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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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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의미
 글쓴이 : 관리자
 

홍봉준 목사

시간의 양면성
시간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졌고, 태양과 지구와 달의 천체 운동 속에서 일정하고도 규칙적으로 흘러간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처럼 완벽하게 객관적인 것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시간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같은 24시간이지만 사람마다 느끼는 시간의 길이는 다 다르다. 성경에도 하나님의 시간은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같다고 기록됐을 정도로(벧후 3:8, 시 90:4)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과학적으로 보면 가장 객관적인 시간이 왜 사람들의 삶 속에서는 가장 주관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는가? 이는 시간을 소비하는 주체인 사람의 삶의 내용과 관련돼 있다. 동일하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어떤 목적을 위해 소비하는가에 따라 시간의 가치가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시간의 창조와 넷째날 창조
처음 시간은 어떻게 생겨나게 된 것일까? 이 문제는 물리학이나 천문학의 문제라기보다 철학적 이슈로 논의된 주제이다. 사실 시간은 어떤 객관적 실체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철학적으로 느끼고 인지하는 인식의 대상이다. 성경은 시간의 창조를 넷째날 창조로 설명하고 있다. 해와 달과 별의 창조가 시간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천체의 창조를 통해 하나님은 낮과 밤을 구별하고, 사계절과 하루, 일년의 시간을 구분하신 것이다.
오늘날처럼 초침까지 딸린 정교한 시계와 음력날짜까지 병기한 달력이 만들어진 것은 인류 역사에서 최근에 해당한다. 처음 인류가 시간을 인식하게 된 것은 역시 넷째날 창조하신 태양과 달을 통해서다. 해가 지고 뜨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경험함으로써 ‘하루’의 개념이 생겨났고, 달이 지구를 도는 공전주기를 통해 ‘한 달’이라는 시간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계절의 변화와 농사짓는 생활주기를 통해 ‘일 년’ 단위로 반복되는 기후변화를 겪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반복적인 패턴을 경험하고, 연구하는 가운데 1년을 열두 달로, 한 달을 30일로, 하루를 24시간으로 구분하는 가운데 오늘날의 객관적인 시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시간을 만드신 목적
하나님의 세계에서의 시간은 ‘무한’이다. 무한은 제로와도 같다. 시간이 있다는 것은 곧 ‘유한’을 의미하므로 시작과 끝이 있다. 그러나 무한은 시작도 끝도 없다. 이처럼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넷째날 창조를 통해 영원한 시간에 ‘마디’를 만드셨다. 하루 단위의 마디, 한달 단위의 마디, 일년 단위의 마디를 두신 것이다. 어떤 목적에서 이런 시간의 마디를 만드셨을까?
창 1:14-19의 넷째날 창조 내용을 볼 때 시간의 가장 작은 마디인 ‘하루’는 <밤과 낮>을 통해 성립된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첫째날이 되고 하루가 완성된다. 그러므로 성경적 의미에서 ‘하루’는 ‘어둠’의 상태에 있는 인간이 ‘빛’되신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리적인 시간의 의미보다 상당히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시간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루를 ‘자정에서 자정까지의 시간’이 아니라 ‘일몰부터 다음날 일몰 전까지’로 정의했다. 지금의 시간개념으로 보면 ‘고무줄 시간’이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 ‘어두움’에 거하던 자가 주 안에서 ‘빛’이 될 때 진정한 의미에서 하루를 경험한다는 영적인 요소를 포함한다(엡 5:8, 롬 13:12).
달(month)의 개념도 마찬가지다. 달(moon)은 지구를 약 30일 단위로 돌며 ‘한 달’의 시간(항성월 주기는 29.5일)주기로 움직인다. ‘달’을 뜻하는 히브리어 ‘호데쉬’(vd,jo)는 ‘새롭게 하다’는 뜻의 동사 ‘하다쉬’(vd'j;)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성경에서는 성전을 수리한다는 뜻의 ‘중수하다’(대하 15:8, 24:2, 12)와 ‘새롭게 하다’(애 5:21, 시 103:5, 104:30)라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은 한 달 단위의 시간의 구분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지난 달의 실패와 아쉬움을 멀리하고 새로운 각오와 비전으로 새 출발 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고자 하셨던 것 같다.
일년(year)의 구분도 그 안에 ‘사계절’의 변화를 포함하여 이루어졌다. ‘년’은 히브리어 ‘샤나’(hn:v;)로서 ‘다시 하다, 변화시키다, 변장하다’는 뜻이다(왕상 18:34, 욥 14:20). 매년 새로운 해가 시작된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원동력이 된다. 나아가 1년의 시간 속에 포함된 사계절은 농사짓는 주기를 결정해 준다. 씨를 뿌리고 수확하고 저장해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수확의 기쁨과 감사를 수반하게 마련이다. 성경은 이를 중요한 세 절기로 규정했다. 보리 수확기에 유월절을 제정하여 추수 감사의 마음을 표하였을 뿐만 아니라 ‘출애굽’이라는 구속사적 은혜를 체험하게 하셨다. 맥추절에는 밀의 수확에 감사하며 시내산에서 율법 주신 은혜를 체험하였다. 초막절에는 과실 추수를 끝낸 후 이를 창고에 저장하고(수장절) 광야생활의 은혜를 후대들에게 체험케하고 전수하고자 광야에 나가 초막을 짓고 1주간의 절기를 지키게 하셨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1년 단위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시간에 맞춰 감사로 마무리하며 감사로 새롭게 출발하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신학적인 시간
넷째날 창조를 통해 물리적인 시간을 창조하시고 그 시간 단위에 맞춰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께서 독특하게 신학적인 목적으로 구분하신 시간이 있다. 즉 6일 동안 우주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을 기념하여 일주일 단위로 시간을 구분하여 살아가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천체운동과는 상관없이 철저하게 신학적인 의도로 구분하신 시간이다. 인간의 노동을 멈추고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기 위해 경건하게 예배하는 날이다. 출애굽 이후에는 7일째의 이 시간의 의미에 애굽에서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덧붙이셨다(신 5:15). 그리고 이러한 7일 단위의 삶의 정착을 위해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양식인 만나를 공급하는 주기를 여기에 맞추셨다. 6일 동안 만나를 주시고 7일째는 공급하지 않음으로써 자연스럽게 먹는 문제에서 벗어나 영적인 문제,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영의 양식으로 살아가는 훈련을 시키신 것이다.

날 계수하는 지혜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시간의 영역 속에서 살아간다. 넷째날 창조하신 해와 달과 별을 통해 구분하신 시간(하루, 한 달, 일 년)과 일주일 단위의 시간이 그것이다. 물리적인 시간의 구분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아 성찰과 반성, 그리고 새 출발을 돕기 위한 것이라면 일주일 단위의 시간 구분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경배하며 예배하는 영적인 삶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시간의 영역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는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온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이를 깨달은 모세는 시편 90편에서 ‘날 계수하는 지혜’를 달라고 간구하였다(시 90:12). 아무리 많은 시간을 살았다 할지라도 주께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고 밤의 한 경점 같음을 깨달을 때,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무상함을 깨달은 것이다.
나에게 시간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시간을 통해 나의 삶을 성찰하고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더듬어 발견하며, 일주일 단위로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길 원하신 것이다. 이를 깨달을 때 나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 속에서 뜻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유수와 같은 세월 속에서도 구속사적 맥을 정확히 짚어 내며 시간의 마디를 분간하며 살아가는 인생은 영원을 향해 전진할 수 있다. 이 깊은 영적 통찰을 얻기 위해 모세의 말씀처럼 ‘옛날’을 기억하고 ‘역대의 연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신 32:7). 이 모두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속경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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