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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현대사의 아픔이 살아 숨쉬는 지리산을 찾다 (2009년 10월호)
 글쓴이 : 관리자
 


지리산은 우리 민족의 영산이자 광복 이후 현대사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아주 특별한 산이다. 금강산 한라산과 함께 신이 내려와 살았다 하여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꼽히며, 지혜로운 이인이 많이 살았다 하여 지리산(智異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동쪽의 천왕봉(해발 1,915미터)에서 서쪽의 바래봉에 이르는 45㎞의 주능선이 동서로 솟아 경남, 전남, 전북 삼남을 끼고 있으며, 해발 1,000미터가 넘는 봉우리가 20여 개나 된다. 특히 지리산 곳곳에는 은신처가 많아 대대적인 국군의 토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빨치산들이 오래 동안 버틸 수 있었다.

지난 9월 17일, 평강제일교회 교역자 일행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아픔이 살아 숨 쉬는 지리산을 찾았다. 6·25 동란 전후 빨치산(주: 비정규부대, 러시아어 ‘파르티잔(partisan)’에서 비롯된 말로 6·25 전후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공산당 게릴라를 뜻한다)과 국군 토벌부대가 가장 치열한 격전을 벌인 뱀사골 전적 기념관과 여수·순천 반란사건의 주동자 김지회가 사살된 현장, 빨치산 부대인 남부군(주: 1951년 5월 통합 개편된 빨치산의 대규모 군사조직) 총사령관이었던 이현상이 사살된 곳 등을 돌아봤다.
박윤식 원로목사님은 60여년 전 국군 토벌부대로 직접 몸을 던져 싸웠던 몇몇 현장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수천 명의 젊음들이 떼죽음을 당했던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설명하였다.

먼저 일행은 지리산「전적 기념관」에 들렀다. 남원시 산내면 반선리를 들어서서 뱀사골 입구의 다리를 건너면 바로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군경과 빨치산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을 기념하는 유일한 기념관이다. 전적 기념관이 이곳에 세워진 것은 여수, 순천반란사건 주동자였던 김지회(육사 3기)와 홍순석(육사 3기)이 잡혀 총살되었던 장소이고(1949.4.9), 오랫동안 빨치산의 아지트가 됐던 곳이기 때문이다. 빨치산 태동의 시초가 된 여수, 순천반란 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던 국군 14연대 좌익 장병들이 남로당 박헌영의 지령을 받아 제주 4·3 폭동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하며 일으켰다. 폭도로 변신한 반란군의 만행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차마 입에 담기조차 힘들 만큼 잔학한 것이었다. 폭도들은 죽창으로 여경을 찔러 숨지게 하고 순천경찰서장을 군용차에 매단 채 읍내의 비포장 도로를 돌기도 했다.
임신 9개월 만삭의 여인을 처참하게 살해하고 업고 있던 딸까지 무참하게 찔러 살해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동인, 동신)도 순천경찰서 뒤뜰에서 무자비하게 학살당해 순교했다. 여수에서만 반란군은 양민 1,200명을 학살하고 1,150명을 다치게 했다. 소실, 파괴된 가옥이 154동, 행방불명된 사람이 3,500명, 이재민이 9,800명에 달했다. 순천에서는 양민 학살이 1,134명, 행방불명자가 818명에 달했다.

국군 진압군이 들이닥치면서 주동자 김지회, 홍순석은 사살됐지만 남은 반군들이 지리산으로 들어가 이른바‘빨치산’은 정규군 형태의 조직을 갖추게 된다. 이후 6·25 동란이 일어났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로를 찾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들이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에 합류했다. 빨치산은 이후‘남부군’이라는 대규모 군사조직 형태로 개편해 한때 최대 2만 명의 세력을 형성하면서 지리산 주변에 출몰했다. 지리산 일대의 주민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빨치산의 살인·방화·약탈·납치 등의 만행으로 통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토록 피비린내 나는 유혈참극과 주민들의 통곡소리가 어언 10년간 지속됐건만 지금은 깨끗한 현대식 건물 안에 유품으로 고이 간직되어 흔적으로만 남은 것이다.


전시실 유리 상자 안에는 빨치산이 사용했던 무기, 작전도, 기록화, 의류, 책자, 귀순 권고 전단 등이 빼곡이 전시되어 있었고, 벽에는 국군 토벌부대의 단계별 작전 계획이 짜임새 있게 설명되어 있었다. 전적 기념관 밖에는 이승만 대통령의「충혼」이란 휘호가 새겨진 충혼탑이 서 있고 지리산지구 전적비도 세워져 있다(1978.12.30 건립). 충혼탑에는 지리산에서 빨치산을 토벌하다가 목숨을 잃은 민간인·경찰·군인 7,283명의 이름이 소속과 함께 또박또박 새겨져있었다.

일행은 이어 해발 1507미터 노고단 밑 성삼재를 넘어 남부군 총책 이현상이 죽은 장소와, 지리산 쌍계사를 지나 의신리에 있는「지리산 역사관」을 차례로 찾았다. 그곳에는 빨치산의 형성 과정부터 이현상의 죽음까지가 상세히 전시돼 있었다. 이현상은 1953년 9월 17일 의신리 빗점골에서 죽은 것으로 확인되는데(당시 49세), 우리 일행이 찾은 날도 9월 17일이었다. 이현상이 죽은 지 꼬박 56년만에 그곳을 찾은 것이다. 명문가에 명문학교 출신의 지식인이지만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젊은 시절부터 공산당 활동을 했던 이현상은 휴전협정(1953년 7월 27일)이 조인되고 북한 공산당이 남로당 수뇌부인 박헌영과 이승엽의 숙청을 한창 진행될 때 경남도당의 평당원으로 내려 앉고 남부군 지휘권마저 박탈당했다. 월북조차 거부됐다. 이후 20여일 만에 이현상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빗점골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 뒤 빨치산 수뇌부의 맥은 사실상 끊어지고, 빨치산 부대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빨치산이 완전히 토벌된 것은 1963년 11월 18일 정순덕이 체포됐을 때였다. 정순덕은 이홍이와 남녀 2인조로 활동한 최후의 빨치산이었다. 이홍이는 사살됐고 정순덕은 우측 대퇴부에 총을 맞고 생포됐다. 1925년 4월 17일 박헌영에 의해 조직돼 신생 대한민국의 존립을 뒤흔들었던 남로당, 그로부터 불과 수십 년도 지나지 않아 공산주의의 실체는 거짓말로 가득한 허망한 사상임을 여지없이 드러내면서 수많은 빨치산들은 공산주의에 이용만 당하다가, 끝내는 버림받아 산 속에서 죽어갔다.

오늘 대한민국 국민이
누리는 자유와 평화, 풍요
이 모두가 수천수만의
젊음들이 뿌린 고귀한
피의 값으로 가능했던
것임을…

박윤식 원로목사님은 6·25 동란과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영혼들을 생각할 때 다시는 이 땅에 이런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되뇌었다. 빨치산도 한때 순수했던 젊은이들이었지만 공산주의의 거짓 사상에 속아 넘어가 끝내 젊음과 목숨까지 잃고 말았다며 예수님의 복음이 그들에게 전해졌다면 그런 비극이 없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와했다. 그러면서 비극의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의 후손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해달라고 일행들과 함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오늘날 우리도 힘을 다해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성경 말씀대로 후손들에게 힘써 믿음을 전수해 역사의 비극이 재발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거듭 거듭 강조했다. 일행들은 지리산 방문을 통해 잊혀져 가는 민족적 아픔을 가슴에 새겼고, 하나님께서 구원의 경륜과 섭리 속에 기울어가던 이 나라를 지켜주셨던 산 역사를 확인했으며, 우리가 모르
는 사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수많은 영혼들의 충혼을 마음에 기리게 되었다. 비록 짧은 여정이었지만 또 다른 역사의 산 증인을 세우는 큰 경륜의 여정이었으리라.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9월 18일, 귀경길의 한 지역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방문에 맞춰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태극기가 일행들의 애국 애족의 마음을 한층 더해주었다. 오늘 대한민국 국민이 누리는 자유와 평화, 나 자신이 누리는 안녕과 풍요, 이 모두가 수천수만의 젊음들이 뿌린 고귀한 피의 값으로 가능했던 것임을 모처럼 마음 뜨겁게 감사하며 남은 생애만큼은 애국애족의 삶을 살아가야겠다고 굳게 다짐해 본다.

마지막으로, 지리산 지구 전적비에 새겨진 글을 옮겨본다.
여기 삼남의 지붕에 공산비적이 반거하게 된 것은 1950년 낙동강 선까지 남침했던 북괴군이 우리의 총 반격에 다시 쫓기어 가게 되자, 그 일부 지방 공비와 합류하여 이곳에 숨어들게 됨으로 부터이다.
당시 이들 적도의 세는 2만에 달하였는바 천험의 산세를 이용하여 도량하되, 그 지역이동으로는 의령, 서로는 고창, 남으로는 보성, 북으로는 금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양민의 학살과 납치, 재물의 약탈과 방화 등 갖은 만행을 자행하니, 낮에는 태극기가, 밤에는 적기가 나부끼는 양상이 되었다. 이에, 그해 말부터 이곳 남원을 중심으로, 국군 6개 사단과 2개 독립 연대, 그리고 6개 독립 대대 및 전투 경찰 4개 연대와 7개 독립 대대, 그리고 11개 경찰서의 의용 경찰과 대한청년단 특공대 등이 힘을 모아 이들을 함께 무찔러, 1952년을 고비로 그 세를 꺾고, 1954년에는 조직의 뿌리를잘라 드디어 이를 초멸하였다.
돌이켜 보건대, 그 때 이 평정이 이루어지지 못했더라면 어찌 오늘 이곳 곡창에서 격양가가 메아리칠 수 있었겠는가? 다시금 고개 숙여 그 날의 충혼을 기린다.

글_ 참평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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