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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생 황봉주 집사의 6.25 전쟁
 글쓴이 : 관리자
 

6·25 전쟁 67주년 기획취재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신 32:7)”

 

1931년생 황봉주 집사의 6·25

“부모 생각 때문에 다시 올라오지 말거라”

 


“황해도에서 태어났어. 교회를 다녔는데 어머니가 신앙심이 깊으셨지. 당시 목회자가 많지 않아 권사 직분이셨던 어머니께서 단에서 설교까지 하실 정도였거든. 큰형님도 찬양 반주를 하셨고 하나님 안에서 단란한 가정이었지. 초등학교 때 전교 2등만 해도 옷을 벗겨 내쫓을 정도로 공부시키셨는데, 막상 중학교에 입학시키지 않으셨어. 상급학교에 가면 공산주의 교육이나 시킨다고 해서. 6남매 귀한 막내아들로 그렇게 자라다 18세 되던 해 6·25가 터졌는데 어머니는 내가 인민군으로 끌려갈까 봐 산에 숨기고 밥도 날라주고 하셨어. 그러다 누군가 신고를 해서 파출소로 끌려갔지. 그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철로에 누워서 “나 죽이고 우리 아들 데려가라” 하셨는데 그게 통하나. 그 와중에 어머니가 쪽지를 한 장 주셨어. 마태복음 11장 28절이었어. “힘들 때마다 이 말씀 새기라고. 널 위해 기도할 테니 걱정 말라”고. 나는 군용열차에 몸을 싣고 떠나고 저만치 버선발로 울면서 뒤따라 오시는 어머니를 봤는데 지나고 보니 그게 마지막이었던거지. 산에 숨어 있을 때 어머니는 항상 “너 남한 내려가면 부모 생각해서 절대 다시 이북으로 올라오지 말고 거기 살아라. 이북은 공산국가이니 미래가 없다”고 하셨어.



그렇게 인민군 생활을 15일 했어. 전방 전투에는 참가 안하고 후방에서 전방으로 그때그때 병력이 필요할 때마다 계속 끌려 다녔어. 동국대나 신촌 이대에 인민군으로 주둔하고 있었는데 포탄 파편 조각이 허벅지에 박혔어. 급히 지혈은 했는데 부상자들이 많으니 내 차례가 언제 올지 몰라. 너무 아파서 이거 치료 언제해 줄거냐고 했더니 미군 간호사가 내 다리에 펜으로 딱 긋더니 이만큼 잘라내야 한다는 거야. 영어로 소통이 안되니까 내 목을 가리키며 차라리 내 목을 자르시오 했지. 흉터는 크지만 절단을 안했으니 감사하지. 그때 허벅지에 박혔던 파편조각을 내내 주머니 속에 넣고 다녔는데 잃어 버렸어. 아쉬워.

 

그 후 인천상륙작전으로 미군이 서울을 재탈환 하고 피난민들이 미아리에서 이동할 때 민간인들 틈에 끼어서 피난을 가고 있는데 어떤 청년이 다가오더니 “세브란스 의사이고 아버지가 목사님인데 교회 다닌 적 있느냐”고 물어보는 거야. 크리스천 집안이라고 얘기해 주고 주기도문하고 사도신경을 외웠지. 얼마 후 피난민 대열에 인민군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고 검열을 하는데 그 청년이 “이 사람은 내가 책임질 테니 데려가지 말라”고 나를 보호해 준거야. 얼마나 고맙던지. 그 후 UN군이 나 보고 “이 사람은 전쟁에 참여한 사람이니까 거제도 수용소에 가야 한다”고 해서 거기서 2년 살았어.

 

전쟁도 끔찍했지만 나는 이 수용소 시절이 악몽 같아. 그 안에서도 좌우 대립이 심해서 끼리끼리 지냈지. 빨갱이들은 그 안에서도 날 뛰고. 하루도 숙면을 취한 적이 없을 정도로 밤에도 살벌했어. 아침에 일어나면 멀쩡했던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걸 보고 자는 척하다 자리를 몰래 이동하고 그랬어. 아침에 보면 내가 원래 누웠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죽어있었는데, 그러면 시체를 토막내서 큰 드럼통에 시체를 넣어서 메고 강에다 내다 버려. 의기양양하게 사람을 죽이고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더라고. 아침마다 사람들이 나보고 ‘저 놈 아직 살아있네?’ 이랬지. 매일 밤 잠자리 이동을 하고 조마조마했던 순간들은 지금도 안 잊혀져. 얼마 지나고 그 안에서 나는 동원부장이라고 간부급 일을 맡았었는데 바깥에 나가서 하는 작업이 차라리 자유스럽고 좋았어. 얼마 후 한국군하고 포로 맞교환 할 때 파가 갈라졌어. 포로도 주민등록증 같은 서류가 있거든. 북한으로 갈 사람은 ‘G’ 라고 써 있었지. 남을 사람은 남고, 또 미국 등 외국으로 가는 것을 희망하는 사람들도 많았어. 그렇게 갈라진 다음에는 차라리 마음이 편했지. 잠이라도 숙면을 취할 수 있으니까. 그 당시 이북에서 같은 동네에 있던 친구도 수용소에 있다가 포로교환 때 자기는 이북으로 간다고 했어. 안 그래도 우리 가족은 기독교 가정으로 찍혔었는데 그 사람이 북한 가서 다 말했을 거야. 봉주는 안 넘어왔다고. 이북에 남아 있는 우리 가족들한테 피해가 갔겠지. 지금은 생사도 몰라.

 

지금 생각해 보면 전쟁터에서 살아난 것도, 매일 밤 생사를 오갔던 수용소에서 목숨을 살려주신 것도, 또 혈혈단신 ‘삼팔 따라지’인 나한테 좋은 아내를 만나게 해 준 것도 모든 게 하나님의 간섭하신 결과인 것 같아. 이를테면 나를 향한 구속 섭리 그치?  4남매와 사위 손주 며느리가 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거 보면 사실 난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했지만 우리 어머니의 기도의 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항상 생각해.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열매가 되어 돌아온다는 말씀을 나는 믿거든”

 


작은 아들 황운서 집사:

“새벽 시간이 되면 거실에서 부모님의 예배드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음정 박자 틀려도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자녀들한테 용돈을 받아 쓰시면서도 교회 헌금부터 교구 회비 등 물질적인 섬김에는 아낌없이 하셨다고 당시 교구장님도 인정하십니다. 아버님은 요즘 거동이 불편하시지만 인터넷 생중계로 주중예배까지 빠지지 않고 드립니다.”


 


부인 임춘화 권사 :

“말씀 안에서 바르게 살다가 주 안에서 승리하게. 애들 기도는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고. 자녀들 주밖에만 벗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주시는 축복받아 누리면서 남은 인생, 구속사에 필요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문득 지난주 월례회때 들었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 가장 행복한 자’ 는 하나님께서 건져주시는 자(시 32:1,2, 시 73:28),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자 (시 91:15, 잠 16:20),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자(시 91:16, 17:15, 81:16)이며 찬양은 살아 있는 자의 특권(사 38:18, 시 115:17)이라고.

 

글_ 권오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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