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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6.25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습니까? (2009년 7월)
 글쓴이 : 관리자
 

당신은 6·25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습니까?

대한민국의 안보의식이 심각한 수준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1950년 북한이 6·25전쟁을 일으킨 지 59년, 200만 명의 사상자와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을 남겼다. 하지만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작년에 실시한 설문조사 중 초등학생 응답자의 35%가‘6·25전쟁을 일으킨 것이 한국’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해 역사교육이 심각하게 왜곡되고 있음을 드러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당시의 상황과 현재의 안보의식을 보여주는 최근 뉴스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기독교인의 역할을 되새겨 보길 바란다.


평양 입성 , 서울 재탈환 선봉장 백선엽 장군
‘내가겪은 6·25전쟁과 한미동맹의 역사강연’

1950년 6월 25일, 서른 살의 육군 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보병학교에 파견돼 교육을 받던 중 북한군의 남침 소식을 들었다. 서울이 함락된 줄도 모른 채 파주에서 사흘 동안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던 백 대령은 뒤늦게 퇴로가 차단된 사실을 알고 눈물을 머금고 철수 명령을 내려야 했다. 낙동강 방어선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후퇴의 시작이었다. (중략)
백선엽(89) 장군은 24일“브래들리 당시 미국 합참의장이 6·25전쟁을‘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시기에 일어난 전쟁’이라고 했지만 나에게도 한국전쟁은 뜻밖의 시기에 일어난 전쟁이었다.”라고 술회했다.
백 장군은“내년이면 전쟁 발발 60주년, 두 세대가 지난 셈”이라며“ 지금 청소년들이 6·25가 어떻게 일어났고 경과했는지 잘 모르는데 학교에서 입시교육만 하지 말고 역사를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젊은 세대에겐 낯선 존재지만 백장군은 6·25전쟁의 주요 순간들을 온몸으로 겪은‘전쟁영웅’이다. 흩어진 1사단을 재규합해 후퇴하면서도 전투를 치러 북한군의 진격 속도를 늦췄다. 낙동강 전선에 교두보를 설치해 1개 사단으로 북한군 4개 사단의 공세를 막아냈다.

다부동 전투에서 전세 역전의 계기를 마련한 것도 백 장군의 1사단이었다. 그 뒤 북진에 나섰던 백장군은 10월 16일 미군을 앞질러 가장 먼저 평양에 입성했던 평양이 고향인 는 “최선두의 전차에 타고 금의환향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일시 후퇴했던 백 장군은 51년 3월 15일 선봉에 서서 서울을 재탈환했다. 그 뒤 휴전회담이 시작되자UN측 대표 5인중 한 명으로 선발돼 회담에 참가했다. 그의 성을 딴‘백(白)야전사령부’사령관으로 지리산 일대 빨치산 토벌 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백장군은“지금도 60년 전 그 폭염 속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전우들의 시신과 역한 냄새를 참아가며 밤낮으로 혈투를 벌였던 용사들의 절규가 떠오른다.”며, “그 때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으리라고 상상도 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중략) …

그는 한미동맹의 소중함을 강조하며 강연을 마쳤다. “60년 전 이름도 모르는 낯선 나라에서 죽어갔고, 지금도 장애로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미국인들이 어떤 심정일까 생각해 본다”며“한·미 두 나라가 혈맹의 역사를 잊지 말고 현실적인 갈등을 잘 해결하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2009년 6월 25일)

잊혀지고 거꾸로 뒤집힌 6·25전쟁의 역사 바로 전해야

오늘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이 전면 남침을 시작한 지 59년째가 되는 날이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뒤의 우리 모습은 그야말로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부러워하는 참상이었다. 세상의 어떤 나라도 이 정도 피해를 당한 사건이 있었으면 100년, 200년 대대손손 기억하면서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다시는 그런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교훈을 되새기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이 나라는 그 엄청난 비극이 있은지 60년도 되지 않아 상당수 국민이 그 전쟁을 언제 누가 일으켰는지도 모르게 되고 말았다. (중략) … 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는 전쟁을 누가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6·25 거꾸로 뒤집기는 지금도 대한민국의 수많은 교실에서 진행 중이라고 봐야 한다. 이대로 가면 6·25를 누가 일으켰고, 그 민족적 고통이 어떠했는지가 자라나는 이 나라의 국민 머리에 완전히 거꾸로 입력될 판이다. 그리고 이미 국제적으로 잊혀진 전쟁이 돼가고 있는 6·25가 피해국인 우리나라에서조차 잊혀진 전쟁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나라가 평화를 지키고 번영한 예는 없다.

(조선일보 2009년 6월 25일)


성인 39.6% “6·25 전쟁발발 연도몰라”
정부, 사이버 교육체계 구축추진


행정안전부가 지난 4월 여론조사 전문기관인‘리서치&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19세 이상 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36.9%가 6·25전쟁 발발연도를 모른다고 대답했다. 이를 연령대로 보면 20대가 56.6%로 가장 많았고, 30대도 28.7%, 40대도 23.0%에 달했다. 6·25전쟁 발발 연도를 모르는 20대의 비율은 행안부가 작년 6월 전국 중·고생 1천1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같은 질문의 조사에서‘모른다’는 응답자 비율(56.8%)과 비슷한 수치다. 작년 피랍 탈북인권연대와 뉴라이트 학술단체가 서울의 초·중·고교 학생 1천 955명(초등 778명, 중등654명, 고등 523명) 등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초등생 35%가“6·25전쟁을 일으킨건 한국”이라고 응답해 6·25전쟁에 대한 실상이 역사교육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음을 방증했다.

(중앙일보 2009년 6월 25일 )

6· 25전쟁 땐 올바른 군함 한 척 없었어’
해군으로 참전 조경래씨 회고. ‘종이배로 나라지켜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미국 군함의 18인치 함포가 불을 뿜자 옆에 있던 대한민국 512정은 마치 포탄을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3만t급 미 군함과 비교하면 512정은 300t급에 불과한 소형 함정이기 때문. 미군함에서 함포사격을 할 때마다 512정은 전복될 듯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고. 항해실에 달린 문은 열리고 닫히는 과정을 반복하다 결국 부서져 버렸다. (중략) …

“인천상륙작전을 하는데도 우리는 대포 한 방 쏘지 못했지. 아니 함정에는 쏠 대포조차 없었고 미군함의 경비만 맡았어. ”6·25전쟁 때 해군으로 참전한 조경래씨(80. 경남 진주시. 당시 일등 수병)는 인천상륙작전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제대로 된 군함 한 척 없었던 우리 해군의 실정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우리 함정은 군함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작아 함정 번호를 앞에 붙여 512정, 513정 등으로 불렀다. 40㎜ 기관포 두 정이 무기 전부였다”고 말했다. (중략) … 이어“6·25전쟁 때 해군은 종이배로 나라를 지키는 큰일을 해냈다”며“그러나 전쟁의 참상이 다시 재발돼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조선일보 2009년 6월 22일)

“갈등 계속 된다면 59년 전 채찍 다시 찾아 올 것”
현 시국 해방 직후와 비슷… 한국교회 정신 바짝 차려야

‘남북한 군인 사상·실종자 250만 명, 민간인 사망·실종자 350만 명, 피난·이재민 370만 명,북한에 의한 학살·납치 20만 명, 전쟁고아 10만 명, 이산가족 1000만 명.’59년 전 발발했던6·25가 한반도에 남긴 상처들이다. 이맘때면 사람들은 으레 TV의 특집 프로그램이나 국기 게양을 통해 당시의 참상을 회고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하지만 6·25에 참전했거나 직접 경험했던 사람들은“6·25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한다 (중략) …

황해도가 고향인 채 장로는 48년 4월에 소위로 임관했다. 그의 첫 부임지는 군인들이 가장 꺼리던 제주도. 그는 4·3 항쟁을 시작으로 영덕 공비 토벌 등 6·25 이전부터 각종 작전에 투입됐다. 이 때문에 채 장로는“6·25는 6월 25일부터가 아니라 해방과 함께 시작됐다”고 말했다. 대구 폭동, 4·3항쟁, 여순반란사건 등이 모두 남한을 인민공화국으로 만들기 위한 북한의 책동이고, 그 연장선에서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채 장로는“지금 북한의 노동당규약이나 사회주의 헌법엔 무력과 내부 혁명을 통해 남한을 공산화시킨다고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며“북한이 변하지 않은 이상 6·25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라고 말했다. 이들은“당시의 극심한 좌·우 이념대립 처럼 지금 한국은 진보와 보수의 대립, 정치권의 분열이 심각하다”면서“이런 때일수록 한국 교회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조금 잘 산다고 그 때의 역사를 망각하거나 진상을 왜곡한다면 언제든지 채찍은 다시 찾아온다.”고 경고했다.

(국민일보 2009년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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