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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현장_하나님이 함께하신 대한민국 현대사 탐방 (5)
 글쓴이 : 관리자
 

기억은 구원의 비밀이다
인천상륙작전 현장


이스라엘 야드 바쉠 홀로코스트 박물관 전시실 2층 동판에는 “Forgetfulness leads to exile, while remembrance is the secret of redemption” (망각은 포로 상태로 이어지나 기억은 구원의 비밀이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대한민국의 6월에는 특별히 기억되어야 할 날이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이 땅에 한민족 역사 이래 가장 큰 상처를 남겼다. 벌써 6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대한민국은 아직도 종전국(終戰國)이 아닌 휴전국(休戰國)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 전쟁은 요즘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에게 잊혀진 전쟁이 되어 버렸다. 우리의 부모님 세대 혹은 조부모님 세대들이 젊은 시절에 겪었을 그 치열한 전쟁의 현장을 찾아가 보았다. 전쟁의 흐름을 바꾸면서 다 죽어가던 대한민국을 살려냈던 결정적 전투, 세계 전쟁사에도 최고의 작전으로 기록된 인천상륙작전의 현장을 본 교회 정도영 장로(육사 34기, 前 5군단 작전참모, 육군대학 교관, 전쟁사 전문가, 現 국토해양부 근무)와 동행했다.



인천상륙작전 직전의 상황
인천은 서울에서 30km 남짓 떨어진 곳이다. 상륙작전이 이루어졌던 해안으로 가기 전에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에 위치한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을 먼저 찾아갔다. 1984년에 개관했다.



“인천상륙작전은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작전이었습니다. 혹자는 제2차 세계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비교하기도 하는데 전쟁 전체에 미친 영향을 고려하면 인천상륙작전이 훨씬 효과적이었다는 거죠. 노르망디 작전은 성공 후에도 독일군의 세력을 꺾기까지 1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은 불과 8일 만에 남한 깊숙이 내려와 있던 북한군을 와해시켰습니다.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할 때 질서정연하게 퇴각한 것이 아닙니다. 순식간에 군대의 형태를 잃어버렸습니다. 그야말로 뿔뿔이 흩어져 버린 거죠.”(정도영 장로)
기념관에는 상륙작전 직전의 대한민국 상황을 보여주는 여러 전시물이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이 상륙작전 8일 전의 상황을 보여주는 지도 한 장이었다. 경상남도 일부만 남기고 북한군과 대치하던 최후의 방어선 낙동강 전선을 표시한 지도.
“9월 6일에 북한군 15사단이 영천을 점령했습니다. 6월 25일 이후 불과 40일 만에 400km를 남으로 밀고 내려온 거죠. 한반도 전 국토의 90%를 빼앗긴 것입니다. 낙동강 전선에 있던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한국민 중 요인(要人) 10만 명 정도만 괌으로 철수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그때 기독교인들이 부산 구덕운동장에 모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부산 앞바다에 뛰어 들어 죽는 길밖에 없으니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요. 대한민국이 절체 절명의 위기 속에 있었습니다.”(정도영 장로)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향해 도움의 손길을 뻗으셨다. 9월 12일 영천지구 전투에서 극적으로 승리하여 낙동강 전선의 주 저항선을 회복한 것이다.
“1950년에 낙동강은 30년 만의 최악의 가뭄으로 수심이 불과 1~1.5m 수준이었습니다. 걸어서도 건널 수 있었던 거죠. 그런데도 못 뚫었습니다. 낙동강 전선에서 부산까지는 100km만 남아 있었습니다. 북한군은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총력을 기울여 공격을 감행했고 우리 국군과 유엔군은 배수진을 치고 막아낸 거죠. 하나님께서 낙동강 전선이 뚫리지 못하도록 지켜주신 겁니다. 낙동강 전선이 무너졌다면 인천상륙작전도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정도영 장로)
기념관을 나오니 앞마당에 인천 해안에 상륙했던 LVT(수륙양용장갑차) 모형이 서 있다.
초등학교에서 단체견학 온 버스가 기념관 주차장을 채우고 있다. 인천 해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녹색해안(Green Beach), 적색해안(Red Beach), 청색해안(Blue Beach)
인천상륙작전은 병력 75,000명과 함정 261척이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군의 퇴로와 보급로를 차단해 낙동강 전선에서 총 반격을 감행함으로 한반도의 전세를 역전시킨 작전이었다. 유엔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의 구상에 의해 계획된 작전으로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으로 명명되었다. 그러나 맥아더의 구상은 미 합참과 미 극동 해군의 심한 반발에 부딪혔다. 협소한 수로, 한정된 진입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조석차(潮汐差), 상륙 해안의 악조건, 요새화된 월미도 등 불리한 천연조건들 때문이었다. 성공 확률이 불과 5천분의 1로 평가됐다. 8월 23일 동경에서 열린 유엔군사령부 회의에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 셔먼 해군참모총장 등이 모여 인천상륙은 불가하고 군산이나 아산만에서 상륙작전을 펼쳐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뜻을 굽히지 않고 장장 45분의 연설로 회의 참석자들을 설득하여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 “북한군이 인천을 상륙 불가능지역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역이용하여 기습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정의와 자유에 대한 신념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입증해 보이기 위해 우리는 인천에 상륙해야만 합니다.”(맥아더 장군의 연설에서)
인천 외항(外港)은 화력 지원을 위한 대규모 함대가 정박하기 협소하고 병참 지원에 필요한 하역 능력이 미흡했다. 그나마 정박이 가능한 해안 세 곳이 각각 녹색, 적색, 청색으로 명명되었다. 상륙할 수 있는 시간도 아침 만조시간인 6시 30분부터 3시간, 저녁 만조시간인 5시 30분부터 3시간뿐이었다. 제1단계로 1950년 9월 15일 새벽 6시 33분에 미 제5해병연대 제3대대 1파가 전차 9대와 같이 녹색해안에 상륙했다. 이들은 오전 8시에 월미도를 완전히 장악했다.
“월미도는 인천의 관문입니다. 북한군 400여 명이 월미도에 동굴 등 진지를 구축하고 저항했지만 도자전차로 밀어붙여 장악했습니다. 북한군을 잡고 보니 포탄 소리에 정신 착란을 일으킨 경우가 많았죠. 상륙작전을 하면서 폭격기와 함정에서 월미도를 향해 9월 13일부터 포탄을 계속 쏘아댔으니까요.”(정도영 장로)
상륙작전의 제2단계는 저녁 만조시간에 이루어졌다. 오후 5시 33분에 미 제5해병연대 1, 2대대와 한국해병 3대대가 적색해안에 상륙을 시작했고 미 제1해병연대의 1, 2, 3 대대가 청색해안에 상륙했다.
“저녁 만조 때의 상륙을 위하여 오후 2시 반부터 화력지원함의 포격이 개시되었죠. 500여 척의 상륙주정과 LVT로 바다가 뒤덮였다고 합니다. 미 제5해병연대는 적색해안에 상륙해서 응봉산으로 향했고, 청색해안으로 상륙한 미 제1해병연대는 수봉산을 공격했죠. 마침내 2대대가 수봉산을 탈취해서 서울로 가는 경인가도를 장악했습니다. 그때 통신이 불통되고 매연이 심해서 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고 합니다.”(정도영 장로)



상륙이 이루어졌던 3개 해안에 세워진 기념비를 찾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재는 월미도에 있는 녹색해안을 제외하고는 해안 매립지 때문에 적색, 청색해안은 도로가 되어 있어 해안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비교적 웅장하게 지어진 인천상륙작전 기념관과는 다르게 길가에 조그맣게 서 있는 초라한 기념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렇게 관리되다가는 점점 찾기 어려워질 것 같네요. 후손들에게 쓰라린 옛날을 분명하게 기억시키기 위해서는 중요하게 보존해야 할 것들인데 안타깝습니다.”(정도영 장로)

인천대교와 팔미도 등대
월미도 앞 바다에서는 인천대교가 보인다. 맑은 날씨에는 팔미도와 등대도 볼 수 있다. 인천상륙작전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던 바다 위로 길이가 무려 21.38km에 달하는 인천대교가 놓여져 있다. 인천대교 너머에 팔미도가 있다. 팔미도 등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로서 서남해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하여 인천항을 드나들던 선박에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9월 15일 00시 12분, KLO부대(최규봉 부대장)가 팔미도 등대를 탈환했습니다. 등대를 밝히고 연합군의 수로 진입을 인도했죠.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등대 불빛을 따라 모인 유엔군 함대가 15일 새벽, 인천상륙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죠.” (정도영 장로)

수봉산과 응봉산
청색해안으로 상륙했던 해병 1연대가 수봉산을 공격하여 장악했다. 현재 수봉산에는 수봉공원이 자리잡고 있었고 인천지구전적비가 있었다.
“수봉산을 탈취한 것은 경인가도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청색해안에 상륙한 해병 제1연대가 수봉산을 장악하고 적색해안에 상륙한 해병 제5연대가 응봉산을 장악해서 서울로 가는 교두보를 확보한 것입니다.
낙동강 전선에 있던 북한군에게 투입되는 모든 병력과 보급품은 서울을 통하고 있었습니다. 아군이 인천에서 들어와 서울을 수복한 것은 북한군의 숨통을 눌러버린 것입니다. 적에게 치명타를 입힌 거죠. 맥아더가 계속 고집을 부린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군산이나 아산으로 들어가는 것은 숨통을 누르는 게 아닙니다.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에게 결정타를 가하기가 어려웠을 테니까요.“(정도영 장로)

응봉산은 적색해안으로 상륙했던 해병5연대가 장악한 곳이다. 응봉산에 있는 인천 자유공원에는 맥아더 동상이 있다.




“맥아더 장군은 최고의 군인입니다. 미국의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극동 전문가이기도합니다.
1937년에 퇴역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1년에 다시 현역 군인으로 돌아와 서태평양사령관으로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기도 했죠. 그는 6·25 전쟁에 준비된 군인이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강해서 대한민국을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지키시기 위하여 맥아더 장군을 하나님의 도구로 삼으셨다고 생각합니다. 매사에 대한민국의 입장에 서서 소속 국가인 미 합동참모 본부와 대립하기도 했습니다. 소련, 중공과의 직접 전쟁을 피하기 위해 제한전쟁을 원칙으로 했던 미국 정부의 입장에 반대하여 38선 돌파조치를 통해 압록강까지 올라가기도 했죠. 중공군의 개입 이후에도 맥아더는 6·25 전쟁의 종식을 위한 총진격 명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1951년 4월에 해임되고 말았습니다.”(정도영 장로)

상륙 작전의 성공을 도우신 하나님
현장을 직접 찾아보니 상륙 작전의 성공을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배가 상륙하려면 적어도 7~8m의 수심이 필요한데 인천 해안에 그 수심이 차는 기간은 9월 15일부터 단 4일뿐이었다. 그 4일 중에도 아침 만조시간 3시간, 저녁 만조시간 3시간만 주어진 상황이었다. 이런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모든 미군 지휘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작전을 고집한 맥아더 장군이 있었다. 부산까지 잃을 수는 없다고 낙동강 전선에 있던 미 해병 제5연대의 인천투입을 반대했던 미8군 사령관 워커의 고집을 꺾은 이도 맥아더 장군이다.
“낙동강 전선에 여유가 있던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미 해병5연대를 인천상륙작전에 투입시키면 부산이 위태로운 상황이었죠.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상륙작전 사흘 전인 9월 12일에 영천을 탈환했고 맥아더의 고집이 통했습니다. 북한군의 잘못된 판단도 한몫 했죠. 중국 모택동이 김일성에게 경고를 했습니다. 맥아더는 상륙작전의 귀재이니 인천을 조심하라고 말이죠. 그러나 김일성이 듣지 않았습니다. 낙동강 전선에서 조금만 더 하면 금방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김일성은 낙동강 전선에 전력을 쏟았다. 서울, 인천지역에 경비부대만 남겨두고 전투부대는 모두 낙동강 전선에 투입한 것이다. 9월 15일 상륙작전 후 9월 16일 00시, 낙동강 전선의 한국군과 유엔군에게 반격명령이 떨어졌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 북한군에 전해지자 전세는 급변했다. 북한군은 심리적으로 무너졌다. 상륙작전 8일 후인 9월 23일, 김일성은 마침내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군인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후방에 적이 들어왔다는 소식입니다. 후퇴로가 차단되었다는 소식에 북한군은 공황상태에 빠졌던 것입니다. 총퇴각 명령으로 부대가 다 흩어져 버렸죠.”(정도영 장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온다. 그때 부산 구덕운동장에서 열린 기도회는 낙동강 전선의 승리를 기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승리는 생각지도 못한 인천에서 시작됐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홍해를 갈라주셨던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에게 인천 앞바다를 열어주신 것이다.
“그런데 군인의 입장에서 참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이 있습니다. 아침 만조 때 녹색해안에 상륙한 유엔군이 1개 대대 500명 수준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는 저녁 만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죠. 근데 그 동안 북한군은 뭘 하고 있었을까요? 마음만 먹었다면 월미도에 상륙한 유엔군을 공격하여 섬멸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김천과 왜관에 있던 북한군이 인천으로 투입된 것은 9월 18일~19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작전의 성공을 도우신 것입니다.”(정도영 장로)
포연으로 자욱했던 그날의 바다는 서해안 시대를 맞이하는 인천대교와 송도국제도시로 그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빠르게 발전하는 국가의 모습도 자랑스럽지만 우리는 너무 빨리 그날의 바다를 잊어버린 게 아닐까? 도로 옆에 초라하게 서 있던 기념비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군 생활을 할 때부터 전쟁사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했었죠. 특히 인천상륙작전은 전쟁사에 남을 가장 위대한 작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현장에 와서 직접 볼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 번 새깁니다.”(정도영 장로)
인천자유공원을 나와 서울로 향한다. 62년 전 그날 한국군과 유엔군이 확보하기 위해 북한군과 치열하게 싸웠을 그 길을 따라 서울로 달린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계획하시고 실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달려가는 그 길이 유난히 짧게 느껴진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애굽기 14:14)

글_ 서정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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