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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지진, 어떻게 볼 것인가
 글쓴이 : 관리자
 



참석자 :
조요셉 목사, 연경천 장로, 지근욱 집사, 강이레 성도(일본 출생 후 고교까지 현지 졸업, 연세대 신학과 재학 중)
사회 : 이지운 (서울신문 정치부 기자, 베이징 특파원 역임)


저는 2008년 중국 쓰촨(四川) 대지진 때 한국 언론으로는 처음 현장에 도착한 기자로 알려졌습니다. (사실은 두 번째였습니다만, 당시 가장 영향력 있다는 한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사회자가 사실을 모르고 그렇게 소개를 하면서 잘 못 알려지고 말았습니다.)
쓰촨으로 가는 길부터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지진과 종말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은 잦은 지진을 종말적 현상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마태복음 24:7)고 하셨습니다.
의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지금을 말세지말(末世之末)로 여기고 살고 있다. 지금 지진이 잦은가?” 과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지진은 곳곳에 늘 발생해 왔으며 100년, 200년 이상의 긴 시간으로 볼 때 그 ‘발생 빈도의 평균’은 별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쓰촨 지진을 통해 “지진은 잦아졌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수학적으로 지진의 발생 횟수가 잦아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진을 ‘눈으로 봄’으로써, 지진이 잦음을 알고 실감하게 됐다는 얘기입니다. 과거에도 처처에 지진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예컨대 30년 전이라면 인도네시아, 아이티, 칠레, 뉴질랜드 지진 등 먼 나라 일은 물론 이웃나라의 재난도 알기 어려웠습니다. 중국만 해도 앞서 1976년에도 탕산[唐山] 대지진이라는 엄청난 재난을 겪었지만, 쓰촨 지진에 이르러서야 온 국민이 그것을 실감할 수 있었지요. 아마도 인류는, 어떤 재난도 이번 일본 지진처럼 실감하지 못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도대체 쓰나미가 얼마만큼 빠른지, 지진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알게 됐습니다. 헬기 촬영으로, 휴대폰 동영상 촬영으로 너무나 생생한 화면이 그대로 전달됐습니다. 기계문명의 발달이 자연의 무서움을 더욱 잘 알게 해 주는 역설적인 사례입니다. 이번 일본 지진으로 멀리 미국 서부와, 남미 지역의 나라들까지 긴장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전(全)지구적인 공포입니다. 2010년 아이슬란드 화산폭발 때도 온 유럽의 발이 묶이고, 지구 건너편 한국까지 상당한 영향을 끼칠 정도였습니다. 실로 지진은 잦아졌고, 재난은 늘어가고 있으며, 근심과 공포도 덩달아 커져가는 이때입니다. 지난해 이맘 때 종말론을 주제로 좌담회를 연 지 꼭 1년 만에 다시 같은 자리를 마련한 이유입니다. 대화의 흐름으로 하지 않고 주제별로 나누어 정리했습니다.

잦은 지진과 재난

연경천: 최근까지 중국의 쓰촨성, 아이티, 뉴질랜드, 칠레 등 지진의 소식이 끊임없이 들려왔지만 일본 지진이 가장 충격적이었습니다. 1995년 고베 지진 이후 완벽한 선진국형 내진 설계를 구축했다며 ‘안전 천국’을 자랑하던 일본이었으니까요. 다른 나라 사람들까지 무기력함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조요셉: 사회자가 ‘보고 알게 되는 것’에 대해 얘기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주 재난의 소식을 접하면서 무감각해지고 익숙해지는 현상도 동시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전쟁과 기근이 곳곳에서 나타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저 잊혀진 사건이 되기 쉽습니다. 세계의 지구촌화로 재난이 이슈화, 집중화되면 더욱 긴장하고 경건해져야 하지만, 기억은 ‘원점’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재난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신호’로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재난을 그저 자연현상으로 이해합니다만 기독교인만큼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깨어 있으라는 신호요, 싸인(sign)입니다. 노아 홍수 때도 홍수로 죽을 때까지 “곧 그치겠지.”하며 비가 그칠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이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마태복음 24:39)라고 했습니다. 그전에도 큰 비는 많이 왔을 테니까요. 지금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사회: 보고 알게 된 뒤 반응은 ‘경각심을 갖는 사람’과 ‘무뎌지는 사람’으로 나뉘어진다는 얘기군요.

연경천: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말세라거나 종말의 때라고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많은 기독교들도 세속사의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확신하지 못하고 사는 게 오늘날 현실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가시와 엉겅퀴로 뒤덮여 하나님의 구속 경륜과 그 오묘한 섭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지요. 그걸 분명하게 알게 해 주는 것이 구속사 시리즈가 아닌가 합니다.

조요셉: 개혁주의 기독론의 관점에서 보면 신앙 안에서 우연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닥치는 모든 일들은 어떤 형태든 신호나 싸인(sign)으로 이해하는 것이 개혁주의적 기독론입니다. 지진을 과학적으로는 판구조론 등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개혁주의 신앙으로는 지진의 발생은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이뤄집니다. 하나님의 징조와 상징으로 이해해야 마땅하죠.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신호, 기독인은 그런 흐름 속에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종말론

지근욱: 종말은 기독교의 대전제인데, 지금 교회가 종말론이란 얘기를 꺼내기도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선은 종말론을 공포감으로 조성해 온 ‘사이비 종교’의 부작용 탓이 큰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도 성경에 입각한 올바른 종말론을 가르치려 하지 않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경적인 종말론에 목말라 하지만, 막상 가르치는 곳은 많지 않습니다.

강이레: 교회의 종말론이 정확하지 않다 보니, 종말을 거론하는 사람이 사이비로 치부되거나 이단시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 끝을 얘기하고 있는데도 말이지요. 그래서 때론 교회 자체가 사회에 불안 정서를 조장하는 세력으로 비쳐지기도 합니다.








성경의 종말은 파괴와 멸망이 아니라 영생과 희락의 완성


*이 점진성을 그는(저자는)....판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약간은 무서운 말세론적 심판보다는 오히려 우리 주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으로 역사의 완성을 종말로 보는, 은혜와 축복의 종말을 갈망과 감격으로 찬송하며 기다리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기독교를 감사와 환호 그리고 밝은 희망의 종교로 확인하는 복음입니다. 이 지상의 역사가 바로 하나님의 역사라는 생명과 축복의 완곡한 표현입니다.” -민경배 박사(연세대 명예 교수, 전 서울장신대 총장)

조요셉: 성경의 종말은 마지막에 이뤄질 역사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구원 역사의 완성 시점이 종말인 것입니다. 파괴와 멸망, 인류의 끝, 무섭고 두려운 점만이 부각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기독론적인 종말은, 일시적이고 한시적인 것이 영원성으로 대체되고 옛 것이 새 것으로, 육적인 것이 영적인 것으로, 죽음과 고통이 영생과 희락으로 대체되는 것입니다. 죄와 선을 분리하는 일입니다. 죄를 멸망하고 선을 새롭게 하는 두 가지 일이 함께 이뤄지는 것입니다. 완성의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기 죄 때문에 이런 것이 더디 오길 바라는 것입니다. 바람직한 종말론에 대해서는 구속사 시리즈 제1권 「창세기의 족보」에 대한 *민경배 박사의 서평이 잘 설명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구속사의 완성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소망,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두려움이지요. 그런 성경적인 교육이 이뤄져야 합니다.

교회의 역할

사회: 가장 성경적인 종말에 대해 교회가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조요셉: 사회에 대해 교회가 건전한 영향력을 갖지 못하다 보니 할 얘기를 못하는 것이지요. 싸우고 분란을 일으키니 그럴 능력을 상실한 것이지요. 물량주의와 분파주의, 균열주의, 물질주의, 도덕적 타락 등으로 기대를 저버리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본의 어느 기자가 “십자가는 도쿄보다 서울이 훨씬 많지만 도덕 수준은 서울보다 도쿄가 높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연경천: 1980년대 중반으로 기억됩니다. 누군가가 당시 전화번호부를 들고 와서는 등록된 번호에 교회의 수가 많겠느냐 다방의 수가 많겠느냐 내기를 하자더군요. 확인해보니 다방의 수보다 교회의 수가 2배나 더 많더군요.


조요셉: 사회가 교회에 요구하는 도덕적 수준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통계로는 그 사회의 평균보다 30% 이상 높아야 그 도덕성이 인정받는다고도 합니다. 처절한 회개 운동이 교회에서 시작돼야 합니다. 이 시대에 깨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교회의 영적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우리의 도덕적 수준을 철저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근욱: 구속사 시리즈야말로 기독론적 종말론에 가장 충실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구속사적 맥락에서 종말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를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문자 속 수 천 년 전 일들을 생생하게 살려냈기에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구속사 시리즈를 통해 자세히 보니 에녹은 종말의 예언을 ‘현실’로 받아들였기에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노아 홍수’라는 성경의 말씀을 실감 있게 보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도 종말을 막연하게 느끼는 건 아닐까요.

조요셉: 에녹도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슬픔과 고난이 있었겠죠. 단지 마음의 중심이 종말을 바라보고 하나님 시각에 맞추려 애썼고,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지 않았던, 그런 상황 아니었을까요.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였습니다. ‘그가 죽으면 종말이 온다.’는 이름 때문에 긴장을 풀기 어려운 상황이었겠죠. 하나님의 강력한 ‘사인’이었던 거죠. 기독교인은 세상에 영적인 므두셀라가 돼야 합니다.

연경천: 회계학적으로 보면 ‘자산=부채+자본’인데, ‘자본=내 신앙’이라면 ‘부채=하나님에 대한 빚’이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채를 열심히 갚아나가다 보면 에녹 같은 사람이 되고 ‘자산 건전성’도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일본 징벌론을 말하기에 앞서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징벌론
“먼저 교회가 심판의 대상”

사회: ‘일본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론’ 주장이 나와서 논란이 됐지요..

강이레: ‘일본은 기독교인이 적어서 그런 일을 당했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속상합니다. 일본 전국 어느 곳에도 열심히 믿는 기독교인들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다만 그 비율이 적을 따름이지요.

지근욱: 사회적 문제가 됐던 그 언급도 전후좌우의 맥락은 있었을 것입니다. 뒤늦게 일부 해명이 되긴 했습니다만. 어쨌거나 세상을 자극할 일이 아니라 세상에 어떻게 접근하느냐를 고민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강이레: 물론 일본에서는 아직도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기 쉽지 않은 분위기입니다. 기독교인에 대한 이지메(따돌림)가 아직도 남아 있지요. 저도 목사의 딸이라고 이지메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일본인 신학자가 “일본은 망해가지만 기독교인의 할 일은 많아져 가고 있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일본을 말씀 안에서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얘기로 들립니다.

조요셉: 회개 운동이 교회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교회가 먼저 심판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 또한 성경적입니다. 성경은 ‘성전 안’에서부터 심판을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역으로 남아 있던 ‘남(南)유다’마저도 결국 멸망의 심판을 받은 것 아닙니까?

연경천: 예수님이 누가복음 13장 4절~5절에 “망대가 무너져 치어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이라고 하신 게 생각납니다.

사회: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냐.’ 그런 얘기와도 맥이 닿는 듯 합니다.

조요셉: 성경에서는 ‘저주’가 ‘은혜와 회개’로 거듭나는 기회가 되곤 합니다. 죽음의 저주에서 생명을 연장받은 히스기야가 대표적인 사례 아닙니까. 므낫세도 마찬가지지요. 진리가 진리 되게 하도록 하는 일이 종말론의 교육 내용이 돼야 할 것입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말하는 일본 친구들 많아

* “일본 3,11 대지진은 모든 측면에서 일본 정부의 관리 수준을 뛰어넘었다. 일본 정부가 1978년부터 대지진에 대비해 대책을 마련한 곳은 주기(週期)로 볼 때 가장 가능성이 컸던 도카이(東海, 도쿄~시즈오카~아이치) 지역이다. 하지만 실제로 대지진이 강타한 곳은 도호쿠(東北)였다. 일본 정부가 도카이 지진을 대비하면서 상정한 규모는 ‘8’이었지만 이번 대지진의 규모는 ‘9’였다. 인명피해도 컸다.
2003년 ‘도카이 지진대책전문조사회’가 예상한 사망자는 최대 1만명. 이번 대지진 사망, 실종자는 이미 2만5000명을 넘었다.”
(조선일보 3월26일자 C1면)


일본과 일본 지진

강이레: 처음 지진 소식을 접한 일본 친구들 중에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고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일본 사람들에게는 오랫동안 도쿄에 대형 지진이 올 것이라는 얘기가 있었어요.

지근욱: 미신 같은 것인가요?

강이레: 아니에요. 아주 과학적인 근거로 예상된 일이었고, 그래서 모두들 마음 속에 두고 있던 일이에요. 일본은 어려서부터 물리시간에 지진공부를 자세하게 해요. 판 구조이론 정도는 배워서 누구나 다들 잘 알고 있지요. 일본에서 지진은 진도 5도 정도로는 공포감이랄 수 없을 정도로 보편적이에요. 6~7도 이상 돼야 동요를 느낄 정도로 지진에 익숙한 사람들이죠. 이사해서 가구를 놓을 때도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이 지진 가능성이거든요. 일본에서 태어나 홋카이도, 오사카, 도쿄 등 여러 곳으로 다녔는데 한 번은 홋카이도에서 지진이 나서 식기가 깨지고 어항의 물이 쏟아지고 떨어질 수 있는 모든 게 다 떨어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모두들 학교에 왔어요. 급식이 안돼서 우유와 바나나를 주고 오전 수업만 하고 돌아갔던 기억이 있어요. 이번에 친구들과 통화를 해보니, ‘자연에 대비를 해도 안되는구나.’ 하는 회의감이 많이 들었던 모양이에요. 도쿄 대지진에 대해 근원적인 두려움이 있었고 이에 골몰하고 있었는데 다른 곳에서 상상을 초월한 일이 일어났고, 엄청난 피해를 당하고 나니 더욱 그랬던 것 같아요.

지근욱: 오히려 재난이 많으면 ‘절대신’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강이레: 1995년 고베 지진이 끝나고 누군가가 그런 일을 일본 기독교인에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 큰 일을 겪고 나면 절대신을 찾을 법 한데 왜 안 믿느냐.’고. 그랬더니 그래서 더 안 믿는다는 거에요.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다원주의적 사상에도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태어나서는 *신사(神社)를 찾고, 크리스마스에는 교회를, 12월 31일에는 절에 갑니다. 결혼은 교회에서 하고 장사는 절에서 치르는 그런 문화죠. 기독교는 하지 말라는 것이 많고 불교는 상대적으로 그런 제어가 적으니까 그런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신사(神社) :일본에서 왕실의 조상이나 고유의 신앙 대상인 신 또는 국가에 공로가 큰 사람을 신으로 모신 사당.

조요셉: 앗수르와 애굽, 신 바벨론이 맞붙은 갈그미스 전쟁이 고대 중근동(中近東)의 세력을 재편한 전쟁으로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죠. 가우가멜라 전투는 헬라와 페르시아의 주도권을 바꾼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구속사의 관점으로 세상의 역사를 보니, 이 일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치(懲治)한 뒤, 남은 선민(選民)으로 구속사를 끌고 가시기 위해 일으키신 일체의 사건임을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일체의 일들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이뤄지는 것임을 구속사시리즈 제5권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속에 담긴 영원한 언약의 약속」을 통해 새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강이레: 이번 지진을 통해 일본에서 말씀이 더욱 확산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책 없는 풍요를 즐겨온 인류, 교만과 탐욕에서 벗어나야



일본 지진의 후유증

사회: 이번 사건으로 원자력에 대한 회의감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나라마다 관련 국가정책의 변경을 고려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인류에게 오늘날과 같은 풍요를 가져다준 ‘근대화’는 ‘에너지’를 동력으로 진행돼왔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체 에너지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원자력을 포기하거나 의존도를 급격히 낮추는 것은 ‘진보’와 ‘발전’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한편으로는 “핵 발전 뒤 나오는 고,중,저준위 폐기물을 몇 만년에 걸쳐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해온 것 자체가 인간의 오만”이라는 지적도 있지요. “인류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근대의 풍요’를 즐겨왔다.”고 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 문제도 앞으로 상당한 논쟁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조요셉: 문명과 문화의 진보가 잘못은 아닙니다. 풍요로운 삶, 전인적 행복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풍요로 인한 탐욕과 이기심, 이런 것들이 정죄의 대상인 것이지요. 현대사회에서 원자력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문화와 문명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기술은 활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사용자의 속성이 악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것입니다. 바벨탑은 인본주의적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이름을 내자.’고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생각에서였죠.

지근욱: 문명이 발달되고 축적되는 것 같지만, 상대적으로 영성은 빈약해지고 그러기에 타락하는 것 같습니다. 영성의 회복이 중요함을 새삼 느낍니다.

조요셉: 원시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명과 문화는 엄청나게 발달했지만 바뀌지 않은것이 있다면 사람의 마음입니다. 죄와 탐욕은 더욱 심해졌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인간 속의 죄성을 해결하지 않고는, 쌓아온 것은 징치의 대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절정이 바로 바벨탑 사건인 것입니다.



글_ 이지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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