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ㅣ SITEMAPㅣCONTACT US
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HOME > 구속사시리즈  
 
   
평안한 잠을 위한 기도
 글쓴이 : 관리자
 
브루스 월키 박사 특강

평안한 잠을 위한 기도_ 시편 4편 강해

시편 4편. 다윗의 시,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2 인생들이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셀라) 
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4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셀라)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헤쳐 나가기 힘든 역경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을 받지 못해 하나님이 안 계신 것같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런 고통과 공포는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면서 때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편 13:1-2에는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입니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리이까?”라는 탄식의 시가 나옵니다. 곤고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고백합니다(고린도후서 4:7-9). 

다윗 왕의 탄식의 이유
시편에는 탄식의 시가 많습니다. 주님을 믿으며 사는 삶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곤고는 우리의 믿음이 강하게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시편 4편은 시편의 수많은 탄식의 시 중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시입니다. 탄식하는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탄식의 시에는 대적이 누구인지, 탄식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기록돼 있는데 시편 4편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를 깊이 연구하면 탄식의 이유가 가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4:2)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궤휼’(詭譎:교묘한 속임수)은 히브리 원어상 ‘잘못된 이방신’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NIV 영어성경에는 이 구절을 “왜 이방신을 섬기는가?”라고 번역했습니다. 당시의 이방신들은 비를 내리게 한다는 신들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알입니다. 바알의 형상을 보면 오른손에는 끝이 꼬인 창을 들고 있고, 왼손에는 몽둥이를 들고 있습니다. 비틀어진 창은 번개를, 몽둥이는 천둥소리를 상징합니다. 또 6절에는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라고 돼 있습니다. 여기서 ‘선’(영어성경에는 good)은 성경 여러 구절에서 비를 표현합니다. 예레미야 5:24-25에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good)”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상징하고 있고, 시편 85:12의 “여호와께서 좋은 것(good)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4편의 탄식은 가뭄 때문만은 아닙니다. 가뭄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였습니다. 다윗의 시대에 근동에서는 왕에게 비를 내려야하는 책임이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나의 통치 기간에 수확이 넘쳤던 이유는 수확의 신에게 내가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 통치기간 중에는 아무도 배고프지 않았다.” 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이 세우신 ‘왕 중의 왕’ 다윗은 비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4:2). 여기서 ‘인생들’이란 단어는 히브리 원어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있습니다(시편 49:2, 62:9). 
다윗이 비를 내리지 못하자 함께 있던 지도자들이 다윗을 떠나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다윗은 그들을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구하는 대로 즉시 얻어지는 신앙은 이방신의 사상이라고 저는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시편을 상고해 보면 기독교인의 신앙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의 탄식은 우리 시대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님을 떠나서 다른 곳에서 구원을 찾고 있습니다. 허사를 구하고 궤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곤고한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는 어떤 진리를 붙잡고 나아가야 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고난에 처하면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잃게 됩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 이성을 잃고 감정으로만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생활비가 들어오지 않고, 건강이 나빠지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나빠지면 우리의 믿음이 추락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럴 때 당황하지 말고, 믿음을 잃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역경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다윗 왕은 이런 상황에서 네 가지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서 이 곤경을 헤쳐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이시므로 우리에게 늘 옳은 일을 행하십니다.
다윗은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4:1)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내 의’는 원어와 시편의 다른 표현들을 종합할 때 ‘다윗 자신의 의’라는 뜻이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시편 23:3에도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의(義)’라는 말에서 차갑고 딱딱한 대리석 같은 이미지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의는 하나님과 나와의 따뜻한 관계에 의해 생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에 대해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이 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인 우리에게 필요한 것, 옳은 것을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에게 왕이 될 것을 말했을 때 다윗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였고 믿었습니다. 왕이 될 것이라고 불러놓고,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잊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에게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 왕을 떠나지 못하듯이 우리에게서도 떠나지 못하십니다(데살로니가후서 2:13). 


우리의 왕이 누군지 알아야 하고, 그 왕이 끝까지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3절에서 ‘내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너희의 왕이라는 것을 너희가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다윗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기름부음은 성령이 오신 것을 상징하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모두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온 유다와 사마리아가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들으려고 모였을 때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다” 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만이 아닌 성령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고 성령도 받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역, 생명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규례를 세우겠다’고 하셨는데 그 나의 규례를 세우겠다는 것이 바로 각자 우리 자신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며 떨어야 합니다.
다윗은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4:4)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배반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두려워 떨 때 범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어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4:4)라고 합니다. 이것은 ‘너의 양심이 너에게 말을 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주석에는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면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정죄할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고 오히려 양심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삼아서 우리를 지도하게 하라. 하나님 앞에 양심이 충성된 자는 튼튼하게 세워지고 그 양심이 힘을 줄 것이나 그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충성되지 못한다면 정죄하고 피할 수 없는 파멸의 길로 이끌고 갈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스스로 양심적으로 올바른 일을 하고 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다윗이 하필 ‘자리에 누워’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낮에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무분별하고 경솔하며 위선적인 말과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오직 혼자만 남아 잠자리에 들 때는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진지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실을 말씀하시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 잠자리에 드는 시간입니다. 

이 네 가지의 진리를 깨달은 다윗은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하라”(4:5)고 말합니다. 의의 제사는 의로운 사람이 드리는 제사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제사를 말합니다. 또 우리가 의로운 자가 되어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어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4:7)라고 감사를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이 시편을 마치면서 8절에 평안의 고백을 합니다. 물론 이 때는 아직 비가 내리기 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믿음 안에서 평안히 잠을 청할 수가 있었습니다. 네 가지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고, 이제는 주님 안에 안전히 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어떤 경제적 고난이나 사회적 문제, 질병이 찾아온다 해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고 잠드시기 바랍니다. 다윗 왕과 같이 어떤 환난이 온다 해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4:8)”

2013년 8월 8일 평강제일교회 하계 대성회 강의

 
   
 




 
 
시간 순서로 재구성한 예수님의 33년 …

시간 순서로 재구성한 예수님의 33년 …

시간 순서로 재구성한 예수님의 33년 …

말씀으로 돌아본 2014년 상반기

에스겔 성전을 아시나요 Ⅱ

에스겔 성전을 아시나요

아브라함의 연대 개요

성도의 승리의 수 17

죄악의 도성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계…

다윗의 도피 장소, 성도의 피난처 17곳

족장들의 연대기로 계산해 보면 아담…

가상토론: 정국 해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