 ‘혜안’(慧眼)을 얻을 수 있다. 다윗은 일찍이 이를 간파하고 “전쟁은 여호와께 속하였다”(사무엘상 17:47)고 외쳤다. 무력! 그것이야말로 승자의 조건처럼 각인된 인류의 가슴 속에 다윗은 ‘칼과 창’, 즉 무기나 권력의 힘이 역사를 움직이는 실체가 아님을 일깨워 줬다. 하나님은 ‘전쟁에 능하신 분’(시편 24:8)이요, 그분의 손에 구원과 심판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뜻 없는 전쟁이 없고, 이유와 목적이 없이 그냥 우연히 발생한 전쟁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모든 전쟁에는 이를 용인하시고, 또는 발생케하신 역사의 섭리자,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가 있다.
그러므로 역사의 섭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의도하시는대로 움직이는 것이 바로 전쟁이다. 이런 전쟁에서는 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바벨론에 저항하지 말고 항복하라고 외쳤던 예레미야의 예언은 바로 이런 의도에서다. 신흥 제국 앗수르를 제압한 것은 ‘독수리 날개를 가진 사자’, 바벨론이었다. 이들의 전쟁에서 바벨론이 승자가 된 건 바벨론을 통해 하나님의 장자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그들의 죄에 대한 단호한 정죄를 내리시기 위함이다. 이것이 전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앗수르도, 바벨론도 하나님의 아들을 책망하여 바로잡기 위한 ‘회초리’(이사야 10:5)일 뿐이다. 이를 깨닫지 못하고 ‘상한 갈대 지팡이’같은 애굽(열왕기하 18:21)과 동맹하여 바벨론에 대항하려 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항거나 마찬가지다.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심판의 기간, 70년이 다 되어가자 번창하던 바벨론을 제압한 것은 새로운 제국 페르시아였다. BC 539년 키루스(고레스) 왕의 바벨론 함락과 ‘귀환령’의 반포는 결코 그것이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성취하시고자 만유를 주재하시는 하나님의 커다란 섭리의 소용돌이임을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처럼 하나님은 전쟁이란 회초리를 통해 자녀들을 야단치셨다가 전쟁이란 선물로 축복하시는 분, “병 주고 약 주시는”섭리자이다.

또한 전쟁은 인간의 ‘야수성’을 드러내는 폭로의 수단이기도하다. <전쟁의 역사>에서 저자 몽고메리는“진정한 군인은 타인을 적으로 삼지 않고, 인간 내면의 야수를 적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모든 전쟁은 ‘이성’과 ‘사랑’, ‘배려’와 ‘인간성’을 벗어던지고 ‘야성’과‘욕망’으로 다투는 싸움이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이후는 인류가 하나님과 성경을 배척하고 인간의‘이성’을 최고의 우상으로 여기던 ‘이성예찬’의 시대였다. 인간의 우월성과 위대함에 스스로 도취하여 하나님을 멀리하던 교만의 시대, 그런 인류의 환상을 깬 것도 다름 아닌 전쟁이었다. 하나님은 1,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인간의 야수성과 잔인성을 까발리어 당신 앞에 무릎 꿀리셨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인가 저것인가?
오늘은 이 사람이고 내일은 저 사람인가?
나는 동시에 둘 다인가? 타인 앞에서는 위선자
내 앞에서는 경멸할 만큼 비통하는 약골인가?
아니면 이미 성취된 승리로부터 혼돈 가운데로 도망치는
네 속에 여전히 살아있는 패잔병 같은 그 무엇인가?

히틀러 암살 계획을 세우다 붙잡혀 감옥에서 생을 마친 본 회퍼의 인간 자아의 갈등에 관한 위 고백은 당시 인류의 현 주소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전쟁을 통해 이성과 도덕의 틀 속에 감추어 두었던 인간의 위선을 끄집어 내셨다. 인간의 그 추한 본질은 결코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그 어떤 것으로도 위장할 수 없는 것! 오직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뼈 깎는 회개로만 치유할 수 있음을 하나님은 전쟁을 통해 만 천하에 드러내셨던 것이다. 끝으로 전쟁은 교류의 수단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은 일본과 조선의‘싸움’이면서 사로잡아간 장인(匠人)들을 통해 도자기를 비롯한 각종 문명과 기술을 보급하는 교류의 수단이기도 하였다. 그리스나 로마가 페르시아와 벌인 전쟁이 그러했고, 유럽의 기독교 국가와 이슬람 세력간에 벌였던 십자군 전쟁, 실크로드를 오가며 전쟁을 벌인 징기스칸과 유럽의 군대들은 서로 살육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다. 지금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적이던 고대 세계에서 전쟁은 가장 효율적인 교류의 장이었다. 하나님은 전쟁을 통해 서로의 생각과 삶의 방식, 문화를 섞으시고, 교류하게 하심으로 함께 발전되게 하신 것이다.
2010년 세밑, 연평도(延坪島)발 전쟁의 기운이 장마철 저기 압처럼 온 한반도를 뒤덮고 있다. 그러나 전쟁은 오직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발생할 수 없으며 발생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6·25 전쟁이 우리에겐 너무나 아픈 상처요 반세기가 넘어도 마르지 않는 눈물이었지만 한민족의 가슴 속에 ‘재기’에 대한 집념과 ‘불굴의 의지’를 일깨워준 촉매였기에 달리 보면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커다란 축복이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이 지금까지도 교전을 벌이는 ‘팔레스타인’세력들은 다름 아닌 ‘블레셋’의 후예임을 생각할 때 그 전쟁은 조상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옆구리 가시’(사사기 2:1-5)와의 싸움이다. 이를 고려할 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쟁의 손익계산서를 따지는 무모한 용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와 섭리의 큰 흐름을 살피는 영적 통찰력과 지혜이다.

글_ 홍봉준 목사


 
   
 




 
 
예레미야가 사용한 암호 ‘세삭’

“휘선 박윤식 목사님, 사랑합니다.”…

모이자! 축복과 연합의 땅 여주로

성령이 역사하시면 온 세계가 구속사…

구속사를 사랑한 목사님의 작별 편지

참평안에 온 편지

어느 날 찾아온 기쁨의 소식

박수 칠 때 떠나자

구속사에 기록될 나의 2016년

신비로운 칠일의 주기

나의 두 문장은?

말세 성도의 통쾌한 커밍아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