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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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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사람, 밤송이의 한숨
 글쓴이 : 관리자
 



하나님의 아들딸 여러분, 주시는 말씀의 축복과 은혜 생활에서 안녕하십니까?

무르익은 열매를 내놓고 하늘 땅이 혁명의 선서식을 거행하는 때가 왔습니다.

생명의 씨를 믿고 증거한다면서 이 소리 하나도 알차게 내지 못해 마음 아픕니다.

이 슬픈 고백을 여러분의 사랑의 입술로 마셔, 영원한 농사꾼이 오시어서 땅을 고르고 여러분이 바치는 씨를 받아 거기 뿌리실 때에 그것으로 물을 주시기 바랍니다.

비전이 있는 백성,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살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역사 구원의 사명이 성도에게 있다는 것에 대하여는 의심이 없습니다.

전에는 역사를 만드는 것이 임금이요, 영웅이요, 정치가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키우느라고 광주리를 흔들어 주던 때에 그 옆에서 불렀던 자장노래입니다.

이제 임금이요 영웅은 다 꿈나라로 물러가 버렸습니다. 그들보다 꾀 많고 잇속 따지는 정치가는 이름은 주고 속살을 뽑아 먹자는 속셈에 “지도자다-”하며 때로는 “공복(公僕)이요-”하는 말까지도 아끼지 않으면서 놓지 않으려 하지만 시대는 이미 지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세계 각 나라 정치 현상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혼란과 타락 없는 나라 없습니다.

모양은 가지가지지만 문제는 다만 하나, 생명의 씨에 있습니다. 스스로 역사의 주인으로 하늘 땅 사이에 전나무 숲처럼 일어서려는 씨알들을 그 팔 다리를 걸어잡고 막으려니 혼란이 아니 일어날 수 없습니다. 적도지대의 폭풍처럼 남북극의 눈보라처럼 일어나는 정신을 돈으로 달래고 이론으로 속이고 교육으로 병신 만들고 예술로 취하도록 하려드니 타락이 아니 될 수 없습니다.

말씀의 씨알들이 스스로 깨달아 누구의 다스림을 받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고, 그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 아니라 전체에 봉사하기 위해, 무엇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하는 살림이 되면 역사는 살아날 것이요 인간은 영원히 새로운 우주의 주인, 말씀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운명은 결정된 것입니다.

그 새 씨알을 어디서 구하느냐가 문제입니다. 거기엔 예수님의 말씀 이상의 말이 없습니다. “겸손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예수님의 말씀만이 아닙니다. 동서고금의 모든 어진 스승은 다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말씀의 성도 여러분, 생각할 것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세계에서 우리같이 낮아진 자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가 낮추어 겸손히 한 것 아닙니다. 그것을 누가 했습니까? 역사입니다. 하늘입니다.

반만년 역사의 종국은 우리 입이 땅에 닿은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역사가 누구에게 큰 사명을 맡기려 할 때는,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을 괴롭게 하고 그 하는 일마다를 방해해서, 그렇게 함으로써 그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길러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 능히 하지 못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갖은 고통을 다 겪게 해서 그것을 길러낸다 할 때는 그것이야말로 역사 구원에 가장 긴요한 것이기에 그럴 것입니다.

그것이 강(强)이 아니고, 지(知)가 아닌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치고 더구나 역사의 앞장을 서려는 사람으로 강하지 않으려 하고 지혜롭게 아니하잘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것은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겸손입니다!

왜요? 언제나 싸움의 원인, 멸망의 원인은 강(强)에 있고 지(知)에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자기보다 더 강하고 간악한 强과 知의 대적을 불러내고야 맙니다. 그러므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인간 역사에서 가장 슬픈 일은 인간관계를 지배·피지배의 관계로 보기 시작했던 일입니다.

근본은 그와 반대로 서로 알아줌이요, 서로 도움이요, 하나됨인데 처음에 있었던 힘과 재주로 잘났던 사람들이 그런 잘못을 저질러 그 나쁜 전통이 마치 자연적인 것처럼 알고 오늘까지 왔던 것입니다. 학문도 철학도 종교까지도 그렇게 보아왔습니다.

이제와서야 그것이 큰 잘못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정치주의 문명은 제 한 일로 자멸할 문명이겠지만, 역사를 건지려면 다른 종자는 반드시 그와는 다른 것 곧 겸손을 그 특징으로 하는 사랑의 성격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미 망하기로 결정받은 민족이나 개인이 아닌 다음에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가 받는 이 터무니없는 고난의 까닭을 여기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나의 삼십 청년 이래 오늘까지의 확신입니다.

우리는 이때에 욥의 자리에 섭니다. 우리 민족이 죄 없단 말 아닙니다. 그것 모를 인간 양심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이 운명은 터무니없다는 말입니다. 터무니없는 인간의 면목입니다.

그러므로 터무니없는 시험에 통과하려면 無無理(무무리), 無條件(무조건)에 이르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强과 知를 하나님으로 섬기며 약하고 불쌍한 것들은 당연히 착취하고 잡아먹어도 마땅하다 하는 이 문명을 걷어치우고, 생명의 근본 원리인 사랑과 평화 위에 서는 새 역사를 일으키려면 겸손과 봉사의 마음이 아니고는 안 된단 말입니다.

그래 그 본보기를 하나 내자는 것이 우리에게 떨어진 운명이란 말입니다

말씀의 씨알 여러분! 내가 이것을 압니다. 그런데 그것을 할 힘이 없습니다. 어찌 내가 슬프고 부끄럽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아마 더 심한 시련을 받아 찌꺼기, 죽을 인간의 찌꺼기, 과거 수만 년 역사의 찌꺼기가 내 마음에서 신경조직에서 뇌세포 속에서 빠져 나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여, 그리 하시옵소서!

내가 보통학교 4학년 때, 친구 집에서 공부를 하려고 밤거리를 걸으려니 골목골목에 군밤장사가 앉은 것이 보였습니다. 주먹 같은 밤알이 카바이트 호롱불 빛에 진주처럼 번쩍거리고 있었습니다.

‘그거야말로 씨알의 상징인데...“ 하는 생각을 하노라니 일본 古川선생한테 공부할 때 들었던 말이 생각납니다.

“밤은 들사람이다”(栗は野人なり)

대지의 어머니의 속을 그대로 나타내는 누런 알을 품으면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 떫은 맛의 속껍질, 강철 같은 겉껍질, 그 위에 또 어마어마한 가시송이를 쓴 밤은 확실히 겸손한 들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고 나는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그걸 먹는 사람은 누구지?’ 생각을 하니 씨알의 운명은, 계절의 시련을 다 겪어가면서 일껏 알을 들여 놓으면 무심한 놈들이 심심풀이로 먹어치우는 밤알처럼 참혹한 것 아닙니까?

그러나 사실은 바로 그것이 씨알입니다. 먹는 사람을 물었을 때 나는 씨알임을 잊었습니다. 정치주의·문명주의로 인해 받은 중독을 내가 아직 채 뽑지 못해서 나온 생각이었습니다.

자연에는 낭비같이 뵈는 점이 많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본성이 평화적인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연의 낭비는 하나님의 관대입니다. 무한의 용서입니다.

말씀의 씨알 여러분, 살아 계시는 하나님 말씀의 깊이를 알아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왜 땅에서 헤매고 있습니까?

왜 땅의 말만 하고 있습니까?

어서 여호수아와 갈렙같이 끝까지 남은 자가 됩시다.

씨알은 무한히 줌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땅을 차지하는 자격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크신 사랑 앞에 열매로서 살아 갑시다.

악을 악으로 대적 아니하는 것이 말씀의 씨알입니다. 악을 악으로 대적하는 것은 밑지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그것이 문명이요, 그것이 정치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인류의 앞을 캄캄케 하는 전쟁과 공해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날로 계산하면 밑지는 데 해로 계산하면 남는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말씀의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반대로 날로는 남는 것 같은데 해로 보면 밑지는 것입니다.

이 역사는 밑진 역사입니다. “자연의 대조화에 도전하고 어떤 벌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 오늘의 꼴입니다. 이것은 오늘만 그런 것 아니라 역사상에 여러 번 증거된 것입니다. 다만 현대의 것이 대규모의 과학적인 것이기 때문에, 거기 스스로 속는 것이 있습니다.

속담에 “쭈그렁 밤송이 삼년을 달려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알차지 못한 것을 비웃어서 하는 말인지, 동정해서 하는 말인지, 아니면 알 아닌 알을 그 속에서 받아먹고 놀아서 하는 말인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나 자신이 그 자리에 달려보니 생각이 좀 달라집니다. 나는 알 못 든 밤송이가 아닌지?

속담은 누구의 말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씨알의 큰소리입니다. 거기 우리의 철학이 들어있습니다.

들국화도 이제 향기가 다 되고 푸른 빛이라고는 거의 볼 수 없는 때, 움막 뒤에 서있는 늙은 밤나무에 달려 있는 3년 묵었는지 5년 묵었는지 모르지만, 쭈그렁 밤송이!

겨울 밤, 사나운 서풍에 달랑달랑 울던 그 소리!

그 밑에서 동정해 울어주던 골짜기 물소리와 함께 여러분 귓가에 들릴 것입니다.

말씀의 성도 여러분, 늙은 밤나무 가지 끝에 알 들지 못해 3년 달려 앓는 그 밤송이는 지금도 알알이 울고 있습니다.

나를 웃지 마셔요, 웃기에는 너무도 지독한 명령을 듣고 있습니다.

씨의 소리는 들에 있는 밤송이입니다.

알 든 놈도 떨어지는데 알도 못 든 것이 떨어지지도 않고 왜 그 꼴이냐 한다면 너무도 잔혹한 비판입니다.

말씀의 씨는 비판하지 않습니다. 비꼬지도 않습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여러분.

말씀의 씨는 안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못 떨어지는 것입니다. 못 떨어지는 것은 깊은 호소와 설움이 있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가 깊은 밤 눈보라 속에 우는 건 또 좋습니다.

봄 돌아와 꽃이 피고, 여름에 푸름의 물결이 천지에 넘칠 때에도 그 모양을 하고 달려서 울어야 하는 것이 어찌 내 욕심 때문만이겠습니까? 아, 나는 알 못 들어 우는 역사의 쭈그렁 밤송이가 아닌지?

나 아닌 것이 있습니다. 나는 알이 들어 땅 끝까지 굴려가 육십 배, 백 배의 씨알을 내어 뿌리 밑으로 돌아가 썩어간 나무를 가꾸잔 생각 있습니다.

알이 어찌 입으로만 들어가야 알입니까?

영원의 골고다 위, 나무에 달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십니까” 했던 그 사람아! 너는 누구냐? 너는 쭈그렁이가 아니지.

너무도 알이 들지 않았나? 그런데 왜 쭈그렁 밤송이마냥 가시를 쓰고 우느냐? 그래 못 든 알의 무거운 짐에 눌려 허덕이는 쭈그렁 송이들을 불러, 한번 얼핏 봐 주심으로 그 역사적 카르마를 대번에 벗겨준 다음, 허공에 날려 장차 오는 나라의 첩보대로 삼으려고 그랬던가?

오, 나를 오늘 당신 곁에 두소서.


휘선 박윤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