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ㅣ SITEMAPㅣCONTACT US
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HOME > 인터뷰 People  
 
   
평강 herstory "그 크신 하나님이 날 만나주셨잖아요" 이송자 권사 (2009년 3월호)
 글쓴이 : 관리자
 

그 크신 하나님이 날 만나주셨잖아요
이송자 권사
목요신자. 이송자 권사는 자신이 목요신자였다고 소개한다. 말 그대로 주일 예배도 드리지 않고 목요 예배만 드린 신자였다는 말이다. 드보라 성가대로 찬양을 돌린 지는 33년, 시므온·안나 성가대의 부총무로 봉사한 지는 1년 반이 됐다. 그래서였을까. 교회에 발을 담근 37년이라는 이력의 시작이 ‘목요신자’였다는 이송자 권사의 고백은 의외였다.

“모태신앙이었죠. 하지만 불교집안으로 시집을 가게됐습니다. 물론 어머니의 반대도 컸지만 젊은 혈기에 어디 그런 게 귀에 들어오기나 하나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멀어진 교회. 하지만 영락교회 권사였던 김보옥 권사의 권유로 일석교회(평강제일교회의 전신)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목요 예배는 낮 11시에 드리는 예배. 남편이 출근해 있는 동안만은 자유시간이었기 때문에 누구의 눈치도 없이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굳이 남편에게 교회에 간다는 말을 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편하게(?)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말씀이 들어간 사람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잖아요. 막 나선다기보다 조용조용했던 제가 조금씩 제 생각을 이야기하고, 강해지는 모습이 보이니까 남편이 저의 변화를 눈치채기 시작했죠.”
 결국 이송자 권사는 주일도 지키는 일을 강행했다. 하지만 소심한 성격을 바로 털어버릴 수 없어서 일찍 예배를 드린 후 광고·축도는 받지 못하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집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주일 출근을 하지 않는 남편의 아침밥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당시 설교말씀이 조금이라도 길어질 것 같으면 가슴이 조마조마했단다.

남편의 한 마디 “수고했다”
이송자 권사의 신앙생활은 그렇게 아슬아슬했다. 남편(조봉희 장로)이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쌍수를 들고 환영한 일도 아니기에 조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에서는 전 교인의 간증서를 받았다. 간증이라는 게 그렇다. 동병상련을 느끼지 않으면 그 마음이 이심전심이 될 수 없다는 거. 그래도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처지와 남편을 전도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까지 간절히 담은 마음을 써 냈다. 그런데, 그 간절한 마음이 하늘을 움직였을까. “예수 믿는 사람이 집에 오는 게 싫다”던 그 남편이 복 받은 날, 주일에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 전에 전도를 권할 수 있는 구실이 만들어지기는 했다. 어여쁜 진주 같은 조윤정, 조문영 두 딸에 이어 금쪽 같은 아들 은상이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좋은 선물을 주셨으니까 교회에 기자’며 권했을 때 큰 저항없이 추진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인데 그냥 보낼 수 없잖아요. 혹시라도 중간에 나가버리지 않을까해서 전도사님과 짜고 남편을 성전 맨 앞에 앉히기로 했어요. 그런데, 그 날 글쎄 원로목사님께서 제가 써 냈던 간증서를 읽어 주시는 게 아니겠어요. 그것도 제 마음을 너무나 잘 아셨는지 눈물까지 흘리시면서 정성껏 읽어주셨지요. 남편은 묵묵히 그 간증서를 다 들어주었구요.”
하나님에게 드린 기도문에 함께 거론되는 이름들은 어쩌면 자신의 사생활을 세상에 공개했다고 화를 낼 수도 있다. 하지만 남편은 그렇지 않았다. 이송자 권사에게 전한 한 마디는 “수고했다.”였다. 그 후로 담배도 끊은 남편은 주일을 목숨처럼 지키는 사람이 됐고 출근을 회사로 했다면 퇴근은 교회로 하는 사람이 됐다. 당시 동아제약 차장으로 근무했던 남편은 노량진 교회의 교육관 공사에 성실하게 참여했다. 그렇게 부부가 함께 교회에 다니는 축복을 누리는 현실이 정말로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조봉희 장로는 그렇게 마음을 굳힌 후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있다. 지금 운영하고 있는 ‘참평안 약국’의 문을 열기 전 30분 동안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는다.
기도의 목소리를 들은 약들의 효능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을까.

1982년 6월 드보라성가대가 프랑스 노틀담사원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다.

육신을 입으신 만물보다 큰 하나님
“어렸을 때는 10리, 5리 되는 산길을 걸어서 교회에 다녔는데, 저의 신앙이 많이 약해졌었죠.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하늘이 안 보이는 숲길을 걸으면서도 하나님께 지켜달라며 손에 땀이 나도록 기도했는데, 어느 사이인가 제 마음이 식어버렸던거죠.” 그러다가 듣게 된 하나님의 말씀. 겪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주시는 말씀 하나, 하나가 어쩌면 다 자신의 이야기 같은지 마음의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하나님이 벌레만도 못한 저를 위해 이 낮고 낮은 땅 위로 육신을 입고 나를 만나러 오셨구나.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이 저를 위해 이 땅으로 오셨다고 생각하니 어떻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래서 그럴까. 이송자 권사의 구역장 경력은 무려 30년이다. 구역장 자리가 그렇다. 제 각각의 신앙을 가진 구역식구들의 분량에 맞게 말씀도 전해야 하고 또 어려운 형편도 살펴가면서 기도에 힘써야 한다. 성격상 맞지 않는 식구도 있고, 정말 속을 나누고 싶은 식구도 있지만 누구에게나 같은 분량으로 정성을 쏟아야한다.
“구역장을 하면서 어려운 부탁이 들어올 때도 있어요. 물건을 구매해 달라든지, 보증을 서 달라든지. 그러다보면 서로가 서먹서먹하게 될 수도 있게 되거든요. 그런 일이 생길 때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봐요.”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진리를 가슴에 품고 상대방의 단점을 보기 보다는 더욱더 낮아지는 연습을 하고 있다는 이송자 권사.

이송자 권사는 구역장의 자리가 가장 귀한 자리라고 한다. 처음에는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많이 배우는 자리라고 강조한다. 이송자 권사는 구역예배를 일주일에 세 번 드린다. 금요일에 드리는 구역예배 외에도 직장인을 위해 토요일 오전에 따로 드리고, 그나마 오지 못하는 식구를 위해서는 전화로도 구역예배를 드린다. 찬송가 493장을 즐겨 부른다는 이송자 권사.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 지금 갖고 있는 생명이 죽음에 임박했을 때 조금만 연장돼도 기쁘기 그지 없을텐데, 헌 생명도 아닌 새 생명을 얻었으니 어찌 아니 기쁠 수 있냐고, 그저 감사뿐이라는 이송자 권사. 이송자 권사의 입에서 나오는 찬양은 말 그대로 간증이며 믿음이 되었다.

여호와이레 수양관에서 성극을
준비할 때 분장을 담당했다.
(맨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이송자 권사)

글_참평안 편집팀


 
   
 




 
 
"최고의 성경 번역가" 민영진 박사가 …

터키에서 선교사로 산다는 건

만물을 소생케 하는 약수(藥水) 여주 …

구속사를 전하는 ‘감람나무’

‘2007~2017 여주’에 동행한 국내 성도…

‘2007~2017 여주’에 동행한 해외 성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새신자 부…

하나님을 가장으로 모신 믿음의 4대(…

전 성도의 박수 받은 특별한 칠순 잔…

성경 암송 어린이들, 지금은? (2016년 1…

구속사를 전하는 부부

92세 김계남 권사의 러브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