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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학도병의 ‘전쟁에서 살아남는 법’
 글쓴이 : 관리자
 

서준석 집사(학도병 출신/6·25 전쟁 중 장교로 임관/월남전 참전/예비역 육군중령)
사람은 절대 날아오는 총알을 피할 수 없다. 총알이 사람을 피해 다녀야 산다는 걸, 6·25전쟁을 통해 알았다. 야간전투 때면, 총알이 빛을 그리며 눈을 향해 날아온다. 꼭 내가 맞을 것 같은데, 희한하게 피해갔다. 포탄도 마찬가지다. 포탄이 나무에 맞으면 파편이 터지는 각도가 훨씬 넓어져 그 피해는 더 크다. 파편이 나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 전우가 죽어나가도 나는 피해갔다. 나는 그 때 ‘엉터리 신자’였지만, 생명은 하나님 손에 있다는 걸 분명히 깨닫게 됐다.

전쟁이 나던 1950년 대학 신입생이었다. 학제의 혼란으로 그 해는 6월에 신학기가 시작됐으니 채 한 달도 다니지 못했다. 고향 대구에서 학도병으로 지원했다. 군악대로 1사단에 배치됐다. 백선엽 장군이 사단장이었다. 백 장군과 함께 대구에서 출발, 평양에까지 입성했다. 백 장군은 그 때도 무시무시한 군인이었다. 참으로 애국자였다. 1951년 1월 4일,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게되자 백 장군은 자신의 직할대를 해체하고 전차공격대대를 구성했다. 나는 대전차 무반동총 사수가 됐다. 백 장군은 임진강에서 배수진을 치고는 전 부대원에게 “죽지 마라, 무조건 적을 쏘아라.”고 했다.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해마다 겨울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평양 대동문 뒤 평남도청 있던 곳에 인민위원회 본부가 차려져 있었고 그 근처 ‘채관리’라는 곳에 교회가 하나 있었다. 평양 입성 후 주일이 돌아와 신앙심이 깊은 3명의 동기생과 함께 교회를 갔다. 신자 중 북한 주민은 거의 없었는데 누군가 스스로를 목사라 소개하고 예배를 주관했다. 평양 체류 두달쯤 뒤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를 해야했는데, 그 목사도 가족을 이끌고 월남 대열에 끼여있었다. 북한 주민의 월남은 미군이 관리했는데 민간인 복장을 하고 월남해 게릴라 부대에 합류했던 인민군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군은 그와 그의 가족을 통과시켜주지 않았다. 내가 옆에서 ‘이 목사가족 만큼은 통과시켜줘야 한다.’고 했다가 한국군 장교로부터 욕만 먹었다. 끝내 그는 넘어오지 못했다. 다시 인민군이 점령 한 그곳에서 그는 어떻게 됐을까. 아마 국군이 평양에 체류하지 않았다면 그는 목사였음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을 지 모른다. 학도병이다 보니 그를 월남시킬 힘이 없었다. 전쟁 중에 장교시험을 치르고 장교가 돼야겠다고 마음 먹게된 가장 직접적인 동기였다.

1·4 후퇴 때 수많은 북의 주민들이 생사를 걸고 남하하려는 걸 보고 공산당이 잘못됐다는 것을 저절로 알게됐다. 전쟁 발발 시점 북한이 남한보다 훨씬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일반 주민들의 생활은 그렇지 않았다.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가난했다. 이미 공산당에 의한 착취가 진행된 것이다. 평안북도로 들어서부터는 거의 거지 수준이었다. 남쪽보다도 더 형편 없었다.



지금의 눈으로 6·25를 보면 안된다. 예컨대 인민군이라 하더라도 전부 공산당원은 아니었다. 전쟁 나던 해 서울대 상대를 쳐서 떨어졌는데 만약 합격해 서울에 남아 있었다면, 인민군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지금도 그 때 시험에 떨어진 게 감사하다.

월남전도 마찬가지다. 통신보급장교로 참전했다. 미군의 보급품은 한국에서는 귀하디 귀한 자원이 됐다. 하다못해 탄피가 그랬다. 탄피의 주재료인 황동(黃銅)은 정말 귀했다. 귀국하는 부대는 귀국 직전 허공에다 대고 사격을 하곤 했는데, 그 황동을 챙겨가기 위해서였다. 한번은 대량으로 탄피를 귀국선에 싣다 적발됐다. 미군 감독관 앞에서 *채명신 장군이 당사자를 “영창 보내라.”고 지시, 현장을 수습했다. 그러나 미군 감독관이 되돌아가자, “뭣들 하느냐. 얼른 다시 실으라.”고 지시하는 걸 봤다. 개인의 비리? 아니다. 지금의 눈으로 당시를 보면 안된다. 채 장군을 존경한다. 그는 대단한 애국자였다. 이런 애국자들이 아니었으면 오늘은 없었다고 믿는다.
채명신(蔡命新, 1926년~)은 베트남 전쟁 때 파월 한국군 사령관.



제2차 세계대전의 용장으로서 6·25전선에 투입된 미국의 밴플리트 장군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한다.
“내가 오랜 동안 크고 작은 전쟁터를 다 다녀 보았는데, 한국군 같은 ‘독종’은 보지 못했어요. 38선에서 밀리기 시작해서 한강, 수원, 대전, 낙동강 등 전선마다 후퇴를 거듭하는 동안 한국군 패잔병들은,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한 것 같은데, 항상 저희들끼리 새 부대를 편성하여 일선에 다시 보내 달라! 무기를 달라! 고 절규 하는 거야... 당시엔 탱크도 없어서, 나가면 죽는 게 뻔한데... 유럽 전선에서 보면, 어느 나라에서든 패잔병은 도망쳐 초야에 흩어지면 그만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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