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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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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오늘, 그날의 얼굴을 읽는 눈알은 어디 있느냐?
 글쓴이 : 관리자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신명기 32:7)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신명기 29:29)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순전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누가복음 11:34-36)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사도행전 26:18)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요한계시록 3:17)


한여름은 다 갔습니다. 그 나라의 유업을 받을 자 성도 여러분! 더위와 장마를 어떻게 견디어 내셨습니까? 말씀의 씨알을 가지고 깨셨습니까?
가을이 왔습니다. 말씀의 씨는 시대의 눈알입니다. ‘뜬눈으로 샌다’는 말이 있습니다마는 말씀의 씨야말로 역사의 밤을 지새워 새 시대의 첫 광선을 맞이해야 하는 눈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신랑을 맞이하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아름다운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25:1-13)
그는 소망 가운데 기쁨의 사람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슬픔의 사람이었습니다. 깨어있는 눈,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눈이기 때문에 슬픔의 사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녀 같은 생명의 씨알들의 사랑과 창조에 반짝이는 눈알을 보고 싶은 그이였기 때문에 그는 늘 마음이 슬펐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빈 들에 나갔더냐?” 할 때 거기에는 얼마만한 슬픔이 흐르고 있습니까? (마태복음11:6-7)
“우리가 기쁜 노래를 불러도 너희가 춤추지 않았고, 슬픈 노래를 불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않았다.” 할 때, 거기는 흔들어도 흔들어도 눈을 뜨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우는 엄마의 모습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16-19, 누가복음 7:31-35)



“깨어 기도해라. 시험에 들지 말게 하라.” 하며 스스로는 피와 땀을 흘리며 기도하다가도 그것을 멈추고 돌아가서 그 피곤에 조는 눈들을 들여다보지 않고 못 견디는 그 마음, 그 마음을 무엇으로 형용할까요? (마태복음 26:36-46, 누가복음 22:39-46)
그러면서도 “야, 눈을 들어 들을 봐라. 곡식이 이미 익어 누렇다. 너희는 말하기를 넉 달이 있어야 추수할 때가 된다 하지만, 봐라. 가을이 벌써 다 되어 낫을 기다리고 있다.” 할 때, 거기는 또 확신과 희망의 기쁨이 넘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35-38)

그는 깨어있는 눈알이었습니다. 말씀의 씨알 중의 씨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했고, 스스로 사람의 아들이로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만이 뜬눈으로 밤을 샐 수 있고, 뜬눈으로 새는 눈알만이 슬픔의 빛으로 씨알들을 먹여 기를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기다리다 참지 못해 나무람과 분노가 터지기도 했습니다.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리라.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별할 줄 알면서 어찌 시대는 분별치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못하느냐?” 했습니다.(누가복음 12:54-57)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그는 시대를 미리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울어도 낙심해서 운 것이 아니었고 책망해도 미워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건질 수가 있었습니다.
세상을 건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역사의 주인 노릇을 한다는 말입니다.
씨는 역사의 눈알입니다. 씨알이 깼으면 시대는 산 것입니다. 그러나 씨알이 만일 깨지 못한다면 그것은 마치 기름 준비는 하지 않고 깜깜한 등만을 든 어리석은 처녀와 같아 역사에서 쫓겨남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천지의 얼굴은 어떻게 압니까? 신앙에 의해서입니다. 믿고 부닥치는 경험에 의해서입니다. 작은 경험은 기억으로 되지만 정말 큰, 근본 되는 경험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생명의 밑뿌리에서 나오는 신비로운 힘에 의해서 됩니다. 「노아」가 홍수를 면하고 인류중흥의 조상이 됐다는 이야기는 그것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종교적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계시지만 계시는 잠자는 마음에는 오지 않습니다. 깨어야, 뜬눈으로 기다리는 마음이 있어야 신비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하며 “「시대의 오는 얼굴」은 왜 볼 줄 모르느냐?” 하고 책망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모든 씨알이 구슬처럼 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깨어있는 태도입니다.
「타고르」는 ‘생명의 님’을 불러서, “그는 오신다, 오신다, 이제나 오신다.”라고 했습니다. 같은 뜻을 예수님께서는 “도둑같이 온다.” 했습니다. 도둑같이 오니 뜬눈으로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젊은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른 봄에 들에 나갔다가 받은 첫 계시가 살구나무 가지 (깼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조국의 형편이 기막히고 자기 나이 어린 것을 알면서도 무쇠기둥같이 일어서서 세계를 상대로 예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깨어 계신다!’ 하는 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슬픔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눈물의 예언자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이 눈물의 사람이 「이스라엘」 역사를 건진 가는 한 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교회 말씀의 씨알들도 720명이 1980년 9월 8일부터 12일까지 4박 5일 동안,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 괴목리에 소재한 장안산(長安山) 산상에서 금식기도와 철야할 때, 모진 비바람(태풍 ‘오키드’)과 싸워가며 국가와 민족, 나 자신을 위해 깨어있는 눈알 되기 위해서 많은 눈물을 흘리며 응답 받아 생령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도 남풍이 붑니다. 남풍이 불면 지혜 있는 말씀의 씨 같으면 그 뒤에 숨은 무더위를 알았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 겨울은 이상하게 따뜻하다 했습니다. 양지바른 산 옆에 꽃이 더러 피었습니다. 따뜻하지만 봄은 아닙니다. 꽃이 옳게 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을 크게 내다보는 양 꽃도 아닌 꽃을 피워 놓으면 정말 봄이 올 때는 기름은 딴 데서 다 써먹고 신랑은 맞이하지 못하는 처녀처럼 바깥 어두운 곳에서 이를 갈며 우는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기다리지만 조바심을 먹어서는 못씁니다. 말씀의 씨알들은 공명심이 없어야 합니다. 저를 내세우잔 마음이 있으면 말씀의 씨알은 대열에서 스스로 쫓겨납니다. 부는 남풍이 제법 봄 같지만 내 속알을 뽑아먹고 나중엔 영원한 겨울에 울게 하는, 그렇지 않으면 생명의 종자를 온통 쓸어버리는 폭풍을 머금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말씀의 씨알입니다. 동그랗게 생겨서 언제든지 하늘 바람과 햇빛을 전신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나무의 열매이듯이 역사의 씨알도 그렇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말씀의 씨알입니다. 그저 생명만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시대의 얼굴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겨울날 이상 기온에서 싹이 텄던 허영심의 씨알들은 망할 것입니다. 봄이 다 돼도 잠만 자고 있는 지친 씨알도 망할 것입니다. 정신 차리고 깨어 있는 씨알만이 시대의 오는 모습을 보아낼 수 있습니다.





들에 나가 보십시오. 좋지 않습니까? 부지런한 농부가 신이 날 때입니다. 온 들판이 다 거칠어진 것 같지만 그것은 역사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것들입니다. 이제 썩어서 우리를 키울 거름이 될 것입니다.
손을 넣어 대지의 가슴을 만져 보십시오. 추운 겨울에 얼어 죽은 것 같았지만 아닙니다. 그 얼음으로 인해 이제 우리의 *보습을 받을 준비가 돼 있습니다. 부드럽고 겸손해졌습니다. (*보습: 쟁기, 가래 따위에 끼우는 넓적한 삽 모양의 쇳조각)
이 시대가 제 할 사명을 사나운 겨울같이 다 하고 북극으로 쫓겨 갈 때 그 땅은 우리의 번쩍이는 보습을 받아들이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의 씨이지만 또 보습이기도 합니다. 우리 가슴을 우리 손으로 갈아엎고, 우리의 씨알, 하늘에서 받은 말씀을 씨를 또 우리 손으로 심는 것입니다.
위에 인용한 예수의 말씀의 마지막 구절이 중요합니다.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누가복음 12:57) 했습니다. 백성이 옳고 그른 것을 비판하는 정신이 죽어가는 것은 시대의 얼굴을 읽을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소경입니다. (예레미야 5:21)
마치, 겨울이 영 아니 가고 말 것 같아 보습을 갈아두기를 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날카로운 보습만이 거칠어진 땅을 갈아 뒤엎을 수 있듯이 굽힐 줄 모르는 비판정신만이 새 시대를 불러들입니다.
아직 씨 뿌릴 때 아니라 하면 방 안에 있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보습은 갈아야 합니다.
여러분 속에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가차 없이 쓸 것, 못 쓸 것을 골라 두십시오. 가을은 또 왔습니다.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심판의 가을입니다. 겨울 지나 봄은 또 옵니다.
사정없이 역사의 가슴에 번쩍이는 보습을 푹 둘러 박을 때, 가지 위에서 뻐꾸기도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말씀의 씨알들은 요한계시록 22:18-19, 20:15을 보십시오.

박윤식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