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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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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리스트
 글쓴이 : 관리자
 




홍봉준 목사

사순절 기간이다. 사순절의 유래는 예수님의 40일 금식을 기념하기 위해 니케아 공의회(325)에서 결정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동방교회에서는 하루에 해가 진 다음에 한 끼 식사만 허용하며, 육식은 물론 생선과 달걀도 40일 내내 금할 정도로 엄격하게 지킨 반면에 서방교회는 상대적으로 느슨했다. 현재의 형태로 사순절을 지키게 된 것은 그레고리우스 교황 때로서, 재(灰)의 수요일(Ash Wednesday)부터 40일 동안(주일 제외) 사순절을 지켰다.
초기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이 재기를 매우 엄격하게 지켰는데, 하루에 한 끼, 저녁만 먹되 채소와 생선과 달걀만 허용되었다. 9세기에 와서 이 제도가 약간 완화되었고, 13세기부터는 간단한 식사를 허용하였다. 현대에 와서는 사순절을 단식기간으로 지키기보다는 구제와 경건훈련으로 더 유효하게 지키게 되었다.
문제는 사순절의 의미를 깨닫고 기쁨으로 지키기 보다는 고된 통과의례 정도로 여기다 보니 오히려 많은 폐단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사순절이 시작되기 3-7일전, 사람들은 미리 마음껏 고기를 먹고 축제를 즐기는 것을 먼저 하였다. 브라질 등, 대부분의 카톨릭 지역에서 행해지는 ‘카니발’(carnival;사육제) 축제가 그것이다. 카니발은 라틴어 ‘카르네발레(carnevale)’에서 유래된 것으로, 고기를 멀리한다는 뜻(‘came+vale’, Farewell, O Flesh:고기여 안녕!)을 포함하고 있다. 그중 재의 수요일 직전 화요일은 ‘마르디 그라’(Mardi Gras), 즉 ‘기름진 화요일’이라 해서 역시 잔치를 벌인다. 마치 금식하기 위해 금식 전에 잔뜩 기름진 음식으로 포식하는 것과 같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순절로 인해 가장 음란하고 쾌락적인 카니발이 생겨난 것이다. 이는 경건의 과정을 ‘금기’로 여기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경건에는 ‘금기’(Do not)만 있는 것이 아니다. 평소하지 않던 것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행위’(To do)를 포함한다.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충돌지점도 바로 이 경건에 대한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금기’의 날로 본 반면에, 예수님은 생명을 구하는 ‘행위’의 날로 여겼다(마태복음 12:1-14). 바리새인들 보기에 안식일에는 병 고치는 것(마태복음 12:10)도 행해서는 안 되는 금지의 날로 여겼지만, 예수님은 구덩이에 빠진 양의 생명을 건짐으로써 ‘선을 행하는 날’로 규정하셨다(마태복음 12:11-12). 안식일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결국 예수를 죽이기로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었던 것이다.
십계명에도 역시 경건의 두 가지 모습이 기록되었다. ‘To Do’(~행하라)의 계명은 제 4-5계명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며,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반드시 행해야 하는 계명이다. 이 둘을 제외한 나머지 계명들은 금지(Do not/~하지 말라)에 관한 내용이다. 십계명 안의 두 가지 상반된 계명으로 인해 이를 이해하고 적용하는 방식도 두 가지로 극명하게 갈린다.

바리새인 중 한 율법사는 예수님께 어느 계명이 큰지 물었다. 그 의도 속에는 어떤 것을 금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담겨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의도하지 않은 전혀 뜻밖의 답변을 주셨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한 단어로 요약하면 ‘사랑’이다(마태복음 22:34-40). 십계명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금지의 계명이 아니라 적극적인 선의 실천을 독려하는 사랑의 계명으로 말이다.
십계명과 관련하여 또 다른 일화는 부자 청년과 예수님과의 대화이다. 부자 청년의 관심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는가에 있었다. 이에 예수님은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부자 청년은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증거’를 하지 않았고 ‘부모를 공경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했다(마태복음 19:16-22)고 답변했다. 언뜻 부자청년은 계명을 다 지킨 완벽한 사람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는 말씀에 부자 청년은 고개를 숙이고 떠나갔다. 이로써 예수님은 그 청년의 ‘계명 준수’의 허상을 만천하에 드러내셨다. 그 부자 청년이나 율법사는 계명을 범하지는 않았다. 즉, 금지목록(Do Not List)을 어긴 적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의로운가? 예수님의 답변은 No! 죄를 범하지 않은 것 이상으로 율법의 정신을 헤아려 적극적인 선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 3대 시성으로 불리는 단테는 그의 대표적 ‘신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베르길리우스요. 내가 천국에 가지 못한 이유는 죄는 짓지 않았으나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요. <중략>

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것 때문에 당신이 찾고 있는 태양을 볼 수 없게 되었소.”(신곡, 연옥편 7곡 7-8행, 25-26행)


베르길리우스가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가지 못하고 연옥에 머문 이유가 무엇인가? 베르길리우스는 “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것”, 곧 ‘신앙심’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천국의 태양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부자 청년이나 율법사가 ‘한 것’은 계명을 범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단테의 말처럼 계명을 범하지 않았다고 의인은 아니다. 나쁜 사람이 아닐 뿐이지. 그들이 진정 의인이 되고 천국의 태양을 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계명의 본질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했다.
그들이 ‘하지 않은 것’, 곧 이웃 사랑,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결여가 그들의 책망의 원인이었다.

우리는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금지 목록’(Do Not List)을 만들어 잘 지켜야 한다. 사순절과 안식일, 십계명의 준수도 이와 관련된다.
그러나 반드시 명심할 것은 그것 만으로는 죄인이 되지 않을 수는 있어도 의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행위 목록’(To Do List)을 만들어서 적극적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율법의 이면에 있는 정신, 말씀의 이면에 있는 생명, 교리의 이면에 있는 사랑을 찾아 행해야 한다. 신약시대는 이 두 가지가 극단으로 대립했던 시대이다. 바리새인들은 모든 것을 ‘금지’의 관점에서 봤고, 예수님은 그것을 넘어 ‘실천’의 적극적인 면을 설파하셨다. 사순절은 우리에게 ‘금기’의 모습으로 다가오지만, 그럴수록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선의 모습을 발견하고 실천해 보자. 우리에겐 두개의 리스트가 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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