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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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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되어가는 하늘 생명의 족보
 글쓴이 : 관리자
 

창세기 6:8-9 

성경에 기록돼 있는 족보들은 가장 위대한 구속사(救贖史)입니다. 하나님은 족보 없이는 통치하지 않으십니다. 족보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족보는 하나님의 눈물의 기록입니다.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펼치신 향기로운 은혜가 가득 찬 말씀이며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만큼 하나님의 은혜와 예정과 섭리를 잘 보여주는 것은 없습니다. 수천 년의 시간,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로운 자비와 긍휼이 그 안에 펼쳐져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신실함이 없습니다. 열심도 없습니다. 피곤하면 포기하고 마는 게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족보 속에는 족보를 끝까지 이어가기 위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열심, 그리고 성실이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 현장을 보여주는 그림이 족보입니다.

성경의 족보는 구원의 위대한 파노라마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구약 성경의 개요이고 구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열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한눈에 보여줍니다. 신론(神論)과 기독론의 요약입니다.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생한 역사이고, 구원의 위대한 파노라마, 복음의 압축파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좌절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신실하고, 하나님의 인내는 말할 수 없이 크심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족보는 우리의 소망이고 기쁨이고 승리이고 고정관념을 깨는 하늘나라의 비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족보에 대해 새로운 영적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족보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계획을 펼치는 수단입니다. 인물들 자체가 신앙의 목표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을 소설이나 위인전 주인공처럼 생각하는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인격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족보의 인물들을 어떤 관점으로 볼 것인가

족보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정직, 그리고 성실과 의지에 근거해 있습니다. 그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성경은 과감하게 인간의 실패와 절망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문의 수치와 죄악을 족보에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두를 낱낱이 족보에 폭로하고 있습니다. 적나라한 인간 고발장입니다.
성경의 족보에 나오는 인물들 모두 그 삶의 면모를 더듬어 보면 부끄러운 일이 많습니다. 유다는 며느리 다말과 관계해 아들을 낳았습니다. 롯은 친딸들과 관계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기생 라합도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실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삶은 더듬어 보면 모두 부끄러운 것뿐이며 그것이 곧 우리의 모습입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와 절망을 통해 복음의 필요성을 깨우치시고, 그런 인간들을 구원하는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끝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해가면서 그 계획을 성취하셨습니다(로마서 5:8). 죄를 알지도 못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억조창생 인간의 죄를 모두 거둬서 떠넘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는 새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족보의 인물들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시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시각, 즉 복음의 은혜의 눈으로 사람들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망의 족보를 끝내고 생명의 족보로

복음의 문을 여는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구약 성경을 믿었던 인물들이 그 족보에 나열돼 있습니다. 그러나 완성은 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3장의 예수님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부터 시작해 윗대로 거슬러 올라옵니다. 가장 위에 있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족보입니다. 누가가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면서 아담 위에 하나님을 기록한 것은 구원의 의미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야말로 모든 생명 족보의 시작입니다. 성자(聖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하나가 됨으로써 그 족보를 완성하십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나와 하나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감히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우리를 붙잡으시고 죄악으로 가득 찬 우리를 당신 속에 다 집어넣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 안에 인류가 다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입니다(로마서 6:4-23). 우리와 하나 되셔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신앙의 최고 경지로 끌어올리신 것입니다.
결국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는 성자 예수님의 오심을 약속하는 구속 진리의 보고요, 성부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 구원 족보의 시작이고 완성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사망 족보를 끝내고 예수님의 생명 족보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과 사망의 뿌리요 근거임을 깨우치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족보에 쓰시고 도장 찍으시는 주님

족보의 성취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담의 죄와 사망의 족보, 땅의 족보를 끝내고 이제는 의와 거룩한 생명의 족보인 하늘의 족보를 쓰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이름을 하늘 족보에 다 올려놓고 계십니다(빌립보서 4:1-3). 가슴이 뭉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이름을 당신의 십자가 피로 쓰시고 성령의 도장을 딱 찍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록된 이름들은 요지부동입니다. 은혜를 도저히 다 갚을 길이 없습니다.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 즉 하늘 족보에 기록된 사람은 다 예수를 믿게 돼 있습니다(사도행전 13:48).
성도 여러분, 하늘의 족보가 완성되는 날 우리 모두는 주님의 얼굴을 볼 것입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선명한 십자가 보혈로 하늘의 족보를 기록하시고 성령의 도장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일일이 다 찍으신 것입니다. 도매금으로 한꺼번에 찍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족보는 장엄한 구속사의 발자취요, 영광입니다. 족보에 나오는 인물들이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하늘 족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부디 성도 여러분 모두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족보에 이름이 기록되시기를 바랍니다(요한계시록 20:15).
성도는 족보에 담긴 복음의 비밀을 캐내는 영적 광부들입니다. 그 비밀의 지식과 감격을 가슴에 새기는 신령한 조각자가 돼서 복음의 파노라마가 주는 사랑과 감동과 소망을 맛보십시오. 죄짓기 전 하나님의 아들딸 되었던 그 형상으로 다시 지음을 받는 기쁨입니다. 아담 이래 태어난 모든 인간은 다 죽음 아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죽었다’는 말을 쓰지 않고 ‘누가 누구를 낳고’ 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죽음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명은 죽음을 삼키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죽음에 굴복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대속(代贖)의 사건입니다. 죽음을 초래하는 죄를 제거해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요한일서 3:8, 히브리서 2:14-15). 복음은 만족함, 기쁨, 즐거움입니다. 괴로움과 절망, 아픔이 없습니다. 근심이 없습니다. 삶에 향기가 납니다. 죄와 사망을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생명 족보에 기록된 노아

이런 관점에서 아담의 10대손 노아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찾은 의인입니다.
당대에 완전한 자입니다. 하나님과 걸음을 같이 했습니다. 순간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 받을 때는 ‘아멘’ 하지만 교회 밖에 나가면 은혜를 다 놓치며 삽니다. 노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노아의 아버지 라멕이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노아(안식,안위)’라고 지었습니다. 당세의 모든 사람들이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의지할 데가 없었습니다. 라멕은 아들 노아로 말미암아 나라와 민족들이 편안해지기를 간구하는 마음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노아가 홍수 심판에서 구원 받은 것을 보면 그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크고 감동적으로 경험한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가 죄와 저주의 심판에서 구원받는 것에 대한 예표(豫表)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 쇠톱, 전기톱이 있었겠습니까. 돌로 아름드리 나무를 잘랐습니다. 수천, 수만 번 가지를 쳐냈을 것입니다. 손이 다 찢어지고 터졌을 것입니다. 방주 짓는 사이사이에는 땅을 개간해야 했습니다. 돌을 고르고 잡초를 뽑으며 농사를 지었습니다. 방주에 태울 짐승들이 1년간 먹을 양식을 저축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눈코 뜰 새가 없었습니다. 노아의 아들 셋이 모두 방주 짓는 기간 동안 자녀도 갖지 못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었대.” 하고 쉽게 말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방주에 들어간 뒤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많은 짐승들에게 양식을 나눠주고 물을 먹이고 배설물을 치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에너지가 돼서 70-80년 방주 짓는 기간 동안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노아 홍수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노아의 시대는 음란과 강포(强暴), 사기, 죄악이 철철 넘치던 때였습니다(창세기 6장).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눈이 맞아 음란의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와 안 믿는 자가 구별되지 않고 죄악으로 하나가 됐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 세상의 풍요는 신앙의 거룩함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거룩함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높은 경지는 초연하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과 방향을 따라 삶을 사는 것입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네가 뭔데 독불장군처럼 혼자 그렇게 사느냐”는 비아냥과 조롱을 듣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가시밭길을 각오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은 오래 참고’ 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오래 참음’, 이 말은 영어성경에는 ‘긴 고통’, ‘아픔의 연속’으로 표현돼 있습니다. 웬만한 사람은 견디기 힘든 삶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는 인간이 육체의 타락으로 본성을 따라 살던 때였습니다. 남녀 관계도 짐승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순리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눈뜨고 보기 힘든 시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참다못해 다 쓸어버리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무서운 심판의 선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재인데 짐승만도 못한 존재가 돼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창세기 3:15)의 족보를 잇기 위해 노아를 택하신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창세기 6:8)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을 히브리 원어 성경에는 ‘노아는 하나님의 눈들 앞에서 은혜를 찾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눈은 두 개지만 하나님의 눈은 말할 수 없이 많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인간 구원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신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에게 은혜를 입히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노아 홍수의 핵심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심판을 자초한 인간들을 완전히 멸하지 않고 노아의 가정을 구원하심으로써, 인간을 향한 은혜를 여전히 거두지 않으시고 여자의 후손을 통해 구원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구속 언약의 정직, 신실, 성실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표면적 세계에서는 물로 심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면의 뜻을 보면 구원입니다. 그래서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노아가 찾은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구원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크게 쓰신 사람은 ‘은혜가 같이 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어떤분인지 잘 표현하는 말입니다. 은혜는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요 선물입니다. 죄의 결과로 당연히 죽어야 하는데 죽이지 않고 구원의 반열에 세우셔서 다시 말씀을 통해 사랑을 받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감사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바로 구원입니다. 여러분 가정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으면 그 은혜가 구원이고 방주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로 계획하고 작정하시면 인간이 실패하고 포기하고 반항할지라도 하나님은 은혜로 그 모든 것을 삼키시고 가리시고 덮어주십니다. 은혜가 그렇게 위대합니다. 끝날에 은혜를 받지 못하면 죽습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때요, 구원의 날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고린도후서 6:1-2).
노아 홍수를 통해 하나님이 세상을 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원리의 계획대로 인간을 온전히 회복시켜 주겠다는 증표가 바로 ‘은혜’ 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들을 타락한 상태로 남겨두지 않으시고, 마음은 아프지만 그들을 수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악취 나는 고름과 죄악을 다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복시키십니다. 그것이 모두 이뤄지는 때가 예수님의 재림 때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수술 받은 것이 다 낫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도록 보호해 주십니다(요한일서 5:18). 병풍 치듯 호위해 주시는 것입니다(시편 125:1-2).

인류 역사에 가장 중요한 단어가 ‘은혜’입니다

노아 홍수에서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은 은혜를 입은 노아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물론 노아가 하나님께 순종했지만 성경은 노아의 순종과 믿음이 아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노아가 은혜의 하나님께 마침내 손들고 항복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모든 삶을 하나님께 항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은혜를 보내 주십니다. 은혜가 책임져 주십니다. 은혜의 옷, 모자, 외투를 입히셔서 누가 손대지 못하게 하십니다. 총이나 대포나 원자폭탄도 파괴할 수 없는 옷입니다. 어디에 가든지 함께 하시고 누구도 당할 자 없게 해 주십니다(마태복음 28:19-20, 여호수아 1:5-9). 은혜의 옷을 입으면 가는 곳마다 향기가 납니다. 생각과 발걸음마다 열매를 맺습니다. 은혜 입은 성도는 순종의 삶으로 하나님의 계획하시는 결과에 반드시 이르게 됩니다. 은혜가 결과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시려는 일을 완성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고 의지이고 열심이고 계획이고 목적이며 시작이고 완성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포기되거나 방해받지 않습니다. 말씀이 가는 곳 마다 어두움이 사라지고 악령이 없어집니다. 말씀이 우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 앞으로 인도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의 차, 비행기를 타고 하나님 앞에 가야 합니다. 내 힘으로 하려고 하면 힘들어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면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사악함, 죄, 나쁜 생각은 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죄 없다 선언하시고 당신의 새로운 마음과 인품을 주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고린도후서 5:17). 우리 스스로가 머리가 되면 또 죄를 짓습니다. 우리 머리는 죄악과 돈, 이성(異性)으로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우리의 머리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고 우리는 지체입니다(골로새서 1:13-20). 그리스도가 신랑이고 우리가 신부입니다(에베소서 5:27-33, 고린도전서 6:15).
인류의 시조 아담은 벌거벗고 있었으나 죄를 지은 뒤 수치를 느꼈습니다. 그의 참 가치는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주어졌는데 하나님과 단절된 뒤 수치가 드러난 것입니다. 노아는 홍수 심판 후에 포도주에 취해서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 때문에 벌거벗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의 옷을 입으라고 하십니다(로마서 13:14). 없어지지 않는 의의 옷, 세마포를 주어서 입히십니다. 우리도 아담처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 참 가치가 있습니다. 부부 생활도, 자녀교육도, 교회 생활도 은혜 속에서 시작하고 마쳐야 합니다. 그러면 늘 감사뿐입니다.

하늘나라로 가는 티켓이 은혜입니다

이 땅의 삶은 100세를 넘기지 못합니다. 하늘나라는 영원한 세계입니다. 때가 끼지 않고 먼지가 없는 곳입니다. 수천만만 천사가 찬송을 불러주는 곳, 생수의 세계입니다. 목마름이 없습니다. 늙어 볼품없어진 사람이 어린아이처럼 뽀송뽀송한 모습으로 변화합니다(이사야 65:20). 생명의 강이 흐르고 생명나무가 달마다 과실을 맺습니다. 물질세계에 속한 해, 달, 별이 쓸데없어지고 어린 양 예수께서 영원히 지지 않는 의의 태양, 빛이 되십니다(요한계시록 21:23). 생각만 하면 이미 이뤄져 있는 세계, 청아한 음악이 들려오고 죽음과 아픔이 없는 세계입니다. 그 세계는 돈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만 가지면 무사통과입니다. 은혜가 우리의 신분을 보장해 줍니다. 은혜가 우리를 피곤치 않게 합니다. 은혜 속에서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습니다. 그 세계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 자신과 아들딸, 배우자, 부모님, 사위, 며느리, 손자손녀, 조카들에게 까지 떠나지 않기를, 은혜 속에 살며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월 3일 주일 2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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