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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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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의 가슴 속에 울리는 소리
 글쓴이 : 관리자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편 33:10-12)

신록이 눈부신 5월의 하늘 아래, 말씀 성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각별하신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사 속에서 내 민족을 내다보면서 ‘우리 민족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해 왔나?’ 하는 문제를 생각해 가는데 도움이 될까 하여, 내 생각하는 대로 말해보렵니다.

첫째, “보라!”(요한복음 1:29) “보지 못하면 죽는다!”
우선 「觀」(볼 관)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民族觀」(민족관)이라고 할 때, 물론 말하지 않아도「觀」이라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줄을 알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아니 사람뿐만 아니라 도대체 생명에 있어서 「본다」는 것은 아주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이 본다 할 때 「본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성경을 읽으시는 분들은 곧 생각이 날 것입니다. 「보는 사람」이라는 것이 있지요. 보는 사람! 그래서 한문으로는 「先見者」(선견자)라고 그렇게 번역합니다. 본래는 ‘먼저(先)’라는 말은 없고, 그저 ‘보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한문으로 선견자(先見者), 선지자(先知者 : 먼저 안 사람)라 하기도 합니다. 앞서 본다! 원뜻으로 하면 「代言」(대언) 즉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보지 못하면 망한단 말입니다. 개인으로도 그렇지만 민족적으로는 더욱 그렇습니다. 「觀」! 왼편에 있는 것은 올빼미인데, 그 위에 있는 그림은 올빼미 눈이지요. 그 아래 있는 것은 ‘새 추(?)’니까, 새임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올빼미는 낮에는 못 보고 어두운 데서 봅니다. 그래서「觀」이라고 하는 것은, 나타나 보이는 것을 보는 게 아니고,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見(볼 견)’이 아니고 ‘觀(볼 관)’입니다. “인생이 뭐냐?”하고 인생 속을 보는 것, 인생을 이해한 것이 ‘본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의식(意識)이라든지, 이해(理解)라든지 하는 게 ‘보는 것’입니다.
「民族觀」(민족관)이라 할 때, 우리 민족으로서의 자아의식(自我意識), 혹은 자기이해(自己理解), 자성(自省) 등의 의미로 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조상들이 옛날부터 자신들을 어떻게 알아 왔나?’ 하는 문제와 함께, 오늘 우리도 우리를 봐야 합니다. 정말 나 자신을 봐야 합니다. 알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역사를 창조할 수가 없습니다.
일은, 역사를 창조하는 데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를 알지 않고는, 이해하지 않고는 즉 민족(民族)을 보지 못하고는 아니 됩니다.

둘째, “어리석고 못나고 약한 것들에게 알게 하신다”(고린도전서 1:26-31) “말씀의 씨는 썩지 아니 한다”(베드로전서 1:23-25)
우리를 구원한 씨는 영원한 생명나무의 씨입니다(이사야 1:9, 로마서 9:29). 그 씨가 이 땅 위에 오실 때(빌립보서 2:6-11, 마태복음 20:28), 지위도 없이 권력도 없이 그저 땅을 디디고 나서(요한복음 1:14, 1:29) 억조창생들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나를 위해 희생 봉사, 십자가상에서 피 흘려 구속하신 분입니다. 이 은혜, 그 감격 속에 구속의 은총을 깨닫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십자가의 씨의 사람들입니다.
‘말씀의 씨’란 뭐냐? 지위도 없이, 권력도 없이 그저 디디고 서서,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 또는 나라 민족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다가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난 대로 있는 사람」, 못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들어준 그 본성을, 그 바탕을 비교적 깨뜨리지 않고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일관된 생애 속에서, 육(肉)에 대하여는 웃음을 찾아볼 수 없지 않습니까? 장망성(將亡城)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흘리는 비애의 눈물을 보십시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누가복음 19:41-44) 일평생 나라를 위하는 탄식과 눈물을 흘린 「예레미야」 선지자나,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예레미야 9:1, 5:31, 4:19-31, 로마서 9:1-5).
지위가 있는 사람은 지위가 있는 대신에 그 바탕을 다 팔아 먹지는 않았는지? 지위라는 건, 자기 육신이 살아있을 동안밖에 못 갖는 건데, 그게 있기 때문에 바탕을 다 팔아 먹었으니... 높아가면 갈수록 그걸 팔아 먹는 자 얼마나 많은가! 오늘날 그런 사람이 우리 사회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두려운 마음 가지고, 이치대로 이론대로 학문도 있고 재주도 있는 사람들이 중요한 위치에 올라서서 나라를 맡아서 하면, 이 나라는 무궁할 것입니다(디모데전서 6:19, 잠언 28:1-2, 29:2).

셋째, 눈물 있는 기도로 호소합시다.
「예레미야」 선지 당시의 시대상을 찾아봅시다. 그 당시 유대 나라의 정경은 너무나도 비참하였으니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극단의 타락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예레미야 1:10-19, 5:26-31). 게다가 아울러 백성까지 부패한 시대상을 관찰한 뜻 있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눈에서 눈물이 마를 리 없었고, 더욱이 이와 같은 부패와 타락의 틈을 타고 들어오는 「바벨론」의 침략의 마수가 뻗쳐 있음을 눈앞에 보고 있습니다(예레미야 4:19-31). 전쟁의 경보를 듣고 창자가 끊어짐과 같은 비통을 아니 느낄 수 없었으며, 그 마음 불안하고 안타깝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 성도 여러분! 생명의 씨알 여러분! 우리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눈물의 동기를 재검토하여 우리 조국의 현실과 비교 대조해 봅시다!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기도하는 백성은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믿음으로 지킵시다! 어느 때보다 북괴 살인마 김일성 일당은 남침 야욕의 칼을 날카롭게 갈고 있습니다. 침략의 우려는 바야흐로 심각하게 무르익어가고 있는 이 때에, 조국의 현실을 정시(正視)하는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마를 수 있습니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누가복음 23:28-29) 하신 말씀은 주님의 십자가 뒤를 따라가며 우는 예루살렘의 여인들을 권하여 주신 주님의 마지막 고별사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울어 봅시다! 옛날, 유다 왕 「여호사밧」 같이, 「히스기야」 왕 같이, 눈물 있는 기도로 호소해 봅시다! 눈물 있는 제단은 반드시 상달됩니다. 속함을 받은 백성은 망하지 않습니다(이사야 6:13, 35:8). 이스라엘의 선견자라고 하던 사람들은 인생을 보았습니다. 역사를 보았습니다. 우주를 보았습니다. 모두 다 사회 바닥의 생명의 씨와 더불어 산 사람들 아닙니까? 이스라엘의 등뼈가 믿음의 선함을 가지고 생명(영생)을 취한자인 것을 누가 감히 부인할 수 있습니까? 그들은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야인 생활을 하면서도 믿음을 지키면서 하늘의 뜻에 순종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자신을 보지 못하는 민족은 망합니다. 표면에 나타나게 서 있는 사람은, 참 의미로 나라에 봉사하는 사람이 아니고 나라에서 뜯어먹는 사람들입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두 세계에 삽니다. 「속사람 세계」와 「겉사람 세계」입니다. 「속으로 사는 사람」은 전체를 섬기며 사는 것이고, 「겉사람 세계의 주인 노릇하는 사람」은 남에게 섬김 받자는 것이니, 자연히 생각 같은 것은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속에서 시작하신 이(하나님)’가 없기 때문입니다(빌립보서 1:6, 2:13, 에베소서 4:17-27). 「사람의 본래」가 없고, 「생명의 본래」를 알지 못하였기에 그렇습니다(마태복음 19:8, 요한복음 6:63).
보는 사람은 살고, 못 보는 사람은 망합니다! 우리는 보는 사람이 됩시다. 눈이 좀 밝아야 하늘을 봅니다(누가복음 11:33). 우리가 밥을 만들어야 합니다. 누가 밥을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제가 만들어서 먹도록 합시다. 하늘의 뜻을 위해, 일하고 먹고 살고 합시다(로마서 14:7-8). 그리고 갑시다.
이래라 저래라 하기 전에, 우리는 전진적 믿음을 가지고, 사단의 비밀을 알고 말씀의 철장으로 때려 부수며,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땀을 흘리다가 피를 쏟읍시다.
오늘 우리 기독교가 역사의 앞장에 서서 인류를 구원하는 사명을 능히 다하지 못하면 무서운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때는 흐리터분한 사심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 될 때입니다.

넷째, 우리 성도는 시대의 예언자들입니다. 선각자들입니다. 선견자들입니다.
지금은 말씀의 가뭄 시대입니다. 정신을 차려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아모스 8:11, 로마서 13:11-14). 가만히, 멍청하게 있지만 말고 늦게나마라도, 늦었을수록 우물 파기를 시작하지 않으면 시원한 구원의 말씀을 못 받고 죽어갈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정신을 차려 시원한 생수가 용솟음치는 샘물을 파야, 우리 뒤에 오는 사람은 예언을 받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살면, 그 속에 나도 살아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나만이 아닙니다. 전체에 삽니다. 사람은 역사적입니다. 어떠한 위대한 예언자도 역사적 배경 없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여김 받으면서도 생명을 놓치지는 않았습니다. 마치 고목은 죽어가지만 새 생명, 새싹이 다시 살아 남습니다.
“새 생명은 내 마음 속에서 탄생시켜라!” 이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거든 수군수군하지 맙시다.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아들을 낳고 싶으면 속 깊이 가만히 기도하는 것이고, 아기를 뱄다고 느껴지면, 먹는 것, 입는 것, 말하고 듣는 것, 생각하는 것, 몸 가지는 것, 행동하는 것을 하나하나 조심조심, 기뻐도 기쁜 빛을 아니 나타내며, 두려워도 두려워하는 기색을 감추며, 참고 아기가 저절로 나오기를 기다리지, 누가 첫날부터 아이가 어떻게 생긴 것을, 그리고 그 어떻게 나올 것을 알려고 서둘겠습니까? 그건 반드시 제 부모 아닌 남, 점쟁이, 관상쟁이같이 그것을 팔아먹으려는 것들만이 하는 짓입니다.
아기 하나도 그렇거든, 전 인류 역사를 건질 십자가 종교는 더구나도 그럴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새 종교를 보여 준다는 데는 어찌 그리 속는 사람이 많습니까? 속는 것은 속에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욕심으로는 낳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합니다.
한 생명이 이 땅 위에 태어난 과정을 보십시오!
한 남자와 여자가 몸과 마음과 혼 전체가 합하여 격동을 통해 하나가 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듯이 종교도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는 십자가만 있을 따름입니다. 새 말씀을 간절히 바랄지언정, 절대로 만들어 보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하는 자는 절도요, 강도입니다.
1980년! 이 해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성령의 단비, 늦은 비, 복된 장맛비 같은 은혜가 쏟아질 줄로 믿고, 마지막 한 때 민족 복음화의 기회가 될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 운동에 앞장 선 여러 교단 목사님들 위해 항상 영육간의 강건함을 기도할 따름입니다.
어둠길을 헤매던 수많은 생명들이 전국 도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진리 빛을 받아 소생해 가는 것을 볼 때마다 감격의 눈물을 금할 길 없습니다.
어서 속히 이 빛이 온 누리에 가득차기를... 전 성도는 생명의 나팔수가 됩시다.
이제 역사를 창조하는 역군들이 부르는 힘찬 음성은 뚜렷이 들려 옵니다. 하늘이 찾고 있는 신앙양심 성도는 일어나 빛을 발합시다(이사야 60:1)
새 시대, 새 뜻의 목 메인 외침소리에 남 먼저 감응하고 일어나 갑시다.

박윤식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