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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 herstory "언약 성취의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정희 권사 (2009년 2월호)
 글쓴이 : 관리자
 

"언약 성취의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정희 권사는 한 마디로 본인은 시골에서 출세했다고 생각한다. 충남 대천에서 살다가 서울에서 살게 돼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황무지 같은 이 세상에서 ‘달고 오묘한 말씀’의 맛을 알게 돼 인생의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 비바람이 몰아치고, 눈보라가 쳐도 흔들리지 않게 붙잡아 주는 보호막이 생겼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언제부터 하게 됐나요?
결혼 전 20대였을 때죠. 사실 신앙생활이라기 보다는 교회 생활을 먼저 했다고 할 수 있죠. 그 때 충남 대천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름도 생각이 나네요, 이의성 목사님이 그곳으로 부임해 오셨고 그 분의 부인인 김태영 사모가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하나님을 믿어야한다.”며 제 두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죠. 20대 초반에그렇게 교회로 끌려갔는데 가자마자 유치부 선생님을 하라고 해서 많은 부담을 갖게 됐습니다. 말씀도 모르고 신앙도 없던 제가 선생님을 한다는 것이 제 스스로 용납이 되지 않았거든요. 그렇게 3개월 교회에 결석을 하다가 다시 나가서 구체적으로 교회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신앙생활은 언제부터 하신건가요?
구원의 확신 없이 교회생활을 하다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신앙생활을 접었습니다. 하지만 큰 아이를 낳고 나서 많이 아프기 시작했죠. 큰 딸 은경이가 6살 때 제가 악몽을 많이 꿔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교회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새벽에 들리면 아픈 것이 싹 사라졌습니다. 큰 딸 아이가 친구집에서 듣고 온 찬송을 집에서 피아노로 치면 아픈 것이 없어져 찬양의 능력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집안의 반대로 교회에 나가지 못했지만 큰 아이만큼은 교회에 보냈죠. 그 때 아이에게 “네가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엄마가 죽어.”라고 하면서 몰래몰래 보냈고, 딸 아이도 엄마를 위해 교회에 열심히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둘째 딸 미경이를 낳은 후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왜 이렇게 몸이 아프고 시련이 오는지 알지 못하다가 나중에서야 하나님의 징계인줄 깨닫게 된 것이죠. 몸과 마음이 불안하고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어느 교회라도 나가서 목사님을 만나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교회에 발을 들여놓고 싶어도 문턱이 너무 높아 가까이 할 수 없었어요.
그렇게 간절히 하고 싶었던 신앙생활이어서 중곡동의 한 교회를 다니게 됐다. 한편으로 신앙적인 위로도 받고 싶어 장로 직분자의 집으로 이사를 가기도 했는데, 금전적인 거래에서 불투명한 모습을 보고 실망을하고 말았다. 남편에게는 말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끙끙 앓게 됐으니 몸의 병은 더해만 갔다. 그 후 이사 간 곳이 아현동의 한 교회. 출석교회를 물색(?)하던 중 당회장이 그야말로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겨줘 그 때부터 교회생활을 더더욱 열심히 하게 됐다.

당회장이 반겨줬으니 교회에 많은 정이 갔겠어요.
그렇죠. 당회장님 뿐만 아니라 사모님까지 많은 사랑을 해 주셨죠. 그 교회에는 에스더 여선교회, 마리아여선교회, 안나 여선교회 등으로 여선교회 활동이 활발했는데, 저도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그 때 남편도 함께 성가대에 가입해 부부가 애정을 갖고 열심히 교회활동을 했죠. 남편은 2년 후 성가대 총무까지 맡았어요. 신앙에 대한 열정도 끓어올라 삼각산 기도원, 오산리 기도원 등 좋다는 곳은 다 찾아다니고 은사를 다 체험했죠. 하지만 체험신앙은 6개월 이상 못 간다는 말이 있잖아요. 냄비가 끓다가 식어버리는 것처럼 저의 마음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말만 앞세우고 행동으로 신앙의 깊이를 보여주지 않는 권사님들, 세상의 권위를 교회에서도 세우려고만 하는 장로님들, 뿐만 아니었어요. 무엇보다도 제 마음 깊은 곳에 기쁨이 없어서 더더욱 화가 나기 시작하더라구요.
전도부, 성가대 활동을 할 때는 바쁜 가운데 은혜가 충만한 것 같았지만, 뒤돌아서면 공허감만 남았었다. 성경공부를 해도 뭔가 허전했는데 그러던 중에 교회가 그만 둘로 쪼개지는 모습까지 보게 됐다. 그러면서 참목자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졌고 금식기도를 시작한지 3주만에 대성교회(구 평강제일교회)의 집사를 만나게 됐다. 당시 이정희 권사는 교회는 가까운 곳에 다녀야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게 된다. 주일 3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던 이성실 사모의 딸을 만나‘말씀 공부’권유를 받게 됐다. 다니던 교회도 질투와 시기로 이단시비가 있었기 때문에 외부의 눈초리는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그렇게 말씀공부를 시작하면서 교회를 옮기게 되신 건가요?
당시 양금석 선생님댁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인생의 길과 목적이 보이기 시작하는거예요. 그 때부터 녹음하면서 공부를 하고 집에 와서는 다시 녹취를 했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울면서 공부를 했답니다. 나중에는 우리집에서 아현동 교회의 교인 30명이 모여 전도사님에게 공부를 했죠. 율법과 은혜, 초림과 재림….
집이 아현동이었지만 차멀미 때문에 광화문도 가지 못하던 제가 노량진까지 말씀공부만 있다고 하면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는 체질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말씀이 목적이 되는 신앙으로 바뀐 것이죠. 멜기세덱에 대해서도 너무 궁금했는데 제가 다녔던 교회에서는 문자적인 해석만 하던가 아니면 두루뭉실 넘어갔었거든요. 하지만 목사님이 멜기세덱에 대해 말씀해주시는데 가슴 속 응어리가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3년은 무조건 말씀 공부만 하자고 다짐하게 됐죠.

하지만 교회를 옮기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렇죠. 아현동의 교회에서는‘본 교회’에 열심히 다니라고 하는데, 저에게 본 교회는 제 가슴에 와 닿는 말씀을 주는 곳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아현동에 있는 교회의 교역자가 저를 많이 사랑하고 아껴주시긴 했지만, 그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는 거였죠. 제가 확신이 없었으니까. 그래서“대성교회로 유학 간다.”고한 후 목요예배를 드리기 위해 택시를 탔습니다.(당시 목요예배는 오전 11시에 드렸다) 택시 운전사에게“노량진 전화국에 가주세요”하고 말했는데, 운전사가“대성교회 가십니까?”하고 묻는 게 아니겠어요? 그렇게 힘들게 찾아가 드린 예배는 꿀맛이었고 찬양을 부르는 성가대에서는 빛을 보게 됐죠.
그 때 박윤식 목사님은 “10년, 20년 예수를 믿었어도 속아지 고치지 못하면 다 헛 믿은 것이다”는 말씀을 하셨고 그 모습이 바로 이정희 권사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느꼈다. 눈물, 콧물 다 흘리며 회개의 기도를 드렸고 그동안 미루고 미뤘던 교회 등록을 주저없이 해버렸다. 종가집 7남매의 외동딸. 친정 아버지는 하늘이 도와주어야 산다는 말씀을 항상 하셨고 결국 이정희 권사의 신앙에 든든한 후원자가 돼 주기도 하셨다.

신앙의 체험이 또 있으셨다면서요?
네, 대성교회에 오기 전에 다녔던 성동에 있는 교회에서 십자가 제단 밑에 구부리고 앉아 울면서 새벽기도를 할 때였습니다. 너무 추워 코에 고드름이 다 생길 정도였는데, 비몽사몽간에 제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거였습니다. 광야의 거름더미 위에 쓰러져있는 제 모습이었죠. 더러운 것이 머리와 손에도 다 붙어있는데 그런 저
에게 빛으로 사람이 다가와 이끌어주셨습니다. 제 손이 너무 더러워 차마 잡지 못했는데, “가자, 아버지 집으로”라는 음성이 들렸죠. 그 손을 잡고 큰 성으로 들어가 행랑채 같은 곳에서 겉옷을 갈아입었는데 바로 불에 태워지고 하얀 통자로 된 옷을 입게 됐습니다. 그 전에 물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세 번 반복해 제 몸의 때가 다 벗겨지는 모습을 보게 됐죠.
뿐만 아니다 몸은 깨끗해졌지만, 여전히 아픈 머리까지 치유되는 모습을 보게 됐다. 썩은 머리까지 물로 씻겨주시고 또 씻겨 주고 머리 속에서 유리조각과 쇠붙이 같은 것들을 다 빼낸 후 약까지 발라 주는 사랑의 손길을 느꼈다. 그리고 교회 종소리에 정신이 든 이정희 권사는 그 때부터 두통에 시달리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런 신앙적인 체험으로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해 온 이정희권사. 두 딸은 물론이고 아현동의 교회를 떠나지 못하던 남편 차병춘집사를 전도하는 것은 물론, 시어머니에게 까지 구원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떤 기도제목이 있으신가요?
어머니가 오시면 정성껏 섬기면서 “구원 받으셔야해요.”라는 말씀을 자주 드렸어요. 결국 어머니로부터 “네가 믿는 하나님이 참 신이다”는 고백을 듣게 됐죠.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교회에서 장례예배를 드려주셨습니다. 은혜로 생명을 부어주셔서 덤으로 사는 인생이 됐습니다. 큰 아이와 작은 아이 모두 성경 공부를 철저히 시켰죠. 신앙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 경험이 있어서 아이들에게는 그런 것은 대물림하고 싶지가 않았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두 딸 모두 믿음의 대를 잇는 가정으로 결혼을 했습니다.
지금은 언약을 성취시켜야 하는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1절부터의 말씀처럼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살아서 변화 받아 사망을 호령하는 산 역사를 이루고 싶습니다.
2006년부터 마르다 식당에서 봉사하며 십자가의 능력을 붙잡고 나가는 이정희 권사. 전세계가 말씀이 있는 곳으로 몰려온다는 확신을 갖고 끝장을 보는 열심히 믿음을 가꿔가길 기도하고 있다.


글_참평안 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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