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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반란사건 65주년_ 김형운 예비역 대령
 글쓴이 : 관리자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여수 순천 사건) 65주년, 역사의 산 증인을 만나다_ 김형운 예비역 대령



김형운(86) 예비역 대령은 당시 여수 14연대 인사장교였다. 반란 당일 저녁 장교식당이 집단 총격을 받을 때 민첩하게 식당 내 전등을 끔으로써 현장의 피해를 줄이고 자신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뒤에 반란군에 잡혀가서는 자신이 지휘했던 사병 등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누구도 그러하지만, 14연대 인사계 선임하사였던 반란의 수괴 지창수 상사와 함께 근무했다는 점에서 그는 역사의 특별한 증인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또한 대한민국 육군의 인사·행정의 산 증인이며 역사 자체다. 입대 열흘 뒤부터 인사·행정 업무를 맡은 이후 예편할 때까지 관련 업무를 담당하며 군에 제반 제도를 도입하고, 정비한 당사자이다. 이등병부터 대령까지 한 계급도 거르지 않은 흔치 않은 경력도 있다.
그에게 65년 전 10월 일어났던 여순반란 사건 당시의 상황과 개인사, 군 전반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그는 당시의 긴박한 상황이든, 이후 자신에 관한 일이든 특별한 부연 없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여수 14연대는 어떻게 가게 되셨나요?
1946년 초 광주 4연대 2기(사병)로 입대했어. 뒤에 장교시험을 치렀고. 1948년 7월 29일 육사를 졸업했어. 10일간 휴가 뒤 8·15 정부 수립 및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고 이튿날 출발, 17일 아침 연대에 부임했지. 고향 (전남 고흥)에서 가까운 여수 14연대를 자원했는데, 뒤에 얘기를 들으니 이한림 장군이 자신의 부대로 배치하라고 했다더군. 난 부임하고 바로 중대장이 됐어. 당시 중대장은 3기가 주축이고 5기는 물론 4기도 태반이 중대장을 못 달았을 때인데. 당시는 부대편성 과정 중이어서 10중대까지밖에 없을 때고, 11중대장이 돼서 모병(募兵)을 마치니, 12중대장을 시키더라고. 또 병력을 채워 놓고 육군 경비대 총사령부로부터 지휘검열을 받았는데 표창도 주더라고. 그리고는 바로 인사관으로 발령받았고, 1주일 만에 반란이 터진 거지.

사건 당일은 어땠나요.
박윤식 원로목사의 「근현대사 시리즈」에 자세히 나와 있잖아. 「근현대사 시리즈」를 곳곳에 보냈더니 많은 참고가 됐다고, 고맙다고들 연락이 왔어. 
제주도에서 남로당이 일으킨 4·3 사건 진압을 위해 파견 명령이 내려지고, 제주도 가는 배에 군수 물자 실어 놓고 저녁에 장교 연회를 하던 중 반란군의 집중 총격을 받았어. 실내등을 끄고, 상황을 보는데, 연대장이 “각 부대로 돌아가서 상황을 파악하라”고 지시했지. 연대 본부로 가니 사람이 없어. 인사과로 갔더니 선임하사 하나가 “인사관님 몸 조심하십시오.” 하는 거야.
왜 그러냐고 물으니 “그렇게 됐으니 참견 말고 몸이나 조심하십시오.” 하더라고. 그도 주동이었지. 그 선임하사는 부관부에다 “인사관 잘 모셔라.”하고는 나에게는 “나오지 말고 계십시오.” 라고 떠났어. 서류 창고로 들어가 서류작업 하고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해놓고 나니 연대장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연대장이 부임한 지 1주일밖에 안됐었거든. 반란군들은 새벽 3시쯤 모두 시내로 진격한 상태였어. 아침 무렵 시내로 나가봐야겠다고 하고 나섰는데 부대 안으로 지프 한 대가 들어왔어. 육사 3기인 김지회 (반란군의 핵심 인사) 중대장이었지. “어떻게 살았나? 난 여기 돌아다녀보고 있다. 몸조심 하라.”고 하고는 떠나더라고. 그때는 그가 반란에 가담했다고는 상상도 못했어.

연대장이 임시로 묵던 시내의 여수여관 쪽으로 걸어가는데, 차에 부상자들이 실려 지나가더라고. 박윤민, 김정덕 등 5기생들도 심한 부상을 당했지. 연대장은 없었고. “왜 돌아다니느냐.
위험하다.”고들 하더라고. 가다가 여수 출신 사병을 만났는데, 탈영했다가 복귀했던 아이였어.
영창에 넣었는데, 반성하겠지 하고 3일 만에 내보낸 아이였어. 그 아이가 “지금 배로 여수를 나갈 길이 없다. 저의 고향인 돌산(읍)으로 가면 형님 집에서 배를 구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일단 연대장을 찾기 위해 경리장교를 하던 고흥 출신 동기생의 하숙집을 찾아갔는데, 그 누님이 냉대를 하더라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게 느껴질 정도였어. 그리고 돌산에 갔는데 거기서 체포됐지.

여수 군청에 인민군 사령부가 차려졌어. 인민위원회 간판을 달고 있었고. 가 보니 육사 3기생이 청소를 하고 있더라고. 눈이 마주쳤는데, 입모양으로 ‘쉿’ 하는 거야. 말하지 말자는 얘기지.
경찰서 구치소로 구금됐는데 처음에는 텅 비었다가 뒤에 사람들이 몰려들었어. 뒤에 동기생 하나가 잡혀왔는데, 화장실이 어디냐고 묻기에 가르쳐 줬더니 도망가다 총에 맞아 죽었어. ‘왜 저리 급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 인민위원회 사령부가 구금자들에 대한 심사를 시작하는데, 정병호 상사라고 경위과 선임하사가 인민위원장과 함께 순찰을 돌더라고. 인민위원장이 나를 보더니 “너희는 사람을 데려다 고문하고 애를 먹이지만 우리는 고통없이 보낸다.”고 하더군.



경찰들이 많이 붙잡혀 왔어. 인민위원회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는데 마침 내 중대 신병 출신 두 명이 있었어. 정 상사가 내 쪽을 지키고 있던 그 둘에게 “김형운을 내놓으라.”고 했어. 그러면서 “형운아, 너를 도망가게 해주려는데 (너를 지키는) 저것들이 문제다.”라고 귀뜸하는 거야. 그런데 조금 있다가 내 신병들은 “중대장님을 모시려는데 정 상사가 총살시키려 한다.”고 하는 거지. 내 신병들은 “중대장님 잡혀온 것 보고 따라왔다.”는 거야. 나를 살려주려고.

누구를 믿느냐에 따라 생사(生死)가 갈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군요. 
정 상사는 동향 사람이고, 군대 친구였는데 더 겁이 나더라고. 사실 고향 친구보다 내 중대원들을 더 믿었어. 양측이 실랑이를 하더라고. 정 상사가 ‘같이 나가자’ 하고는 건물 밖으로 나를 데리고 나가서 다른 곳에 총을 쏘아 나를 총살시킨 것처럼 하고는 도망하게 했지. 정 상사도, 신병들도 나를 구해 주려 했기에 살 수 있었지.
알고 보니 정 상사가 여러 명을 살렸더라고. 이제 그만 손을 떼려 하는데 내가 보여서 마지막으로 구해 주려 했다고 하더라고.



여순 반란은 주동자들이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총살을 시켰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어. 사병들은 사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대중 심리 때문에 그렇게 됐지. (4·3 사건으로) 전쟁터가 된 제주도로 가고 싶지 않은 심리도 작용을 했어.
여수 14연대는 광주 4연대 기간(基幹) 요원을 중심으로 창설됐거든. 4연대 1기생인 지창수는 14연대 핵심 기간 요원이었고, 게다가 인사계 선임하사로 14연대를 실질적으로 구성한 연대 인사계 선임하사였어. 실무적인 총책임자지. 사병을 모집하고 교육하고 배치하는 일체의 과정을 주도한 상사로서 하사관들을 장악해나가고, 신병들에게 영향을 끼친 거야. 하사관 조직은 세포 조직처럼 묶여 있었고, 명령 체계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었어. 나와 많은 사람을 구해 준 정 상사 같은 사람까지 합류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래서이고. (정병호 상사는 뒤에 대한민국 육군 장교가 돼 중령으로 예편했으며,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살았다.)

지창수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똑똑한 사람이었어. 일도 잘했고. 키도 크고 생김새도 좋았고. 늘 웃는 외모에 조용하면서도 아랫사람들에게 자상한 측면도 있었던 것 같아. 충분히 호감을 줄 만한 사람이었지. 나한테도 잘했어. 사병으로는 내 선배잖아. 난 4연대 2기인데. 나중에 장교와 상사로 만났어도 예의도 갖추고 잘했어.
(육사 3기 조혁환 예비역 장군이 2012년 7월호 「참평안」과의 인터뷰에서 오일균 소령에 대해 평했던 것과 매우 흡사하다. 오일균은 생도대장으로, 육사생도들을 공산세력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잔인했을까요.
그러게 말이야. 악인의 행태를 보이거나 했던 사람이 아닌데. 모두들 양순하게 봤어. 남들하고 다투고 그런 사람도 아니었거든. 아무튼 당시 지식이 있고 똑똑했던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대한 미련이 아주 강했지. 겪어 보면 아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공산당을 몰라.

다른 주동자들은 어땠나요?
김지회는 머리가 좋고 똑똑한 사람이었고, 홍순석은 순했지.

사건 발생 이후 지창수를 본 적이 있었나요?
못 봤어. 지창수가 여수 시내로 진격한 뒤로는. 이후 토벌대에 쫓겨 지리산으로 들어갔고. 나중에 광주 5사단에 근무할 때 공비토벌 과정에서 김지회의 목이 사단 사령부로 도착했지.
(지창수의 사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 토벌대에 잡혔으나 광주의 유명한 재력가 출신이어서 구명운동에 의해 사형을 면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1950년 6·25 전쟁 초기 처형됐다 (2) 김종갑 소령이 지휘하는 6연대 3대대의 소탕작전 때 죽었다 (3) 1949년 2월 부상을 입고 국군토벌대에 생포됐다가 총살당했다는 등의 주장이 있다.)

탈출에 성공한 뒤로는 어떻게 됐나요?
빠져 나와 보니 여수에는 전부 인민군이 깔려 있었어. 밤에 배를 알선 받아서 정 상사와 함께 고향으로 일단 도피했지. 도착해 보니 고흥은 인민군한테 점령당했다가 대구 6연대가 탈환해서 막 경찰이 복귀해 있더라고. 길을 지나는데 트럭이 서더니 “이 새끼 타.”해서 경찰서로 끌려갔어. 반란군으로 붙잡힌 것이지. 피신했던 경찰서장이 돌아와서는 나를 때리더라고. 뒤에 김종갑 6연대장이 와서 풀려났고, 연대장 전속 부관처럼 같이 다녔지. 학교마다 피의자로 가득했어. 나중에 여수로 와서 경찰서에서 나에게 잘해 주던 여학생 2명과 남학생 1명을 살려야겠다 했는데 보이지 않았어.

처음에 광주 4연대는 어떻게 입대하게 되셨나요?
초등학교 다닐 때 일제시대니까 교장 선생님이 제일 부럽더라고. 15살 되던 해에 보통학교를 졸업했어. 내가 보통학교 6년제 1기야. 면 단위까지 있던 일제시대 ‘신상소학교’. 그 전에는 4년제였지. 교사가 되려 하니까 주변에서 추천을 해줬는데, 보호자 도장이 있어야 한다는 거라. 할아버지가 반대하셨지 “일본은 곧 도망 갈테니 너는 내 밑에서 공부하라” 하시는 거야. 할아버지는 한학을 하셔서 주역 등에도 밝고 풍수,사주,관상 등에 능하셨지. 할아버지는 당시 미국이 패권을 쥐고 있는 당시에도 “장차는 중국이 큰다. 우리도 독립만 되면 큰 나라가 된다.”며 민족과 나라를 강조하셨어.
그러나 선배들은 꼭 신학문을 배우라고 조언했지. 조부가 풍수나 사주, 관상 보러 전국에 불려 다니실 틈을 타 3원을 들고 광주로 도망갔지. 당시 큰 돈이었는데…. 혼자 광주에서 지내다 1946년 초 광주 4연대로 입대한 거야.



입대하자마자 훈련하고 추가로 중대 병력을 새로 모집하고 9일쯤 지났는데, 2중대 인사계가 나더러 연대본부로 가서 행정을 맡으라는 거야. 어려서 할아버지 교육받아 글쓰기를 깨우쳤거든. 그때 연대 사람들은 다 알게 된 거지. 경비대 시절인데, 연대 초창기에 미군 고문관이 7~8명이 있었어. 당시 연대급 이상 행정은 다 미군들이 했어. 연대급에서 행정을 맡은 한국 군인은 상사-중사-이등병 각 1명씩뿐이었어. 대신 통역관이 2명, 타자수가 2명이어서 기안을 해주면 번역해서 공문을 만들었지.
이등병부터 한 계급도 거르지 않고 대령까지 했어. 인사행정 전문이야. 장교 담당을 해서 내가 굉장히 많이 추천했지. 부대에서 육사3기를 선발할 때쯤 육사로 가라 하더라고. “보통학교 출신이고 배운 게 없고, 조선 청년을 지도할 능력이 없어서 못 간다.”고 했어. 그래도 자꾸 권고하기에 “시험제도가 도입되면 가겠다.”고 했지. 그러다 얼마 안 있어 조선경비대 총사령부로 가게 됐고, 정작 내가 시험제도를 건의해서 5기부터 공식적인 시험을 치렀지.



총사령부는 어떻게 가게 됐나요?
사병 시절 광주 4연대로 정일권 씨 (후에 육군참모총장, 국무총리 역임)가 연대장으로 왔다가 서울 총사령부로 가면서 날 데려갔어. 미 군정청이었는데 전부 영어를 쓰는 거야. 연대까지는 공문이 영어이고 그 이하 부대는 한글을 썼지. 당시는 대대는 없었고 연대 밑에 바로 중대가 있던 시절이야. 미군 고문관들이 있었고 번역관들이 있었어.
사령부 숙소가 남산에 있었는데 남산 약수터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보통학교만 나왔는데….’ 하면서 영어문제로 고민을 했어. 광주로 되돌아야겠다고 생각을 하다가 문득 ‘우리도 우리말 행정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건의해 보고 들어주면 남고, 아니면 돌아가리라.’ 생각했지. 상경한 그 주에 정식으로 건의서를 올렸어. “장차 정부가 수립될 때를 대비해 우리말 행정을 준비해야 한다.”고. 그 때 벌써 중사 계급장 달았었지. 인사처 행정교관이었던 소령에게 전달했더니 그냥 집어던지더라고. 나중에서야 정일권 참모장에게 전달됐는데, 나를 부르더니 함께 사령관실로 가자고 해서 함께 갔어. 정일권 참모장이 “각하, 김 중사가 기안한 것입니다.” 보고를 하니 사령관이 “네가 애국자다.”하고 껴안아 주더라고. 그 이후로 전부 한국말로 바뀌었어. 46년도 일이야. 46년도에는 이등병-일등병 다음에 바로 하사-중사-상사로 이어졌어. 상병, 병장은 없던 시절이야. 특무상사가 연대에 있었고. 그러다 1947년 7월에 6기로 사관학교엘 갔지. 포항제철의 박태준 (국무총리 등 역임)이 동기야.

이후 그는 1948년 12월 15일 동기생 240명 중 박태준 등과 함께 10명만이 중위로 특진하게 되는데, 특진한 줄도 모른 채 무고(誣告)로 서대문 형무소에 구속되기도 했다. 이듬해 초 풀려나와 광주5여단에서 6·25 전쟁에 참전했고, 인사·병무행정 업무를  맡아 전역제도와 징병검사제도 등을 도입하고 부관학교, 국방부 경무국 등을 창설하는 등 육군의 인사 및 병무행정 전반을 주도했다. 전역 이후 국정교과서와 민간기업 등에서 근무하다 귀향했다. 지금도 고향 전남 고흥에서 대한민국 무공순천지회 전남지부장으로, 국민생활복지연구회와 고흥장터신문사 등을 통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글_ 이지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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