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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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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자
 글쓴이 : 관리자
 



생령의 씨알 여러분, 주 안에서 안녕하십니까?
고난의 길, 애로의 눈물 퍽이나 많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어떠한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생령의 씨알의 소리는 끊어지지 않고 울려 왔습니다. 바람이 세차면 세찰수록 더욱 굳세게 마음의 울림으로 대지를 굳게 디디며 멀리 빛이 뻗쳐 나아가는 곳을 주시해야 되리라 생각됩니다.

금년에는 “이상기온”이란 말이 많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약해진 증거입니다. 또 달리 말한다면 행복만을 목적으로 하고 사는 증거입니다. 옛사람은 아니 그랬습니다. 어려움은 처음부터 있는 것으로 알고 거기에 견디어 나가는 것이 사람의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고진감래(苦盡甘來)로 행복도 맛보았습니다.
오늘의 인간은 행복 전문가입니다. 그러니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재주를 부리는 데서 정신은 약해졌고, 또 입에 늘 물고 있으니 단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지혜는 자연과 결렬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배우는 데 있습니다. 옛사람은 밖보다 안을 더 찾았습니다. 자연에 폭풍이 있으면 그것을 보인 내 속의 폭풍을 가라앉히는 정신의 힘을 길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연을 정복하고 부려먹고 캐 먹다 못해 바닥이 거의 나게 됐으니, 인간은 어디로 가려는 것입니까?

생령의 씨알 여러분, 말씀의 씨는 낙심 아니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한복음 16:33)
잠잠함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잠잠한 가운데 속의 힘이 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힘이 일어나면 막을 놈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감상(感傷)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뜻을 위한 의분(義憤)을 가지고 악령과 싸워 승리하는 축복을 가집시다.

생령의 씨알 여러분! 우리는 진리로 성숙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낙심할 것 없습니다. 진리는 앞뒤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히브리서 6:1-2) 했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초보적 교리를 넘어서서 성숙한 경지로 나갑니다. 기초교리를 다시 배우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성숙한 사람은 훈련을 받아서 좋고 나쁜 것을 분간하는 세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습니다(히브리서 5:14). 초보적인 것은 기본적인 것, 원리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한 번 배우고 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서 끝까지 일관하여 지켜가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이란 곧 익숙한 사람입니다. 익숙함은 익혀야 얻게 됩니다. 그 익은 지경을 자행자지(自行自止)라 합니다. 스스로 가고 스스로 멎는 것! 「스스로」란 ‘제가 한다’는 뜻, 또는 ‘저절로 한다’는 뜻입니다. 저절로 하게 되어야 정말 제가 하는 것이고, 제가 스스로 해야 정말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손이 춤을 추고, 다리가 들렸다 놓였다 하는 걸 모른다.」하는 것은 그런 지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음악을 두고 하는 말인데
속에 무슨 느낌이 있으면 말을 하게 되고, 말이 한층 더해지면 노래도 길게 빼고, 노래가 한층 더 흥겨워지게 되면 감탄을 발하고, 감탄을 하다가 더해지면 그때는 손이 놀고 다리가 노는 것을 모르게 춤이 나간다고 말합니다. 이 땅 위의 도덕도 그렇다는 뜻에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즉 처음에는 힘써야 하지만 그것을 늘 잊지 않고 익히면 나중에는 춤을 추듯이 저절로 하는 줄 모르게 즐거움으로 하게 됩니다. 그것이 정말 「덕(德)」이라 그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하지 못하는 것은 자유를 익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는 것은 먹고 마심을 익혀서 나중에는 스스로 될 수 있는 지경에 갔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정신이 사는 것도 정신의 양식, 곧 진리를 실천하고 실천에 의해서 스스로 되는 지경에 이르러야 합니다. 알기는 하나 행하기는 어렵다고 하지만 모르는 말입니다. 늘 익히지 않는 그것이 곧 모르는 일입니다. 어린애라도 한번 젖 맛을 안 다음에는 어떤 독재자의 명령을 가지고도 그것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옳은 일의 맛도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늘 해서 그 맛을 알면 어떤 압박자가 그것을 중지시키려 해도 중지시키지 못합니다. 심하면 그 사람을 죽일 수 있겠지만 그것은 살인을 한 것이지 능히 남의 자유를 빼앗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지키면서 죽은 사람은 죽었다고 (남들은) 그러지만 스스로는 결코 죽은 것이 아닙니다. 왜입니까? 죽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지키기 위해 즐거움으로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말씀하시기를 「누가 내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입니다. 나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습니다.」(요한복음 10:17-18) 했습니다.

생령의 씨알 여러분!
스스로 자유를 내버리고 짐승 노릇을 하는 자는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자유는 하나입니다. 스스로 하는 한 자유가 있을 뿐입니다. 생명이요 정신이기 때문에 하나입니다.
그 그늘 밑에 천 마리 소를 세워둘 수 있는 큰 나무가 스스로 살았을 때는 그 천백개의 가지가 서로서로 치우침도 없이 흐트러짐도 없이 다 제자리를 지키고 버티어 있으며 거기 돋은 억만 이파리가 하나 빠짐없이 빳빳이 손을 펴서 햇빛이 그 위에서 춤을 추고 바람이 그 사이사이에서 음악을 아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뿌리가 끊어지고 진액이 오르내리기를 그치면 그 순간 곧 쭈그러져 잎은 잎에 짐이 되고 가지는 가지에 눌림이 되어 거꾸러져 썩게 되고 눈에 뵈지도 않는 버러지조차도 마음대로 파먹게 됩니다.

사람의 생명과 자유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하는 기운이 뻗쳐 있으면 발꿈치에도 무거움이 없고 터럭 끝에도 허전함이 없지만 그 기운이 죽으면 먹은 밥이 독이 되고 마신 물이 도리어 썩는 고통이 됩니다.
사람 노릇하는 것이 자유가 아닙니까! 그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 다시 찾기 위해서 오늘도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믿음으로, 주시는 은혜로 도(道)를 찾아 세우는 것이 사람 노릇입니다. 그것이 영원히 자유하려는 생명이요 정신입니다(골로새서 2:2).

박윤식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