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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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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첫 독자의 자격이 있는가
 글쓴이 : 관리자
 

홍미례 성도

소설을 쓰는 친구가 하나 있다. E가 오랜 습작기를 뚫고 소설가로 등단하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
축하하고 반가운 마음도 잠시, 고작 신인이며 무명이지만 본격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을 가까운 친구로 둔다는 것이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님을 알았다. E가 쓰는 모든 글의 첫 독자, 혹은 첫 청취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E는 시도 때도 없이 글을 보내고 묻고 설명하고 수정하고 또 보내기를 반복한다.
습작기 때야 그렇다 치지만 이제 결단을 내려야했다. E에게 사적인 우정은 유지하지만 ‘첫 독자’는 다른 전문가를 찾아보라고 했다. E는 대수롭지 않게 ‘그건 의미가 없어. 네가 전문성을 좀 갖춰 주면 안될까?’ 대답했다. 혹 떼려다 혹 붙인다더니. ‘왜 하필 나야?’ 톡 쏘아 붙이자 E가 망설임 없이 말했다. ‘넌 나를 잘 알잖아…’ 나는 와르르 무너졌다. 그런가? 나는 정말 E를 잘 아는가? E가 말하는 첫 독자의 기준은 그런 거였나?

E에 대해 아는 것들을 나열해 보았다. E의 고백은 인간적인 E와 문학적인 E, 신앙적인 E 모두를 말하는 것일 게다. 사실 E의 글을 내가 이러쿵 저러쿵 비평하는 건 주제 넘는 편협한 수준이고 신앙에 대해서야 막연하게나마 E가 품은 문학을 통한 신앙적 비전 정도이지 구체적인 목표나 계획은 모른다. E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하여간에 내가 먼저 ‘너에 대해 안다’ 라고 말한 것보다 E가 ‘너는 나를 잘 알잖아’ 라고 말한 것이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E가 던진 동아줄에 묶인 사람처럼 E의 심연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만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아주 무거운 책임감과 은밀한 행복감이었다. 나는 ‘첫 독자 혹은 첫 청취자’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졌다. 왜냐하면 E가 보내오는 글과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또 다른 첫 독자였으므로.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본 구속사, 그것도 시리즈의 첫 독자, 첫 청취자라니(우리가)… 이것 참, 얼마나 놀랍고 위대하고 어마어마한 사건이며 관계인지. 모세가 하나님이 친수로 돌판에 새기신 십계명을 처음 목격했을 때의 정황과 심정이 이러했을까.
첫 독자는 그런 것이다. E는 완성된 글 한편을 보내기 위해 캐릭터, 대주제, 소주제, 구성, 문체, 배경 등등을 일일이 말해준다. 미리 말해주고 작업이 끝나고 나서도 말해준다. 귀도 따갑고 눈도 아프고 머리도 벅차다. 게다가 나는 전문가도 아니다. 이제 좀 그만하고 다른 글로 넘어갔으면 하지만 E는 제 성에 다 찰 때까지 집착하고 고집한다. 알고 보니 그것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첫 독자’에게만 하는 신뢰와 인내와 간절함이었던 것이다. 자기 실체와 가치와 능력을 알아달라는, 인정해 달라는 호소이자 증거였던 것이다. E의 첫 독자였을 때는 느껴지지 않던 어떤 것이 구속사의 첫 독자라고 생각하니 확 밀려왔다. 설레임이나 행복감, 감사함을 넘어선 것이었는데 그것은 비장함이나 비애감, 미안함과 가여움, 슬픔과 아픔이었다.
“너는 나의 첫 독자야”, 라는 고백을 들은 사람은 전문가여야 한단다. 첫 독자로서의 책임을 이행하려면 전문성을 갖춰야한다지 않는가. 갈수록 태산이다. 읽는 것도 부족해서 연구하고 글을 쓴 이가 나갈 길을 열어 달라는 것이다. 첫 독자(讀者)는 각자 어떤 의미에선 첫 독자(獨子)이며 첫 독자(獨者-孤獨者)이다.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그런 이름으로 부름 받았기 때문이다. 첫 독자는 사랑을 알고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의 첫 독자 모세는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한 사람이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사랑의 또 하나의 이름이 바로 온유함이다.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온유했던 모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강령을 받는 첫 독자의 자격을 충분히 구비했다. 첫 독자는 글을 쓰는 이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완전하게 알고 바르게 알고 그 가치에 합당하게 알아야 한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내가 먼저 내가 잘 압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진정한 첫 독자는 글을 준 이가 먼저 “너는 나를 잘 아는구나.” 라고 인정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첫 독자라면, 사랑한다면, 안다면 전도해야 한다. 첫 독자는 마지막 독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구속사의 첫 독자, 첫 청취자가 되었다지만 책들이 내 손안에 있다고 해서, 10번...100번 읽었다고 해서, 메달을 목에 둘렀다고 해서 실제적 구속사의 경륜 한 가운데 있는 것은 아니다. 구속사의 경륜에 필연적으로 쓰임 받는 일꾼이 되고 마침표가 되는 것은 삶의 본질적인 변화에 달려 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그가 외면하고 피하는가. 더욱 전문적으로 다가가자. 그가 오해하면서 비난하는가. 더 온유하게 다가가자. 그가 막막하고 연약한가. 완전하게 바르게 가치에 합당하게 알려주고 뜨겁게 기도하자. 어느 날, 무상으로 받은 첫 독자의 자격에 따른 책임을 은혜의 열심을 따라 이행하는 중에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네가 나를 참으로 아는구나, 라는 음성을 듣는다면 우리가 붙잡고 기도하고 있는 그 또한 첫 독자로 부름 받고 그 음성을 함께 들을 수 있는 마지막 독자가 되리라고 믿자. 와서 듣고 보고 읽으면 알게 될 것이다. 인생의 모든 사연이 실은 하나님 앞으로 불러오기 위한 유일한 사랑의 징검다리였다는 것을.

만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한 방울 한 방울로 써 내려간 듯한 구속사의 절절한 사랑을 힘입어 세계 열방을 향해 빛을 발하는 믿음으로 크게 소리쳐본다.
나는(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본 구속사의 첫 청취자요, 첫 독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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