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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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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망했다
 글쓴이 : 관리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린도전서 15:55)

말씀의 성도, 씨알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 부활의 영(靈)을 거둬들일것 다 잘 거둬들이고, 영원히 간직할 것 간직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봄은 정말 부활의 빛이요, 봄은 정말 봄의 소리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뿌리 깊이 박히고, 꼭지 단단히 매달려야 하며, 길이 살고 오래 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오래 보는 것이고, 무엇이 길이 사는 것입니까? 제자리 잃지 않는 것이 오래 보는 것이고,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길이 사는 것이라 했습니다(유다서 1:20-25).
씨알 성도 여러분, 4월이 갑니다. 가슴에서 불길 치솟는 한 해 가운데 4월이 갑니다.
나는 새벽 2시에 슬픈 말씀을 노래 불러봅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너희 땅은 황무하였고, 너희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 토지는 너희 목전에 이방인에게 삼키웠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무하였고,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같이, 원두밭의 상직막같이, 에워싸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이사야 1:2-9)
여러분, 이것은 3000년 전, 망해가는 이스라엘 나라를 보고 한 말이라 하지 마십시오. 오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어디 그런 데가 있느냐!” 하지 마십시오. 어리석은 말 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뵈는 것을 보는 것이 밝은 것 아닙니다. 뵈지 않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눈만이 눈이 아닙니다. 눈 아닌 눈이 있어야 정말 볼 수 있습니다. 좋다 좋다 하는 사람이 반드시 고마운 사람이 아닙니다. 내 속의 병을 말해주는 사람이 내 은인입니다. 몸의 병만을 아는 것이 의사 아닙니다. 마음의 병, 시대의 병을 뚫어보는 것이 정말 내 은인이요, 나를 건져주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그런 것이 있느냐!”고 돌이켜 질문합니까? 그런 데는 대답 아니합니다. 선지자들도 대답 아니했고, 예수님도 대답 아니했습니다. 그런 물음은 알고자 하는 물음이 아니고, 제 속에서 나오는 빛과 소리를 누르기 위해 하는 한층 더한 악이기 때문에, 그런 개인, 그런 단체는 스스로 제 고집과 악에서 스스로 망하게 내버려두는 방법입니다(아모스 5:1-13).



그러면 도리어 혹시 깨달을 기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 속에도 하나님이 다 같이 사랑으로 넣어준 양심과 이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란 축복 속에서 말씀의 씨알들은 외쳐야 합니다.
마태복음 16:1-4을 보시면, ‘시대가 말하는 징조’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는 아니하고 하늘에서 온 표적을 구했을 때,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 하셨습니다.
‘악하다’ 한 것은 사회적 부정의를 말씀하신 것이고, ‘음란’이라 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성실치 못한 태도를 말씀하신 것일겁니다. 그거면 다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인정 아니하면 천만 마디 설명을 해도 도리어 그들의 악을 더해 줄 뿐이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하시는 일을, 딴 생각 없이 겸허한 마음으로 듣는다면 자기 자신이 곧 하늘에서 온 표적인 것이환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오셔도 똑같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왜 망할 징조를 모르느냐고 말입니다. 우리도 이 시대 사건들에서 장차 올 것의 징조를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못하면 실패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씨알만은 실망해서는 아니됩니다. 비전이 있는 백성은 망하지 않습니다(이사야 6:13, 잠언 29:18). 그러나 그 시대에 선지자가 없으면 망합니다(사무엘상 3:1, 시편 74:9, 역대하 15:1-7).
아무 소리 말고 하나님께 매달리고만 있자는 것이냐? 나는 거기엔 생각이 좀 있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린다는 말은 말하기는 쉽고, 참으로 하기는 참 어려운 것입니다. 정말 철저히 매달리기 위해 일체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끊어버리기만 하면 그에서 더 좋은 일은 없습니다. 정말 그렇게만 하면 큰 역사(役事)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순(純) 신앙 복음주의는 매양 말, 생각에 그치지 정말 그런 혼(魂)을 보셨습니까?
그리고 그 자리는 억지로 강제로 힘써서는 못하는 자리입니다. 되지도 않을 뿐더러 된다 해도 그것은 도리어 잘못을 겹으로 하는 일이 됩니다. 생명을 억지로 키우는 재주는 없습니다. 못 키울 뿐 아니라 말라 죽여 버립니다.
우리는 몸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절대의 하나님에 사뭇 들어간다면 육(肉)도 역사도 사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 역사적 사회 속의 한 사람으로, 몸(肉)을 가지고, 지각(知覺)을 가지고, 영(靈)의 씨를 가지고 삽니다. 여기 살면서 순전한 영(靈)이 된 것처럼 생각하면 망합니다. 주관(主觀)이지 진리(眞理)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먹기를 탐하고 술을 좋아한다는 맹랑한 비난을 들으면서도 그 인간의 찌꺼기들 속에서 같이 울고 웃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11:16-19).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것은 이 때문이요, 우리가 그를 절대자 자신을 보듯 믿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설교를 듣고 감동해서 일생을 하나님께만 바치겠노라고 고백한다고, 그 젊은 학생을 보고 세상 지식 다 소용이 없고 다만 성경만이면 된다 해서 한 사람의 일생을 그르치는 어리석은 부흥사들을 우리는 종종 봅니다. 물론 당장 바쳐 버리면 좋습니다. 그러나 국화 한 송이가 피려면 적어도 여섯 달이 필요하고, 나중에 가서야 꽃망울이 나옵니다. 사람의 혼(魂)은 더욱 그렇습니다.



의미를 말한다면 일순간에 하늘나라에 들어가지만, 실지로 혼이 그만큼 자라려면, 사랑의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약속한 성령을 받아 거듭나고 겸허하게 주시는 은혜로써, 축복 속에서 참으며 기다리는 것이 말씀의 씨알입니다. 절망하지 맙시다. 그것은 사람이지만 절망하시지 않는 것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의 자리입니다. 스스로 계신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차별 아니하십니다. 사람을 다 같이 보십니다. 그러나 인간 자신이 욕심 때문에 제 근본 바탕인 하나님의 모습을 팔아먹고 상처 냅니다. 그러나 말씀의 성도 씨알들은 약하고 못 생겨서 욕심 부릴 기회가 적으므로 바탕을 팔아먹을 기회가 적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씨알을 사랑하며 믿는 것입니다. 씨알들이 못났기 때문에 절망적이지만 또 못났기 때문에 희망적입니다. 역사 있는 이래 모든 어진 이들이 다 이 씨알을 상대하고 그 편에 서 주신 것은 이 때문입니다.
마음의 문 하늘을 향하여 활짝 열어 보십시오. 거기 영원한 하늘 바람 드나들고, 그 하늘 음악 들으면 가위눌림 같던 모든 시름 순식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죄는 망했습니다. 심판 받았습니다(요한계시록 20:14-15).

박윤식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