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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와 세속사는 둘이 아니다 (2010년 10월호)
 글쓴이 : 관리자
 

아브라함은 상상이나 했을까요? 4,000년이 지나서 자신의 이름이 이렇게나 유명해질 줄을?



구속사救贖史와 세속사世俗史는 둘이 아니다

참석자_ 홍봉준 목사, 김지연 권사, 송인호 장로, 강명선 성도
사회_ 이지운 기자

제국도 제왕도 사라졌지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은 남아 흥왕해 왔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야곱, 요셉 등 그 가계의 이름은 성도들이 기꺼이 갖고자 하는 이름이 됐습니다. 그 이름을 가진 어떤 이들은 크게 존경받는 위인들이 되었습니다. 알렉산더를 비롯한 어떤 영웅 호걸의 이름이 이에 견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역사의 주역은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등 대제국이었던 듯 보이지만, 2,000년이 지난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확인하게 됩니다. 제국은 그 흔적만을 간신히 남겼지만 그 수레바퀴에 이리저리 치이며 존재감조차 없었던 이스라엘은, 지금 되살아나 국제적으로 높은 위상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세계사를 이끈 힘은 하나님의 구속사였음을 역설적으로 세계사를 통해 보게 됩니다. 구속사 시리즈 제5권「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속에 담긴 영원한 언약의 약속」은 이것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참평안 8월호 등불토론, ‘구속사와 세속사, 둘이 아니다.’는 제5권의 발간을 계기로 마련됐습니다. 학부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홍봉준 목사와 전·현직 교사인 김지연 권사와 강명선 성도, 금융계에서 일하고 있는 송인호 장로가 토론에 참여했습니다.

사회_ 먼저 구속사와 세속사(世俗史)의 개념 정의부터 필요하지 않을까요.

홍봉준_
‘역사의 정답은 구속사’라고 정의하는 게 가장 성경적일 것입니다. 구속사 시리즈를 읽어보면 구속사와 세속사의 중요한 차이점을 이해하고 역사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이유,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구속사의 핵심은 하나님이 역사에 간섭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역사인식은 ‘직선 사관’입니다. 창조-구속과정-종말로 이어지는 연결선이 그 줄기입니다. 역사는 종말을 향해 직선처럼 나아가며 그 마침표는 종말입니다.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하신 방향, 의도된 작정으로 움직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에 의해서 나아간다.’는 것을 구속사 시리즈 제1, 2권이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지요. 반면 고대 그리스의 역사인식은 ‘순환적 사관’입니다. 역사는 반복의 결과이며 이 과정에서 역사는 발전해 나가는데, 역사학자 토인비 같은 사람은 이를 ‘응전과 도전의 역사’라고 해석했지요. 과거를 통해 교훈을 얻고 이를 통해 발전, 새로운 사회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진보주의가 세속사의 핵심인 것이지요. 자연신론(自然神걩)이라는 것도 있는데, 신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신이 우주역사를 섭리하는 게 아니라 자유질서에 의해서 스스로 운행되며 우주는시계 태엽처럼 알아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 작정 가운데서 진행되는 연극이고 연출자는 하나님입니다

김지연_ 저는 학교 다닐 때 세계사가 제일 싫었어요. 맨날 싸움질만 하는 것 같아서요. 그런데 구속사 시리즈 5권을 보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됐습니다. 5권은 “역사는 결코 우연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며, 구속사적 경륜을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영원한 언약의 성취를 향하여 진행돼 온 파노라마”라고 했습니다. ‘아! 역사는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고 지지고 볶고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인류를 구속(救贖)하기 위해 진행하신 것이고 사람들은 연기자 역할을 했구나.’하는 생각이 확실해졌어요.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의 작정 가운데서 일어나는 연극의 결과이며 연출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걸요. 예컨대 6·25 전쟁 때 유엔군으로 16개국이 참전한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의 결과임을 확신하게 됐죠.

강명선_ 성경의 창조 원리를 과학이론으로 이해하려는 노력들이 있습니다.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성경 스스로가 이미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성경적 논리에는 되려 소홀해지기 쉽습니다. 그런 맹점을 일깨워주고 있는 게 구속사 시리즈이지요. 족보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창세기의 족보가 숫자로, 기원 전(B.C.) 4천년 전까지 정확히 계산되는 것을 보고 모두들 놀라지 않았습니까. 인물, 시간, 장소가 정확히 적시된 역사의 기록이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설명하고 있고, 여기에 집중해 보면 이동 경로까지 그려집니다. ‘설마’하며 믿지않고, 아예 설화쯤으로 여겨와서 그렇지, 상고(詳考)해서 보면 성경이 세세한 사실들을 일일이 적어 증거하고 있음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죠.

송인호_ 아무리 세상적으로 거창한 일이라 해도 구속 역사와 상관없는 일은 사라지고,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주의 뜻을 위해 하면 우리에게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저마다의 개인사(個人史)도 구속사적 관점에서 하나님에 주파수를 맞춰 진행되면 그것이 구속사가 될 수 있다는 원리입니다. 구속사 시리즈 5권은 개인적인 신앙의 삶을 사는 데 있어서 왜 구속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지를 얘기해 줍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적국이 침입해 올 때 항전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입니다만 하나님은 항복을 명령했습니다. 이해하기 어렵지요. 오늘의 사회도 민주주의니, 자본주의니, 시장경제니 스스로의 기준에 준거해서 행동하지만, 믿는 성도는 모든 일을 과연 어떻게 구속사의 큰 틀에서 바라보고 따라갈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 상식과 이성에 반하는 듯 보여도 그것이 구속사적 관점이라면 받아들여야만 예레미야 시대와 같은 죄를 범하지 않겠지요.

개인사(個人史)도 구속사적 관점에서 하나님에 주파수를 맞춰 진행되면 구속사가 될 수 있습니다

사회_ 5권 끝부분에 넉 장의 고대 중동 지도가 나옵니다. 바벨론과 페르시아 제국을 지나 헬라 제국-로마 제국으로 이어지면서 지도의 영역이 서쪽으로 크게 넓어지는 것을 보면서 역사학자 토인비의 ‘문명 중심의 서진설(西進說)’이 떠올랐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가기를 원했지만 성령께서 막는 대목이 성경에 나오잖습니까(사도행전 16장). 말씀의 이동이 문명의 발전 방향을 결정했음을 새삼 느꼈습니다.

김지연_ 말씀이 가면 그 나라는 부강해졌죠. 유럽이 부강해졌다가, 그 후 미국이 부강해지고. 저는 6·25 전쟁 때 개성에서 지냈거든요. 굵은 소금에 밥을 먹으면 진수성찬이었고 콩을 얻어오면 물에 끓여 다같이 마셨던 시절이 있었지요. 지금 우리나라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말씀이 가지 않은 북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월등합니다.



홍봉준_ 당대 최고의 문명을 이룬 건 기독교 국가들이었습니다. 세속사의 관심은 자연이었지만, 기독교의 관심 대상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인간을 통해 섭리를 이루어간다는 생각에서죠. 구속사적 섭리를 이끌 사람을 하나님이 선택한다고 믿는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를 완전히 바꾸기 때문에 그 자체로 굉장한 원동력을 얻게 되지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인생의 진로를 바꾸고 문명을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세속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제국의 쇠망사(衰亡史)’를 쓴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의 멸망원인을 기독교의‘편협함’에서 찾았습니다. 유일신 하나님만 믿는 ‘편협성’이 로마를 멸망하게 했다는 거죠. 이후 세속사는 인간의 이성이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라고 봤습니다. 그러나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인류는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무자비한지를 깨달았고 실존주의, 허무주의, 극단적인 포스트 모더니즘 등에 차례로 빠져들었습니다.
20세기엔 자본이 세속사의 동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과학자 찰스 다윈의 얘기대로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세계가 도래한 셈입니다. 그러나 ‘인간사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이 주관한다.’는게 구속사 시리즈의 주제입니다. 개인이나 조직, 국가의 역량에 의해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거죠. 흥하고 망하고는 신앙과 삶의 태도에 달렸습니다. 그런 인식을 갖기 전과 후, 자기 삶을 이해하는 태도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 세계관을 가진 개인, 조직, 국가가 역사를 추동(推動)하는 탁월한 원동력을 갖게 됩니다. 구속사 시리즈가 주는 자산은, 지금까지는 교회와 세상을 분리해서 보다가 그것을 동일시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에 충실한 개인과 민족은 하나님이 선택해서 책임져 주심을 분명히 깨닫고 믿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려는 소명의식이 인생을 바꾸고 문명을 바꿉니다


강명선_ 세계사를 구속사로 이해하게 된 이후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가까워지고, 더 넓게 바라보게 된 것 같아요. 아담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의 기록은 신,구약 성경에 들어있는데 예수님 이후 지금까지 2000년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그 기록은 왜 없을까,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편지인데 왜 신약까지만 썼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구속사 시리즈 5권의 연대표를 보면서 성경이 쓰인 이후의 기록은 세계사에 다 담겨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 복음이 로마로 가고, 그 이후로 로마가 확장되고, 유럽으로 건너가 유럽이 강성해지고, 이어 남유럽-서유럽을 거쳐 남미, 북미, 아시아로 전달되는 과정 속에 담겨있지 않나 합니다.


김지연_ 하나님은 예언하지 않고는 행하시는 법이 없다 했습니다. 다니엘이 예언한 고대 열강들의 운명은 그대로 이뤄졌지 않습니까. 금, 은, 놋, 철로 된 큰 신상(神像)과 수염소, 수양의 예언까지 실로 한치도 틀림이 없이 그대로 진행됐지요.

홍봉준_ 역사에서는 시대 구분이 중요합니다. 중세의 시작과 마침도 어디부터 어디까지 볼 것인지 관점에 따라 달라지죠. 구속사 시리즈는 역사의 시대 구분을 세속사 기점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했습니다. 아담~노아~아브라함~다윗~예수그리스도까지. 세속사에서 나누는 기준은 문명의 발전이 어떻게 크게 획을 긋는가였지요. 그러나 구속사 시리즈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을 가지고 인류역사가 어떻게 진행돼 왔고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발전되고 전진되어 왔는가를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해 주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어떠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지 방향성을 갖게 해 줍니다.

사회_ 5권 후반부에서 다룬 다니엘의 예언은 마치 다니엘이 직접 설명하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생생하고 분명하더군요. 성경의 예언은 당대에 해당될 뿐 아니라 종말의 때에도 적용되는 확장의 원리가 있는데 지금 이 시대에 그런 것도 주목할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강명선_ 인터넷에 보니 요즘에도 많은 종말적 예언들이 나오고 있던데요.

홍봉준_ 예언과 구속사는 구별돼야 합니다. 히스기야에게 죽음이 예언됐지만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회개할 때 바로 그것을 개변(改變)하시고 기회를 주셨죠. ‘섭리 사관’은 하나님이 목표점을 향해 끌어가는 것이므로 예정을 변경시킬 수도 있고, 요나 선지자 때의 니느웨처럼 예정된 심판에서 구원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거쳐
진행됩니다. 구약 성경에도 점성술가나 거짓선지자의 영역에 속하는 예언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과 구속사적 관점은 잘 구별해야 혼란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사가 복잡해 보여도 하나님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구속 섭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송인호_ 5권을 보고 나니「창세기의 족보」자체의 흐름에도 집중해야겠구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권「창세기의 족보」가 개인으로부터 시작해서 2권「잊어버렸던 만남」부터 가족으로, 민족의 형성으로 확대되더니 5권은 국가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지요. 구속사를 영접한 성도들에게는 내가 사는 현장이 바로 구속사의 현장이고 나라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 라는 걸 알려 줍니다. 권수를 더해 갈수록 무엇인가 또렷해지고 분명해지면서도 두려운 생각 마저 드는 것은, 앞으로 그 호흡이 더 빨라질 것 같다는 생각에서입니다.

홍봉준_ 그렇습니다. 구속사 전반부가 족보를 통해 ‘개인’을 조명하고 있다면 5권은 국가와 민족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민족과 국가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올바른 관계를 갖고 나아 갈 것인가를 보게 했습니다. 개인이나 민족이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면 흥하지만, 언약을 저버리면 망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이는 제국의 흥망성쇠를 통해 드러납니다. 그런 진리는 바뀌지 않아요. 하나님이 주관하시니까요.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며 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상호작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지요.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역사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죠.
하나님은 개인이나 민족에게 호불호(好겘好)가 없잖아요. 일각에서는 기독교의 발달을 민족주의와 섞어서 ‘한국적 선민사상’을 얘기하지만, 성경은 굉장히 냉철합니다. 흥할 것인가 망할 것인가는 점성술사의 관심사일 뿐입니다.

김지연_ “세계사가 복잡한 듯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열강의 군주들과 열국의 역사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전개해 나가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제5권은 이렇게 한마디로 요약해 놓고 있어요.

역사를 바꾸는 힘은 새로운 사상입니다

홍봉준_
역사를 바꾸는 힘은 ‘새로운 사상’이었습니다. 세속사에서도 새로운 사상이 세상을 선도했지요. 근대를 연 것은 인간 중심의 사상이었죠. 성경에서는 모세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이 구약-신약의 두 시대를 구분 짓습니다. 그런데 시대 구분은 무 자르듯 잘리는 게 아니라 일정 기간 중첩돼 나타나죠. 소수이고 이단자라는 핍박을 받다가 새로운 사상이 차츰 일반화 되는 양상으로 역사가 전개되는 거죠. 이른바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라는 것입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갑자기 되는 게 아니라 중첩되는 시기가 있다가 어느 순간에 새로운 것이 진리로 자리잡게 되죠. 천동설과 지동설을 대표 사례로 꼽을 수 있죠.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구속사 시리즈’는 새로운 말씀운동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단순히 우리 교회 성도들이 자부심을 갖는 정도로 그칠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새롭고 보편적인 질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구속사를 원칙대로 믿는 믿음, 이것이 침체된 기독교를 살리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교회시대’를 여는 뇌관이 되었다면 구속사를 공부하고 깨닫는 것이 새로운 말씀 시대를 여는 촉매제요, 뇌관으로 작용해 말씀운동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송인호_ 새로운 시프트(shift)에는 항상 고난이 있어왔는데요.

홍봉준_ 새로운 사상이 오면 그에 뒤따르는 새로운 삶의 양식이 있게 마련입니다. 로마제국이 처음에 기독교와 충돌한 것은 삶의 양식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의 삶이 방탕하고 이기적이며 교만한 것이었다면, 기독교인의 삶은 이타, 자비, 절제, 사랑 등 압도적으로 우수한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죠. 무자비한 박해도 오지만 그런 것까지도 감당 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 있었습니다. 박해하면 할수록 가해자들의 삶과 대비되면서 기독교인의 삶은 빛날 수밖에 없었고 지켜보던 사람들이 기독교적 가치와 삶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정리_이지운 기자, 기록_권일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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