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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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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날아라! 하늘 靈 계신 곳에 자유함 있다
 글쓴이 : 관리자
 

1981년 8월호
 
영원한 빛의 아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금년 여름은 참 덥습니다. 더위에 절대 눌리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온이 몇 도 올라가니, 사람 모양이 참혹합니다. 하늘 아래 있는 자 없는 자,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 지식이 있는 이 없는 이, 강한 자 약한 자 구별 없이 그 꼴이 꼭 뜰아래 헤매는 강아지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팔팔하던 강아지, 시뻘겋게 늘어진 혀를 다 빼물고 헐떡헐떡 이 구석 저 구석을 찾아 좌불안석(坐不安席)입니다. 서울 장안 팔백만을 살펴보니 가엾기 짝이 없습니다.

물과 불이 하나가 되어 사람을 들볶는 삼복입니다. 잘 견디어 내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견디는 것입니다. 참는 것이 사람입니다. 환경을 피할 것이 아니라 잘 견딜 것이요, 정복하고 잘 어울려 하나 되어 살 것입니다. 나와환경이 하나입니다. 하늘이 준 제 바탕을 망가뜨려버리지나 않았는지요? 바른말하다가 포학의 세력에 목이 잘리는 세례요한을 가리켜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었다!”(요한복음 5:31-36) 말씀하시는 그 심정이 어떤 심정인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골고다까지 십자가를 지고 나가신 것은, 영웅적인 용기라기보다는 그 팔락거리는 등잔불 하나를 꺼져버리게 해서는 아니 된다는 애절한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그 나라의 아들 여러분, 생명의 씨는 오늘의 팔락거리는 등잔불입니다. 이 등잔불이 꺼져서는 아니 됩니다. 모진 바람 불고, 사나운 짐승이 날뛰는 어두운 골짜기에 초막 하나를 지켜가는 것은 결코 큰돈이나 명예나 권력이 아닙니다. 호롱불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호롱불은 또 무엇으로 지켜집니까? 지어미, 지아비 사이에서, 그 호롱불보다도 더 약하게 까물거리는 사랑의 호롱불 때문 아닙니까? 호롱불이 꺼질 때 초막은 무너져 짐승의 굴이 될 것이요, 가슴과 가슴 사이의 사랑이 식는 순간 호롱불 꺼지고 골짜기는 지옥이 돼 버릴 것입니다.
말씀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로 이 시대의 호롱에 기름을 대십시오. 팔락거리는 등잔 같은 한줌만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대(時代) 구원의 소망을 주신 마지막 부탁이 사랑이었습니다.(요한복음 13:34-35, 15:9-14) 역사의 맨 처음부터 있었으니,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도 주님 사랑 가지고 살아야 새 것이 됩니다. 넓은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아닙니까? 진리를 부탁받은 사도들이 자기네끼리 사랑했습니까? 끼리끼리를 좋아하는 당파주의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는 주님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우선은 그것으로 세계 구원의 진리의 호롱불을 끄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랑의 등잔을 꺼서는 아니 됩니다. 이 땅 위에 ‘남은 자’가 될 여러분, 새 소식 듣기를 원하십니까? 새 소식은 새 계명인데 사랑입니다. 가슴마다 사랑의 불을 활활 타오르게 붙이고 있습니까? 사람마다 만나기만 하면 주고받는 인사말이 “무슨 새 소식 있습니까?” 합니다. 그만큼 가슴들이 답답한 것입니다. 가슴이 왜 답답합니까? 숨을 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바람이 썩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28-32, 3:10-18)
바람은, 천지에 가득찬 바람, 자유자재하는 바람인데 왜 썩습니까? 방문을 굳게 닫았기 때문입니다. 숨을 왜 쉬지 못합니까? 목을 졸리우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휙 하고 붑니다. 부는 바람은 옷을 헤치고, 바람을 받으면서 어느 누구나 하는 말, “어, 시원한 바람” 합니다. 이 바람, 이렇게 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람에게는 받고 못 받는 차이가 있으니, 이것은 사람이 만든 변(變)이지! 소위 영웅이니 거물이니 하는 것들의 하는 일이, 스스로 대자연에 장난을 해서 부는 바람도 받을 수 없이 만들어 놓고는 “우리 다 같이 즐깁시다” 하는 식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는 바람도 자유로 쐴 수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정말 변인데, 변이 생기면 정말 큰 변 난 것입니다.(이사야 5:1-7, 욥기 18:5-21, 21:17-19)
참을 합시다. 참은 전체에 있습니다. 한 구석이라도 잘못이 생기면 전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자기 자신 찾자는 것은 참이니 참이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힘이 아니라, 참이야말로 이기는 것입니다. 소수라도 억울하게 눌린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일으켜야 합니다.
답답하십니까? 그것은 소수가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쓰는 숨소리입니다. 역사의 운명은 거기 달렸습니다. 지금도 가슴이 답답합니까? 의(義)와 악(惡)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숨을 못 쉬어 답답하다 했습니다만 숨 못 쉬는 원인을 남에게만 돌리면 잘못입니다. 물질에는 밖이 있지만 정신에는 밖이 없습니다. 자유하는 마음뿐입니다.(고린도후서 3:17) 그러기 때문에 숨을 못 쉬는 근본책임은 내가 져야 합니다. 사회악의 책임을 남에게만 돌리는 것은 세상에서나 하는 소리지, 나라를 제 속에 가지는 생명의 씨들은 그런 소리해서는 아니 됩니다. 일이 어려워져서 가슴이 답답한 것은 참을 원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격을 길러 주시려고 시련 속에 넣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낙심을 해서도 아니 되지만, 또 지기싫다는 마음에 실력도 없이 될 수도 없는 저항을 되풀이만 자꾸 해도 아니 됩니다.
우리에게는 미운 사람이 하나라도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원수가 없어야 위대한 혼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나라를 참 사랑하는 것은, 철저한 자기부정을 통과하지 않고는 아직 참 자아를 모른 것이므로 아니 됩니다. 그러므로 비본래적 자아, 그것은 물질적인 힘밖에 아무것도 아니므로 보다 큰 물질적인 힘이 오면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그 자아를 철저히 부정했을 때, 물질의 힘을 내 속에서 완전히 부정했을 때, 새 힘이 거기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도(道) 자체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이란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생 힘쓰신 것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라는 것입니다.(마태복음 26:36-45) 그러기 때문에 능히 육신을 쓰고 있으면서도 “나를 본 것이 곧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서 능히 하늘의 숨을 받아 쉬시기를 바랍니다. 굳어진 마음 녹이는 것은, 하늘의 숨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숨을 받아 내쉬는 때요, 생기를 받아 마시는 때입니다. 죽은 자는 저 죽은 자들로 장사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박윤식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