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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신약 성지 답사 ①: 선교의 땅, 터키를 가다
 글쓴이 : 관리자
 

특별기획 신약 성지 답사 ①

선교의 땅, 터키를 가다

홍봉준 목사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애 사역의 장소인 이스라엘을 흔히 ‘성지’(Holy Land)라 한다면, 오늘날 터키와 그리스, 로마까지의 땅은 ‘선교의 땅’(Mission Land)라 명명할 수 있겠다. 금번 베리트신학대학원에서 작년에 이어 2차 성지 답사를 하며, 이곳 터키-그리스-로마를 답사하는 코스로 정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이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복음의 세계적 전파가 이루어진 경로를 따라가며 그들의 헌신과 선교의 정신을 배우고자 하는 데 있다. 이는 구속사 말씀의 세계적 전파라는 사명을 받은 오늘날 우리 평강 성도들에게 매우 유익하면서도 모델이 될 만한 믿음의 선배들의 행적이기도 하다.


8월 30일(화), 오전 7:30에 인천 국제공항에 모인 27명의 일행들은 10시 20분 발 아시아나 비행기에 몸을 싣고 11시간 20분을 날아서 터키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과 비행기, 여행 등을 생각하면 누구나 가슴 설레이는 추억 등을 떠올리겠지만, 금번 성지답사를 준비하며 우리는 3차에 걸친 전도 여행과 로마로 압송되어 갔던 사도 바울과 행적과 심정을 생각할 때 설레임보다는 다소 비장한 무게감을 느끼며 출발하게 되었다.


6시간의 시차로 인해, 터키 현지시간으로 오후 4시경 도착하여 식당으로 이동, 식사 후 숙소에서 여장을 풀고 다음날부터 이어질 선교의 땅 답사를 준비하였다.




8월 31일(수),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7시에 출발하여 처음 당도한 곳은 보스포러스 해협. 이곳은 유럽과 아시아 대륙 사이에 있는 해협으로 약 1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위로는 흑해, 아래로는 에게해와 연결돼 있는 지리적 요충지다. 이곳을 통해 유럽 국가들이 아시아로 진출하고, 중국에서 시작된 ‘비단길’(silk road)을 거쳐 이곳 터키에 당도한 후,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면 유럽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약 1시간 정도 작은 전세선을 빌려 역사적인 두 대륙 사이의 해협을 살펴보고, 이스탄불의 가장 중요한 유적인 ‘블루 모스크’와 ‘성 소피아 성당’을 살펴보았다. 특히, 성 소피아 성당은 현존하는 최고의 비잔틴 건축물로서 유스티니우스 대제(527-565 재위)의 명령으로 세워졌다. 1520년 스페인 세비야 성당이 완성되기 전까지 약 천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자 그리스 정교회 창설의 중심지로 역할을 하였다. 후에 1453년 오스만 트루크 족이 이곳을 지배하고 성 소피아 성당을 본 따 지은 이슬람 사원이 블루 모스크다. 정확히는 술탄아흐메트 1세의 모스크로 불리는 ‘블루 모스크’는 내벽을 장식한 타일의 기초가 청색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609년 착공해서 17년에 완공된 모스크로, 오스만 투르크의 고전기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하지만 이스탄불에서의 답사는 이와 같이 알려진 유명한 유적보다도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고대 도시의 성벽, 즉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건축된 콘스탄티노플의 흔적들을 통해 박해받던 기독교가 공인종교가 되고, 후에 로마의 국교가 되며 약 천년 동안 이슬람의 침공을 막아주고 그리스와 러시아 등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더 마음에 들어왔다. 특히 성 소피아 성당은 초기 기독교 시절 니케아 공의회(325년), 3차 에베소 공의회(431년) 등 수많은 공의회가 개최되어 오늘날 기독교 신학의 틀을 다진 기독교의 중심지였다.


성 소피아 성당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연발하던 일행들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터키 항공을 이용하여 성경에서 ‘갑바도기아’로 기록된 지역의 도시 ‘카이세리’로 이동하였다. 이곳 갑바도기아는 특이한 지형만큼이나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사도 베드로가 편지를 보내 돌본 목회지역 중 하나이며(벧전 1:1-2), 로마의 박해를 피해 수많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동굴을 파고 은둔 생활을 하며 신앙을 지키고, 교회와 수도원을 건립하여 공동체 생활을 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9월 1일(목), 새벽 4시에 기상해서, 갑바도기아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열기구’를 타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바람에 예민한 열기구라 새벽에 나섰다가도 뜨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날은 다행히 기상조건이 양호하여 모든 일행이 열기구에 탑승, 갑바도기아 지역을 상공에서 살펴볼 수 있는 특별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약 1시간 정도의 열기구 탑승 후,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 ‘파샤바(Pasabag) 계곡’과 ‘괴뢰메 (G?reme) 수도원’, 그리고 고대의 지하도시라 할 수 있는 데린구유(Derinkuyu)’를 답사하였다. 파샤바 계곡은 버섯 모양의 바위와 기암괴석들이 1천만 년 전에 일어났던 화산폭발과 지진, 비바람에 의해 만들어진 신의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종교의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밀려와 바위에 굴을 파서 생활 공간을 만들고 교회를 만들어 생활했다. 이곳에는 주거지 외에 교회와 지성소, 사원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특히 파샤바 계곡 근처에 형성된 ‘괴뢰메 수도원’은 사막 교부로 알려진 성 바질에 의해 건립된 곳으로, 당시 신도들이 마을을 형성하여 집단으로 거주하고 약 1천여 개 이상의 바위 교회를 만들어 생활하였다. 지역적으로 365개의 수도원 연합체로, 수도사들이 1일 1수도원씩 방문하여 1년간 순회하며 수련을 쌓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 갑바도기아 지역은 지형적으로 모래가 굳어 형성된 ‘사암’ 지역으로, 작은 정 등을 이용해 손으로 쉽게 굴을 팔 수 있는 지형이라 이와같은 동굴 교회가 형성될 수 있었다. 특히 ‘데린구유’는 ‘깊은 우물’이라는 뜻으로, 2-3만 명이 거주할 수 있는 초대형 지하 도시라 할 수 있다. 현재까지 발굴된 것은 약 지하 8층 정도의 깊이로, 이곳에는 수많은 방과 식당, 교회, 학교뿐만 아니라 짐승들을 키우는 축사까지 발견되었다. 데린구유의 최초 터널과 동굴들은 약 4천년 전이나 그 이전에 처음 파여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기원전 700년경부터 자리를 잡아 혹독한 날씨와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점점 지하로 파들어가 생활하다, 후에는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규모 면에서 보면 로마의 카타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방대하며, 이 지역 외에도 주변의 수많은 지하 도시들과 연결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러한 유적지의 답사를 통해 믿음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과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며, 후대에 전수해 준 결과 오늘날 복음의 세계적 전파가 이루어진 것이다. 데린구유를 뒤로 하고 일행들은 버스를 타고 성경 지명으로 ‘이고니온’이라 불리는 ‘콘야’(Konya)시로 이동하여 여장을 풀었다. 이고니온은 사도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중에 말씀을 전파하여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사람들을 믿게 한 곳이다(행 13:51-14:7).




9월 2일(금),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다시 사도 바울의 복음 전도 사역의 중심인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그리고 에베소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두 시간 반 정도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먼저 당도한 곳은 비시디아 안디옥 지역의 ‘파묵칼레’(Pamukkale)였다. 이곳 근처에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인 에바브라의 복음 전도지 ‘골로새’, ‘라오디게아’ 등의 도시가 있다. 골로새는 현재 발굴 작업이 진행되지 않아 푯말과 도시 터만 남아 있었다. 간단히 사진촬영만 하고, 주님께 차지도 덥지도 않다고 책망받았던 라오디게아로 출발하였다(계 3:14-22). 셀류쿠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2세에 의해 건설된 이 도시는, 자신의 부인의 이름을 따서 라오디게아라고 하였다. 이곳은 골로새와 16km, 뜨거운 석회 온천이 흐르는 파묵칼레(히에라볼리스)는 약 9km 떨어진 곳이다. 특히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골 4:13)을 언급한 바 있다. 라오디게아는 에베소에서 수리아(오늘날 터키 남동쪽에 위치한 안타키아)까지 연결되는 대로상에 위치해 있어서 기원전 133년 이후부터 교통의 중심지이자 상업도시로서 큰 번영을 누렸던 곳이다. 지형적으로는 맞은편 언덕인 히에라볼리스에서 뜨거운 유황 온천물이 약 9km 떨어진 이곳에 도착하면 식어져 미지근하였는데, 그곳 교인들의 신앙이 미지근한 물과 같아서 책망받았던 교회이기도 하다. 버스로 15분 정도 이동하여 히에라볼리스 언덕에 있는 원형극장 라오디게아 교회 터 등을 둘러보고 잠시 노천 온천을 체험한 후 숙소로 돌아왔다.



9월 3일(토), 드디어 소아시아 지역에 당도하였다. 사도 요한 기념교회가 있었고,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의 말씀을 지켰던 빌라델비아 교회(계 3:7-13) 터, 그리고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와 같다는 책망을 받은 사데 교회(계 3:1-6)의 씁쓸한 터전, 이어서 고대 로마의 5대 도시 중 하나였던 ‘에베소’를 방문하였다. 먼저 당도한 곳은 아야술룩(Ayasuluk) 언덕에 세워진 에베소 도시 터와 사도 요한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이곳 에베소 교회는 사도바울이 64년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한 후, 디모데가 맡아서 목회하다가 ‘5월 아데미 축제’ 때 군중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다 돌에 맞아 순교하자 에베소에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모시고 와 있던 사도 요한이 디모데를 이어서 목회를 한 곳이다. 사도 요한도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로마 군인들에게 연행되어 밧모섬에 유배되었다가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측근에 의해 암살당한 후 밧모섬 유배에서 풀려나 에베소에 돌아와 ‘요한복음’을 기록하고 AD 100년경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에 요한의 시신은 아야술룩 언덕 위에 묻히고 4세기 경에 무덤이 있던 자리에 작은 요한 기념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이어서 오늘날 ‘셀축’(Selcuk)으로 불리는 소아시아의 수도, 에베소 시가지를 방문했다. 지금은 약 3만 명 정도가 사는 소도시이지만, 로마 통치 시기에는 아시아 주의 수도로 번창하여 기원전 2~6세기경에 인구 20-30만 명이 사는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에베소 지역이 중요한 것은 사도바울의 선교에서 큰 족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2차 전도 여행 때 에베소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과 변론을 하였으며(행 18:19), 3차 전도 여행 때는 2년 동안이나 거하며 말씀을 전파한 곳이다(행 19:1-10). 이곳 고대 에베소 도시는 아데미 여신상이나 신전의 모형을 만들어 팔아온 은 세공인들이 조합을 형성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큰 이익을 얻었으며, 각종 미신종교의 영향으로 주술과 마술이 유행하여 파피루스에 기록한 부적을 파는 사업이 번창했던 도시였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2년 동안 말씀을 증거하자 은혜받은 마술사들이 당시 오만 드라크마나 되는 엄청난 양의 파피루스 두루마리 책을 불태웠으며(행 19:19),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업이 어려워지자 은장색 더메드리오가 경건과 애국심을 가장해 소요를 일으키고 폭도들을 시켜 바울을 잡아 죽이려 한 곳이었다(행 19:17-41). 사도바울 자신은 스스로 “맹수와 싸웠다”(고전 15:32), “힘에 지날 정도로 심한 고난을 받아 살 소망이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후 1:8-9)고 표현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자기를 의뢰하지 않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고후 1:9)만을 의지하며 말씀을 전파한 결과 에베소는 근방에 위치한 골로새와 히에라볼리뿐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 중 나머지 여섯 교회로 복음이 퍼져나가는 중심 거점교 회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에베소 교회는 극심한 박해와 이단 사상과의 싸움에서 하나님에 대한 첫사랑을 잃어버린 교회가 되었다(계 2:1-7). 그 결과 에베소 교회는 지진과 말리리아 병, 그리고 투르크인들의 칼날에 스러져 가는 가운데 교회의 촛대가 옮겨져, 지금은 그 흔적만이 당시 아픔을 간직한 채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의 성취를 증거해 주고 있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로서 이러한 에베소 교회를 향해 일평생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만을 전한 것이다(요일 4:7-8).


9월 4일(주일), 오전 6시에 식당 옆의 세미나실에 모여 감동적인 주일 예배를 드리고 7시 30분에 ‘쿠사다시’(Kusadasi) 항에서 ‘사모’(Samos)섬행 배에 승선하였다. 원래 답사 일정에 있었던 두아디라, 버가모, 서머나 교회 지역은 밧모섬을 운항하는 배가 고장이 나서 불가피하게 취소하고,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시 밀레도에 가기 전에 들렀던 ‘사모’ 섬(행 20:15)으로 가서 점심식사를 하고, 그곳에서 다시 정기 여객선을 타고 ‘밧모섬’으로 이동하였다. 터키에서의 여행은 육지를 떠나면서 작별을 고하고, 사모섬과 밧모섬 등은 그리스 영토로서, 이제 사도 요한이 기도하는 가운데 계시를 받은 응답의 섬, 밧모를 향해 3시간이 넘는 뱃길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비행기와 버스, 뱃길을 이용하여 다니면서도 장거리 여행에 피곤하고 지친 심신을 돌아보며, 2천년 전 당시 사도 바울의 열정과 선교적 헌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 로마 답사기는 다음 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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