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ㅣ SITEMAPㅣCONTACT US
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HOME > 인터뷰 People  
 
   
“어딘가 내 맘을 진정으로 편하게 해 줄 말씀이 있을 텐데” _ 조진춘 장로
 글쓴이 : 관리자
 



조진춘 장로는 2006년 해양수산부에서 공직을 퇴임한 뒤, 국제해운대리점협회 전무로 일하고 있다. 정책에 대해 정부와 해운, 항만업계를 사전에 조율하고, 업계에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개선책을 정부에 제시, 건의하는 가교 역할을 하는 곳이다.
2011년 새해, 조진춘 장로는 예배위원장 직분을 하나님께 받았다. 성도가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시간, 그 시간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질 수 있도록 성전 구석구석을 살피는 손길이 바로 예배위원이다.

언제 하나님을 믿게 되셨나요?
내가 태어난 전남 순천시 주암면은 주변에 송광사, 선암사 등 유명한 사찰이 많은 곳입니다. 교회를 다닐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어요. 아버님은 마흔 세 살에 낳은 막내아들인 저에게 특별히 큰 형님과 더불어 광주로 유학을 보내주셨죠. 그 당시는 고입 시험에 전기와 후기가 있었는데 전기 시험에 낙방을 했어요. 후기로 쓴 곳이 광주 사레지오 고등학교였습니다. 로마 교황청 산하 가톨릭 재단 학교였어요. 학교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미사를 드리고, 성서를 공부하게 됐지요.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한 것은 결혼 후 우리 권사님(부인 김연심 권사)의 인도로 개종하고 교회에 나가면서부터입니다.

우리 교회로 오신 건 언제입니까?
1992년 1월 2일, 교회가 노량진에 있었을 때 신년예배에 참석하고 은혜를 많이 받아 등록하게 됐어요. 기독교로 개종한 후, 참 많은 교회를 다녔어요. 그렇지만, 성경 전체의 맥을 잡을 수 있는 곳은 없더라고요. 성경 말씀에 덧붙여지는 세상 이야기나 경험담은 늘 제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어요. ‘이건 아닌데, 어딘가 내 마음을 진정으로 편하게 해 줄 말씀이 있을 텐데…’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마침 그때, 우연히 알게 된 권사님을 통해 평강제일교회 강동구 고덕지구에서 하는 성경공부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어요. 고덕지구 식구들이 모두 친형제, 자매같이 잘 대해주었어요. 자연스럽게 우리 집은 새 식구들을 위한 성경공부 장소가 되었죠. 전도로 새 식구가 생기면 으레 지구 식구들이 전부 오셔서 교역자님과 함께 성경공부를 했어요. 그 속에서 함께 공부하며 신앙이 성장했죠. 공적 집회는 물론이고, 금요철야예배, 새벽기도까지 빠짐없이 참석했습니다. 고덕동 집에서 노량진에 있는 교회를 거쳐 직장이 있는 종로까지 15km를 누비고 다녔어요.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시간이 생기는데 그때 성경을 많이 읽었어요. 그것이 바로 믿음의 첫사랑이기에 참 잊을 수가 없어요.

직장에서 전도도 하셨다고요?
말씀에 대한 첫사랑이 전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셨어요. 1992년 당시 직장에서 인사 담당자로 재직하면서 신우회 총무도 맡고 있었어요. 그래서 재량으로 당시 유종훈 목사님(현 당회장)이나 이승현 목사님께 신우회 월례예배 때 말씀을 증거해 달라고 부탁드렸죠. 목사님께서 오셔서 말씀도 주시고 기도도 해 주셔서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내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말씀을 주시니까 전도하는 데 힘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함께 일하던 직원들이 12명이었는데 모두 교회를 한 번씩 데리고 왔어요. 교회 한 바퀴 돌고, 식사 대접하고, 작은 선물도 준비해서 드렸죠. 비록 많은 열매로 맺혀지지는 않았지만 한번 평강제일교회에 발을 디딘 모든 분들이 언젠가 이곳을 기억하여 다시 찾을 줄 믿어요.

공직생활에서 기억에 남는 일은요?
1997년 해운항만청 재직 때 사무관으로 승진해서 강원도 동해로 내려가게 되었어요. 금강산 관광 시작을 앞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곳에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부두시설, 터미널, 야적장을 새로 짓는 기획 책임을 맡았죠. 1998년 11월, 금강산 관광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원로목사님께서 금강산 지역 선교를 위해 자주 터미널에 오셨습니다. 기상 이변이나 북한 내부 사정으로 출항이 하루 종일 지연될 때도 있었어요. 그러면 부두 이곳저곳을 설명해 드리고 구경시켜드렸죠. 훗날 이것을 기억하시고 ‘참, 사람이 어눌하게 생겨도 반듯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신앙생활에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자녀로 인해 겪는 어려움은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죠. 작은 아이가 고등학생 때 학교를 잘 다니다가 2학년 무렵 갑자기 다니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사춘기 반항이라고 하기에는 좀 기간이 길었어요. 백지로 답안지를 내고, 매일 결석을 하니 선생님들이 제적시켜야 한다고 해서 졸업도 못할 판이더라고요. 부인은 교회에서 기도로 매달리고 눈물로 날밤을 샜죠. 그런데 우리 아파트 옆동에 남자 교사 한 분이 방 하나를 얻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갑자기 사정이 생기는 바람에 그분이 우리 집으로 옮겨오게 됐어요. 방 하나가 비어 있어서 사정을 봐주는 셈치고 석 달만 있기로 하고 들였는데, 이분이 여섯 달이 넘어도 안 나가는 거예요. 불편하고 화도 났지만 참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선생님이 바로 우리 작은 아이가 다니던 학교의 학생주임이었어요. 그분이 우리 아이의 제적 결정을 막아줘서 무사히 졸업을 할 수 있었죠. 그 후 작은 아이도 철이 들어서 이제는 어엿한 가장이 됐고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죠.

예배위원들이 맡은 일은 어떤 것입니까?
예배위원 직분을 받은 것이 벌써 10년이 되어가네요. 올해는 예배위원장을 맡게 되었어요. 주일에는 1부 예배부터 봉사해야 하기 때문에 아침 6시 30분에 교회에 나옵니다. 45명의 예배위원 가운데 대부분은 2부 예배 준비를 위해 아침 8시 30분에 교회에 옵니다. 한 시간 정도 성전 내, 외부 계단 주변 정리정돈을 먼저하고 경건회를 드려요. 경건회가 끝난 후에는 11시 예배 시작 전까지 부족한 점이 없나를 살피고 성도들을 안내하죠. 예배위원들은 주일예배뿐 아니라 수요예배, 목요 구국예배까지 52주 동안 한결같이 성전을 청소하며 정리하며 성도들이 불편 없이 예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예배위원들이 늘 예배 중심의 생활을 위해 정성을 다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성도님들께 바라는 것은 많은 젊은 일꾼들이 함께 일했으면 좋겠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활기차게 일해야 활력이 돌고 힘이 생기거든요.

“제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공감을 줘야 할 텐데, 도리어 자기 자랑으로 비춰지지는 않을까요?” 하고 염려하는 조진춘 장로. 이름도 빛도 없이, 누구도 보지 않는 곳에서 예배 준비에 충성을 다하는 조진춘 장로와 예배위원들의 충성이 2011년에도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기를 기도한다.



글_김현정 기자


 
   
 




 
 
이인호 박사-역사를 말하다

“강의마다 감동과 충격... 자녀를 평…

최장의 황금연휴에도 쉬지않는 구속…

높고 푸른 말씀, 구속사를 함께 읽는 …

“구속사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 제…

"우리 형규를 통해 영광 받으소서"

잠자는 성도의 집을 짓는 아론팀

부부 무용가의 신앙 고백

친구와의 이별, 내게 남겨진 구속사

2016 하계 대성회 인터뷰: 은혜의 땅의 …

주한미군 부부 나다니엘 댐스, 애나 …

베리트 신학대학원 졸업식 : 말씀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