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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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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특강_ 당신은 누구인가 (브루스 월키 박사)
 글쓴이 : 관리자
 

독일의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는 “연극을 보러 갈 때,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작가가 누군지, 내용이 무엇인지 또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인생이라는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어 보지도 않고 올라갑니다. 인생의 무대에서 내려올 때 큰 실수를 했다고 후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셰익스피어는 “그런 인생은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와 같다. 시끄럽고 정신없으나 아무 의미도 없다”고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신을 보는 관점입니다. 자신의 본질과 운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가 인생을 좌지우지 하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고, 에드먼 벌크는 ‘종교적 동물’이라고 했으며, 토마스 칼라일은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라고 했고, 벤자민 프랭클린은 ‘인간은 도구를 만드는 동물’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어떤 철학자들은 우리가 동물보다 못하다고 말합니다. B. F.스키너는 “인간이 자신의 현주소를 잃은 후에는 모든 존엄성을 다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자신의 집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생의 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인간의 역할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인간에게 가장 큰 존엄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광과 존귀로 우리 머리에 관을 씌워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땅에서 나왔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시편 8편은 하나님께서 주신 존엄성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시편 8편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로 마치고 있습니다. 왜 찬양해야 합니까? 철학자들은 진리를 논할 때 존재론적 지식과 인식론적 지식으로 구분합니다. 존재론적 지식은 절대적인 진리로서,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고, 인식론적 지식은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지식으로서, 완전하지 않은 것을 뜻합니다. 인식론적으로 보면 만약 하나님의 존재를 아무도 모른다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찬양을 해야만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존재가 인간이 하나님을 찬양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아무도 나를 찬양하지 않으면 돌들이 외칠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님은 돌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신 것입니다. 죽은 돌 같은 우리를 산 돌로 변화시켜 주셔서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시고 인생의 무대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창조주, 역사의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찬미의 시에서는 항상 두 가지 이유가 나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찬양합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찬양합니다. 이 두 가지 이유가 시편 8편에서 더 심도 있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시편 8:1에 “주의 영광을 하늘위에 두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통해서 영원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 계신 것입니다. 우주만물의 위대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로마서 1:18-21). 지구의 자전 속도는 시속 1천 6백 킬로미터이며, 지구가 태양을 도는 공전의 속도는 시간당 11만 킬로미터에 달합니다. 태양계는 은하계를 돌고 있는데 그 속도는 시속 120마일이라고 합니다. 또한 우주가 계속 확장을 하고 있는데 그 커지는 속도가 1.8광년이라고 합니다. 우주에 대한 지식이 늘면 늘수록 인간은 더욱 작아지고 있습니다. 목성에서 본 지구는 목성 크기의 6분의 1밖에 되지 않고, 태양계의 끝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컴퓨터 화면의 1 픽셀밖에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은하계는 바다의 모래보다도 많다는 것입니다. 우주 가운데 우리는 먼지보다도 못한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구라는 무대위에 구속사라는 위대한 연극을 펼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작은 존재에 불과한 인간을 과연 존엄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이해한 바로는 이렇습니다. 이 큰 우주 가운데 지구가 바로 ‘무대’에 해당하는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서 있는 무대도 지구 안에서는 먼지보다도 작은 곳입니다. 그렇지만 이 무대위에 서면 위대한 연극을 펼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지구라는 무대 위에서 위대한 드라마를 펼치시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구속사(救贖史)” 입니다. 작가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며, 연출자도 하나님이십니다. 이 연극의 주인공이자 영웅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의 대적은 바로 마귀이고, 우리는 조연들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만물을 다스릴 수 있도록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오늘 날 인류가 이룬 업적들은 참으로 대단해 보입니다. 물과 바람을 통해 에너지를 만들고 원자력도 발견했고, 소리의 속도와 같은 속도로 날아갈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의학기술의 발달로 많은 질병을 고칠 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로 전 세계 어느 곳에서든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질적인 세상에서는 인류가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업적들이 나쁜 영향으로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원자력을 만들었으나 그것이 사람들을 죽이는 무기가 되었고, 비행기가 빨리 날아갈 수 있게 된 반면 폭탄도 더 빠르게 멀리 날아가서 더 큰 힘으로 파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의료기술이 발달한 반면 그것을 이용하여 생물학적 무기를 만들게 되었고, 컴퓨터의 발달은 자라고 있는 어린 아이들을 망쳐놓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 중독되어 나쁜 것들을 접하고 많은 가정들이 파괴되기도 하며, 인터넷을 통하여 거짓을 유포하고 선한 사람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육신적으로는 주인이 되었으나 영적으로는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약하고 겸손한 자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십니다
이런 세상에서 성도들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영을 다스려야 합니다. 어떻게 다스려야 합니까? 그 답은 바로 본문 2절에 나와 있습니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이 구절은 시편 8편의 가장 핵심내용입니다. 어떻게 말 못하는 젖먹이의 입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세울수 있을까요? 어미의 젖을 먹는 아이의 입에서 찬미가 나왔다는 것은 겸손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어린아이와 젖먹이는 하늘나라의 겸손함을 보여주고 있다고 정확하게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강한 자들이 그들을 다스릴 수 없고, 젖 먹는 어린아이와 같이 약한 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렇게 약한 모습으로 죄와 죽음을 물리치셨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열정(passion)과 자부심(pride)의 노예가 돼서 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열정과 자부심으로 뭉쳐 있는 강자(强者)는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젖먹이와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찬양과 기도’라는 구절의 히브리 원어를 보면 ‘방어벽의 기초를 쌓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찬양과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대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들의 칼은 철로 만든 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검인 것입니다(시편 149:6-7).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와 나라가 위대해지고 하나님의 백성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존 칼빈은 “하나님의 백성의 신실한 기도와 찬양이 대적을 물리치는 일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전쟁터에 데리고 나오셔서 모든 악하고 교만한 자들을 물리칠 때 그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에서 ‘사람’의 히브리 원어를 보면 연약한 인간을 의미하는 ‘에노스’입니다. 즉 “연약한 이 사람이 무엇인데 주께서 우리를 생각하시며 우리가 무엇이길래 주께서 우리를 권고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이같이 연약한 인간에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셔서 지구를 다스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연극은 어떻게 끝이 날까요? 누가 이기게 될까요? 사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이미 이기셨습니다(히브리서 2:5-9).

인생의 무대에 올라갈 때 작가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연출자도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연극의 주인공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셨고,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다 사해 주셨으며, 죽음 그 자체도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사셨는데 그때는 죽을 몸이 아니라 변화된 영광체를 입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면 우리의 몸도 변화를 받는데 그 변화된 몸은 바로 천국, 하늘에서 살 수 있는 몸인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2013년 8월 11일 평강제일교회 주일 2부 예배 설교 Dr. Bruce K. Walt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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