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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과 제1공화국
 글쓴이 : 관리자
 
6월이다. 그래서 6·25를 다루기로 했다. 누군가는 또? 라고 하겠지만, 여기, 매일하기도 부족하다는 세 명의 어른들이 모였다. 6·25 참전용사인 이남진 장로(1929년 황해도 출생)와 이순창 집사(1933년 개성 출생),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경기광주시협의회장인 허창식 장로(1944년 평북 선천 출생). 북한이 고향인 덕(?)에 공산국가의 거짓과 자유국가의 은혜를 다 겪었던 그들의 경험들을 듣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그 시절’의 이야기가 ‘오늘’의 현실과 겹쳤다.



기자: 6월을 맞아 6·25전쟁과 제1공화국에 대해서 듣고자 이렇게 자리했습니다.

이순창 집사: 이런 기회가 반가우면서도 6월을 맞아서, 그 말이 걸립니다. 6·25전쟁. 1950년 6월 25일 시작해서 1953년 7월 27일 끝났다? 그거 아니거든요. 그 전쟁,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종전이 아니라 휴전. 우린 이런 이야기를 6월이 아니라 매일 해야 한단 말입니다, 사실.

허창식 장로: 맞습니다. 대한민국은 전쟁을 잊고 있는 전쟁국가입니다. 종전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있는…흠.

기자: 맞습니다. 계속해서 ‘또’ 할 수밖에요. 전쟁 중에 전쟁 이야기를 어떻게 멈출 수 있겠습니까 .

이남진 장로: 6·25 이전에 북한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또렷이 기억합니다. 북한 정부가 38선이 그어진 직후부터 치밀하게 전쟁 준비를 했다는 사실을요. 꾸준히 38선 부근으로 무기를 실어 내려가던 장면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남자는 청년만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의무적으로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고요. 그들은 여전히 그럴 텐데…, 그 생각하면 요즘의 태평한 젊은이들이 한없이 걱정됩니다.



이순창 집사: 저도 그때 북에 있었기에 기억합니다. 쇠약한 할아버지나 코흘리개 아이가 아니고서는 남자라면 전부 군사로 만들었던 것을요. 그것도 우리나라처럼 입대해서 몇 년, 이렇게 정해졌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장 전쟁이 나면 투입될 수 있는 군인이 될 때까지, 독하고 철저하게 훈련했지요. 남에서는 몰랐고, 지금처럼.

이남진 장로: 당시 저는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서는 검사용지를 들고 빠져 나와서 입대를 간신히 면할 수 있었습니다. 동료들에게는 몸이 시원찮아서 떨어졌다 거짓말을 했고요. 후에 동생이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던 날에는 힘껏 때려서 얼굴을 못 쓰게 만들어 보냈어요. 덕분에 동생도 입대를 면할 수 있었지요. 걸리면 죽는일인데도 그랬어요. 목숨을 걸 만큼 공산국가 아래 군사훈련을 받고 싶지 않았거든요.

기자: 현명하셨네요.

이남진 장로: 그게 아니라, 38선 이북에 살았던 우리네들은 다 알았어요. 이 공산정권은 거짓이라는 것을. 많은 젊은이들이 공산정권의 군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갔어요. 안가면 죽이니까.

이순창 집사: 중요한 건, 그들은 지금도 그렇게 철저히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거란 겁니다. 남한에서 그들을 형제네 동포네 할 때, 그들은 단 한 찰나도 우리를 ‘적’ 그 이상으로 여긴 적이 없을 거란 말입니다.

허창식 장로: 분명 나라 전체가 전쟁 마인드로 무장되어 있을 겁니다. 북에 있을 당시 꼬마였던 저까지 ‘전쟁이 임박했다’는 걸 또렷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처럼. 남한에서는 어른들마저 전쟁 가능성을 외면할 때, 북한에서는 꼬마들까지 전쟁놀이를 했어요. 지금도 그때와 상황이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두렵습니다.

이남진 장로: 우리 모두 1·4후퇴에 남한으로 왔으니, 그럴 수밖에요. 우린 아니까. 공산주의의 새빨간 거짓말, 그 미혹시키는 잔인무도함을.

기자: 참전용사로서 전쟁, 그 현장은 어땠습니까.

이남진 장로: 아……그걸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내 옆에 같이 뛰던 동료가 한 순간 시체가 되고, 흙 색깔이 온통 빨갛고……. 전쟁은 죽는 겁니다. 저는 6사단 수색중대에 있었고, 휴전선이 확정되기 전까지 전방에서 싸웠습니다. 그게 말이지요, 작은 땅덩이 이쪽저쪽에서 대치하면서 땅따먹기 싸움하는 겁니다. 1·4후퇴 때 이산가족이 되어서 그곳에서 서로 적으로 만나는 형제들도 부지기수였어요.



기자: 그게 영화에서 극적으로 만든 상황이 아니었군요.

이남진 장로: 그럼요, 아주 흔했어요, 그런 일. 북한 군대에 끌려가면 북한군, 남한 군대에 소집되면 남한군이 되는 거였으니까. 저 역시 1·4후퇴에 가족과 떨어지고 남한에서 혼자되어 군에 입대했는데, 전쟁 중 이따금 생각했지요. 내 동생이 저쪽 북한진영에 있을 수도 있다고.

이순창 집사: 아, 6·25전쟁은 정말 비극입니다. 당시 18살이었던 저는 태극단을 통해 참전했는데, 태극단이 뭐냐면 6·25전쟁 당시 고양, 파주 지역에서 경의선을 이용하여 서울로 통학하던 일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비밀 지하 구국 결사대입니다. 38선을 맞대고 있는 그 지역이 적의 수중에 먼저 떨어지면서, 공산당의 살인 만행에 치를 떨었던 젊은 학생들이 일어나 적의 보급로 차단, 통신선 절단, 강제의용군 해산 등 적 후방 교란에 많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아, 그런데 태극단에 참여한 3분의 1이 죽는 와중에 나는 살았어요. 도망가서 살았어요. 그래서 그 죄책감으로 평생을 돈벌어 체제운동하자는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전쟁 기록 책자들도, 누구 하나라도 보고 기억했으면 하는 심정으로 만들었고…. 전쟁 끝나고 생업으로 양계장을 운영했는데, 돈버는 이유가 이 나라의 자유 체제를 후손에 물려주는 거였습니다. 바보지 바보. 누가 자기 돈 갖고 하겠어요, 지원 받아서들 하지. 그래도 나는 내 의지를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아 이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는데, 내가 뭘 더 원하겠나, 그런 심정입니다.

이남진 장로: 같은 참전용사로서 충분히 동감합니다. 살아서도, 이 편안한 시대가 지속되어도, 나만 홀로 편히 누릴 수가 없는 무거운 마음이 있습니다.

이순창 집사: 6·25전쟁,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압니다. 지금의 이 자유가 얼마나 큰 기적인지. 그 전쟁은 시작부터 진 전쟁이었습니다. 희망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 전쟁에서 공산정권으로 적화통일되지 않은 것, 그 하나만으로도 이승만 대통령은 영웅으로 대접받아야 합니다.

기자: 하지만 자유를 지키기 위해 미국의 힘에 의지함으로 친미라는 비판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모두: 친미? 세계를 경악시킨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사건이 있는데 무슨 말들이랍니까.
반미를 외치는 사람들 중에, 막상 그런 중대한 순간에서 그리 강단 있게 맞설 수 있는 이가 있을지 참으로 의문스럽습니다.

기자: 포로석방사건이요?

모두: 참 이게 문제입니다. 요즘 젊은이들 몰라요. 우리가 제대로 전해주지 못한 거지요. 들어봐요.
1953년 6월 18일 새벽 0시를 기하여 대통령 이승만은 남한에 수용 중인 북한 및 남한 출신의 반공포로를 석방했습니다. 사실 그해 6월 8일 판문점 휴전회담에서 체결된 ‘포로송환협정’에는 귀향을 원하는 포로를 휴전 성립 후 60일 내에 송환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한·미방위조약 체결 전에는 휴전할 수 없다고 반대하던 이승만은 반공·애국 동포를 북한으로 보낼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며 그 협정을 묵살하였습니다. 마침내 이승만은 포로석방을 단행시켜, 영천 ·대구·상무대·논산·마산·부산·부평 등 7개 수용소에 있던 3만 7,000명 중 2만 7,092명의 반공포로 석방을 21일까지 완료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휴전교섭 파기를 위한 보다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지요. 미군 감시원을 내쫓으면서 강행된 이 사건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어 국제연합군 긴급회의, 영국의 긴급내각회의, 한국전 참전국회의 등을 열게 하였고 휴전을 낙관하던 미국으로 하여금 이승만의 동의 없이는 휴전이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게 하였습니다. 석방포로의 재수용을 요구한 건 오히려 북한이었습니다. 완강히 거절한 건 남한이었고요. 미국이 체결한 협정을 한국이 깨뜨렸기 때문에 한·미간에 갈등이 생겼음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6월 25일 내한한 미국 국무부 차관보 로버트슨과 절충한 끝에 원만한 해결을 보았습니다. 어때요, 그런 이가 어찌 친미입니까.



기자: 그런 결단의 배경, 잘 몰랐습니다.

허창식 장로: 우리가요, 단돈 만원을 빌릴 때도 어디 쉽습니까. 그런데 다른 나라의 젊은 군인들의 생명을 빌렸습니다. 그거, 저는 그분의 기도와 애국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이 아니면 절대 안됐다고 봅니다. 감히 추정컨대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포로석방 같은 결단, 절대 내리지 못했을 겁니다.

기자: 친미가 아니라, 친하나님이었네요.

허창식 장로: 바로 그겁니다. 자신이 열강을 설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거라고 철저히 믿었기에 가능한 배포 아니었겠습니까.

기자: 하지만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이 이끌었던 제1공화국을 생각하면, 뭔가 아쉽습니다. 6·25 전쟁에서 자유를 지켜낸 것 말고 그가 이룬 업적은 무엇이었나. 왜 4·19혁명이 일어나야 했으며, 박정희 대통령이 이뤄낸 경제 성장을 그는 이루지 못했나, 아쉬운 의문이 듭니다.

이순창 집사: 아니, 그 말에 어폐가 있네요. 전쟁이 났던 시대에 나라를 지킨 것 말고 또 무슨 성과가 필요하단 말이지요?

이남진 장로: 게다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게 있어요. 뭐냐면, 4·19혁명 일어난 건 알고, 그 혁명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직위를 내려놓은 사람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란 말입니다.

허창식 장로: 조금 전에 했던 포로 석방사건을 다시 거론하자면, 그 일로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키려고도 했었습니다. 그런 가능성, 대통령이 몰랐겠습니까. 그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대통령 직위가 아닌 대한민국의 자유였습니다. 쿠데타가 일어난 나라는 많지만, 그로 인해 대통령이 바로 직위를 내려놓은 경우는 없습니다. 그분은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분입니다. 그리고 6·25전쟁이라는 최대 혼란기에서 그 기틀을 지켜낸 분입니다. 나라가 없는데 나라 성장이 어떻게 있겠으며,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정체성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제1공화국이 한 일이 없다고 비판한다면, 그건 우리나라의 기틀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 됩니다.



기자: 듣고 보니 젊은 세대의 대표로서 반성하게 됩니다. 자유국가 대한민국에 감사하지 않는 것, 이를 위해 수고한 이들을 기리지 않는 것, 그 모든 것이 노력하지 않고도 누리는 것에 대해서는 감사할 줄 모르는 죄를 짓는 거였네요.

이순창 집사: 우리 기성세대들도 정신을 차려야 해요. 먹고 살기 위해 바쁘게 사느라 역사를 제대로 전해주지 않았어요. 돈만 벌면 뭐합니까. 전쟁 한 번 나면 순식간에 날라 가버릴 것들인데.

허창식 장로: 그래도 이렇게나마 전하게 되는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이승만 대통령을 통해 이 나라를 잡아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대한민국의 중심에 계십니다. 저를 그걸 믿습니다.
대한민국이 얼마나 복 받은 나라인지, 우리나라 국회 속기록의 첫 장이 기도문 아닙니까.

기자: 우리나라는 유교 전통만 깊은 줄 알았는데, 대한민국의 시작은 하나님이었네요. 부끄럽게도 이 또한 몰랐던 사실이었습니다.

이순창 집사: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의 첫 국회가 소집된 날, 제헌의회가 열리면서 이때 임시의장으로 뽑힌 이가 이승만 대통령이었습니다. 그가 제헌의회의 첫 모임에서 단상에 올라 처음 한 말이 “우리는 대한민국 국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첫 국회를 열면서 독립을 주시고 국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시작하여야 합니다. 결코 인간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해방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시작하여야 합니다. 이윤영 의원 나와서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겁니다. 이에 모든 국회의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정말이지, 눈물 나지 않습니까?

기자: 가슴이 뭉클합니다. 몰랐다는 것이 죄스럽습니다.

모두: 앞으로 이런 자리가 더 자주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6·25는 우리가 전쟁을 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날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전히 전쟁 중이라는 사실에 긴장하고 아파하는 날입니다.

마지막으로 단체 사진을 찍으며, 세 어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같은 노래를 동시에 부르셨다. 무찌르자 오랑캐 대한남아 가는데 초개로구나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쳐부수자 공산군 몇 천만이냐 우리국군 진격에 섬멸뿐이다…. 카메라 뒤에서 기자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6·25전쟁은 시작부터 끔찍했으며, 그 절정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우리가 기도를 쉴 수 없는 이유다. 이 역사를 전하는 어른들의 눈빛, 목소리, 손짓, 그 하나하나에 절실함이 배어났다. 미처 다 표현해 내지 못할 것 같아 편지며 각종 자료도 기자에게 전했다. 이 기사를 정리하는 내내, 기자의 손끝은 그 많은 진심의 무게며 온도를 가감하고 있다는 무능함에 한없이 무력해졌다. 아무래도 국회 속기록 첫 장에 남아 있는 기도문으로밖에는 뭐하나 제대로 전할 수 없겠다 .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복을 내리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셔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셨으며 세계인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써 역사적인 환희의 날이 우리에게 오게 하시고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드러나게 하셨음을 믿습니다. 하나님, 아직까지 남북이 둘로 갈린 이 민족의 고통과 수치를 씻어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민생의 도탄이 오래 갈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만 확대될 것이오니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속히 이 땅에 임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독립을 주신 하나님, 이제는 남북의 통일을 주시고 또한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대한민국 국회 속기록 첫 장에서 -

글_ 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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