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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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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척량했는가-불순종의 결과 자기 자식을 삶아 먹는 반인륜적 참상
 글쓴이 : 관리자
 

에스겔 43:10-12, 신명기 28:53-57



에스겔 성전에 들어가야 살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주소가 없는 성전’으로 불리는 에스겔 성전은 담의 사방 길이가 각 500척 (500 cubits=266m)입니다. 그 외곽에는 다시 사방 길이가 500장대(500rods=1596m)씩의 담이 둘려 있습니다(에스겔 42:15-20). 외곽의 담은 안쪽 담보다 길이가 6배, 둘러싼 면적의 크기는 36배입니다. 우리는 이 담을 반드시 통과해서 에스겔 성전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예수님 믿고 천국 가면 그만이지 그렇게 복잡한 에스겔 성전을 왜 배워야 합니까?” 많은 신학자들도 에스겔 선지자의 말과 행동이 이해하기 어렵고, 그가 계시로 받은 성전은 구조가 복잡하다는 이유로 에스겔서를 외면합니다.

예수님을 알아야 에스겔 성전에 들어갑니다
성경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면 예수님을 알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골로새서 2:2-3). 하나님은 당신의 비밀을 감싼 뒤 아무나 열지 못하도록 도장을 찍으셨습니다. 그 인봉(印封)을 뗄 자가 없는 것을 보고 사도 요한이 슬피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한 사람이 나타났으니 바로 예수님입니다(요한계시록 5:1-5). 그래서 신구약 성경66권은 모두 예수님 한 분만을 소개합니다(요한복음 5:39, 누가복음 24:44-45).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요한복음 14:6, 10:7).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님은 다시 말하면 ‘말씀’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1). 창조도, 진행도, 결과도 모두 ‘말씀’인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8, 로마서 11:36). 우리는 모든 일의 원인이요 결과인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야만 에스겔 성전에 들어갈 자격을 얻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자 그룹(cherubim) 천사와 불칼이 에덴동산을 지켜서 그들이 들어가 생명나무를 따먹고 영생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그 장벽을 폐지한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생명나무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시는 가정은 참으로 복된 가정입니다. 집안에 통장 하나 없어도 성경만 모시고 있으면 그 집은 성령이 책임지십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가난한 집에서 나고 초등학교 중퇴 학력밖에 없지만 어머니를 통해서 성경을 배웠기 때문에 큰 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지 여부가 의인과 악인을 갈라냅니다
하나님의 도(道)는 정직합니다(호세아 14:9, 예레미야 9:11, 23:18, 시편 107:43, 다니엘 12:10). 그래서 의인과 악인을 정확하게 갈라냅니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도에 거쳐 넘어지리라.”(호세아 14:9)고 하셨습니다. 다니엘서 12장 10절에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단련을 받아 깨끗해져서 빛날 것이다. 악한 사람들은 끝내 눈이 열리지 않아 악한 짓을 계속 하겠지만 슬기로운 지도자들은 눈이 열려 환하게 알 것이다.”(공동번역)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보내신 나를 알아봤을텐데 목수의 아들, 가난한 동네에서 났다는 이유로 나를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요한복음 8:47).

속된 것은 들어갈 수 없는 에스겔 성전
에스겔 성전을 기록한 에스겔서 40-48장은 신구약 성경의 총론이자 결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에스겔 성전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머리로만 믿었고 생활과 행동에서는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에스겔 성전은 지극히 거룩한 곳이므로 그런 모습으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에덴 동산은 그룹 천사와 불칼이 지켰지만 에스겔 성전은 담이 지킵니다. 이 담이 사기꾼, 도둑, 건성으로 믿는 자들을 다 걸러내고 내칩니다.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갈라냅니다(에스겔 42-43장). 담의 두께가 대략 3.2미터(한 장대)입니다. 살아 있는 담입니다. ‘담이 살아 있다’고 하니 갸우뚱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하박국 2:11).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9:40). 우리가 산과 들에서 죄를 지으면 하늘이 보고, 땅이 보고, 나무와 풀들도 보고 있다가 하나님께 그 사실을 아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예레미야 2장). 에스겔 성전에는 활활 타는 불 성곽(城郭), 불 담이 빙빙 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들어갈 사람을 가려내 ‘너는 자격이 있다’고 하며 들여보내 줍니다. 들어간 사람은 끝까지 보호해 줍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스가랴 2:5) 그래서 성도에게는 권총 찬 경호원도 필요 없습니다. 24시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이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성전에 들어갈 조건
에스겔 성전은 실제로 이 땅에서 지어진 적은 없지만 분명히 실재(實在)하는 성전입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성전의 동서남북 방향을 다 세밀하게 지시하시고 치수도 일일이 알려주셨습니다. 1, 2, 3층이 있다는 사실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바울이 천국에 1, 2, 3층이 있는 것을 직접 보고 온 것과 일맥상통합니다(고린도후서 12:3). 그곳은 밤도 없고 잠자는 것도 없으며 피곤한 것도 없는 세계입니다. 예수님이 태양의 30배나 되는 빛이 되시니 해와 달이 필요 없고, 해와 달이 우리를 상하게 하지 못하는 곳입니다(요한계시록 7장).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아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말씀을 자신과 무관히 여기는 사람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성전은 민족의 자랑거리로 여기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안다고 하나 말씀 따로, 나 따로였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머무르던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떠난 것입니다(에스겔 8:6, 10:18-19, 11:22-23). 결국 나라는 망하고 성전은 파괴됐으며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그들이 패역을 회개하고 부끄러워하면 다시 성전의 비전(vision)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에스겔 40장- 43:1-5). 새로운 성전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새로운 예배의 역사가 다시 시작됩니다. 이 말씀이 기록된 에스겔 44장부터 48장까지를 읽으면 절로 가슴이 벅찹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면 눈물이 나고 자신도 모르게 흥에 겨워집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실제로 눈에 보이는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하기는 했지만 에스겔 성전과는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에스겔 성전은 생수가 흘러나오는 성전입니다. 그 물이 강을이루고 가는 곳마다 죽은 것이 다 펄떡펄떡 살아납니다. 그 물로 말미암아 강가의 나무들이 정월부터 12월까지 달마다 다른 과실을 맺습니다. 그 생수를 마시면 늙지도 않습니다(에스겔 47:9). 신약 성경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된 곳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입니다. 새 예루살렘에 대한 기록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5절에는 금 갈대로 새 예루살렘의 성과 문들과 성곽을 척량(尺量)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금’은 사시사철 변함이 없는 것을 상징합니다.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2,220km)이요 장(長, 길이)과 광(廣, 너비)과 고(高, 높이)가 같더라.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 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요한계시록 21:15-17). 새 예루살렘 성과 마찬가지로 에스겔 성전도 사면이 똑같아 네모반듯합니다. 척량의 치수가 매우 정확합니다. 에스겔 성전 척량에 사용된 단위는 이전의 성전과 성막 역사에서 들어보지 못한 독특한 것들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에스겔 성전이 얼마나 단호한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성전을 보려면 채워야 하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성전을 설명해 주어라. 이스라엘이 제 스스로 얼마나 부끄러운 죄를 지었는지 알게 되거든 성전의 모양을 도면에 그려 설명해 주어라.”(에스겔 43:11 공동번역)

회개하지 않을 때 찾아오는 결과
모세는 에스겔 선지자의 시대보다 800여 년 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결과를 예언하고 있습니다(신명기 28:53-37, 레위기 26:28-29).
“네가 대적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히 쳐서 곤란케 함을 당하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자녀 곧 네 몸의 소생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 너희 중에 유순하고 연약한 남자라도 그 형제와 그 품의 아내와 그 남은 자녀를 질시(嫉視)하여 자기의 먹는 그 자녀의 고기를 그 중 누구에게든지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 대적이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맹렬히 너를 쳐서 곤란케 하므로 아무 것도 그에게 남음이 없는 연고일 것이며 또 너희 중에 유순하고 연약한 부녀, 곧 유순하고 연약하여 그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 보지도 아니하던 자라도 그 품의 남편과 그 자녀를 질시하여 그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의 낳은 어린 자식을 가만히 먹으리니 이는 네 대적이 네 생명을 에워싸고 맹렬히 쳐서 곤란케 하므로 아무 것도 얻지 못함이리라.” (신명기 28:53-57)
끔찍한 기록입니다. 인간이 자기 몸으로 낳은 자식, 안아서 젖먹이고 팔에 누이고 무릎에 앉히며 애지중지 기른 자식을 어떻게 잡아먹는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이 참혹한 비극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대로 성취되고 말았습니다. 첫 번째는 북(北) 이스라엘 제9대 왕인 여호람 왕 때입니다. BC 851년부터 841년까지 아람 군대가 수도 사마리아 성을 포위해 성중에 양식이 끊기자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었습니다(열왕기하 6:29). 두 번째는 BC 588-586년, 남(南) 유다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예루살렘 성이 30개월 동안 포위됐을 때입니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부모들이 아들딸을 잡아먹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와 에스겔 선지자도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보고 예언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담아 듣지 않았고 그로부터 몇 년 만에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에스겔 5:10, 예레미야 19:9, 예레미야애가 2:20, 4:10). 세 번째는 AD 70년 로마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켜 110만 명이 목숨을 잃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누가복음 19:44) 하시며 우시던 그 일이 실현되고 만 것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가 기록한 유대전쟁사 6장에는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는 참상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누가복음 13:34) 하신 예수님의 탄식을 외면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인간의 실상
이런 비극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믿지 못한 불순종이 초래한 일입니다. “그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의 낳은 어린 자식을 가만히 먹으리니”(신명기 28:57)에서 ‘가만히’는 히브리어로 ‘비밀리에, 은밀하게’라는 뜻입니다. 자식을 삶은 뒤 동네에서 알고 와서 빼앗아 먹을까봐 몰래 먹었다는 것입니다. 또, ‘남편과 그 자녀를 질시(嫉視)하여 가만히 먹으리니’(28:56), 즉 부부가 같이 먹다가 남편이 많이 먹으니 아내가 눈을 흘겼다는 것입니다. 깊은 애정과 희생으로 키우던 자녀인데 굶주리니 식량으로 보인 것입니다. “처녀 내 백성의 멸망할 때에 자비한 부녀가 손으로 자기 자녀를 삶아 식물(食物)을 삼았도다.”(예레미야애가 4:10). 참으로 무서운 기록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잃어버리고 자녀를 삶아먹고 친구와 이웃을 잡아먹는 무자비한 만행을 나라 전체가 저지른 것입니다(이사야 9:20). “그리한즉 너의 중에서 아비가 아들을 먹고 아들이 그 아비를 먹으리라”(에스겔 5:10).
여기서 ‘아비’와 ‘아들’은 히브리어로 복수형입니다. 이렇게 처참한 일이 예루살렘에서 무성하게 자행됐다는 뜻입니다. ‘먹다’는 히브리 원어로 잔인하고 흉포한 대적이 날카롭게 상대를 본다는 뜻 입니다. 폭군이 백성을 억압하고 재물을 강취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시편 27:2, 하박국 3:14).



먹어야 할 것을 먹지 않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먹었어야 하는데 머리로만 알았습니다. 성경을 원수처럼 여기는지 읽지도 않았습니다. ‘먹어야 할 것’을 먹지 않은 것입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모습은 점차 파괴되고, 극한의 상황에 이르자 육신의 욕구에 자기를 내어 맡기고 자식의 고기까지 먹게 된 짐승 같은 모습만 남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삶에, 그들의 사회에는 하나님의 말씀 대신 우상과 탐욕, 음란과 정욕이 가득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마음이 악했습니다. 선하고 의로운 자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공허함과 굶주림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채울 수 있는데 하나님은 마다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음란과 욕심에 불타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말세에도 무서운 환난이 예정돼 있습니다(마태복음 24장, 마가복음 13장, 누가복음 17, 21장). 그 뒤에야 비로소 에스겔 성전이 열립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은 말세 성도의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최고의 영적 권한을 가졌던 제사장과 선지자들,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는 그들조차도 겉으로만 제사를 드렸을 뿐, 성전 안에서까지 미움이 가득했습니다. 그 죄악이 결국 반인륜적 참상을 낳고 말았습니다(예레미야애가 2:20). 미움은 살인죄입니다.
교회는 공의와 평강과 기쁨이 가득해야 합니다. 마음 뜨겁게 하나님의 말씀에 감사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어디에 가든 성경 한 권은 가져가서 틈나는 대로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이 우리를 지켜줍니다.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살 때 하나님의 영광의 영이 우리 머리 위에 머무릅니다(베드로전서 4:14).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편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담으로, 불 성곽으로 둘러 지켜주십니다(시편 125:1-4, 스가랴 2:5). 한 번만 두르시는 게 아니라 에스겔 성전을 담으로 두르시듯 ‘두르고 둘러서(히브리어로 사비브 사비브)’ 지켜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주일예배, 수요예배, 목요예배, 구역예배, 가정예배까지 빠짐없이 드리십시오. 그래서 집안을 말씀으로 채우십시오. 주위 성도들이 예배 때 왜 못 나오는지 살피고 기도해 주십시오.
저는 성도들을 위해 잠자지 않고 이름을 부르면서 손들고 기도합니다. 평강제일교회 모든 성도가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비밀과 영광이 되신 예수님, 모든 일의 시작과 진행과 끝이 되시는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그 나라까지 입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3년 2월 24일 주일 2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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