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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 모델_ 최훈 성도
 글쓴이 : 관리자
 




“전설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밑바닥에서 뒹굴면서도 아티스트로서의 자긍심으로 버텨왔다. 기타리스트를 천직으로 알고 청춘을 달려왔지만 어느새 머리에 서리가 내렸다. 한눈 팔지 않는 우직함으로 기타를 놓지 않았지만 칭찬보다는 바보스럽다는 핀잔이 뒤통수를 때렸다.
대한민국 록계에서 살아 있는 전설로 통하는 재야 기타리스트 최훈.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숨은 모델이자 한국판 지미 핸드릭스라는 평가를 듣는 그가...(중략) 일찍이 기타에 미친 최훈을 인정하고 응원해 온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제작자 이은과 임순례 감독, 방송작가 구자형 등이 그들이다. 록의 대부 신중현은 그를 가장 아끼는 후배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MBC FM은 최훈을 ‘위대한 한국의 뮤지션’으로 뽑았다. 심지어 그를 모델로 한 뮤지컬과 록 소설이 나오기도 했다.” (스포츠경향 2007년 3월 23일자)




“사람 좋으라고 하는 음악에는 한계가 있어요”


밴드 이름과 영화 제목이 같네요
‘와이키키 브라더스’란 이름은 영화 시나리오에 참여한 이후로 이전에 '믿음소망사랑'이던 밴드 이름을 바꾼거예요. 공연에서 많은 분들이 그 이름을 권했고 또 한 번만 하려던 것이 그 후로 일이 더 바쁘게 돌아가면서 계속 이어졌고요.

록밴드 이름이 ‘믿음소망사랑’이었어요?
17살 때 기타를 잡았고 일찍 밴드를 시작해서 미8군에서 연주 생활을 했어요. 그러다보니 당시의 히피문화를 더 가까이서 접하게 되었지요. 술과 담배로 시작해서 마리화나와 각종 약물까지, 정말이지 죽기 일보직전이었어요. 바로 그때 입대하게 되었고, 군대라는 특수상황이었기에 중독에서 헤어날 수 있었어요. 군대에서 우연히 찾은 교회에서의 첫날, 준비 찬송을 하는데 눈물이 터진 거죠. 정말이지 창피해서 멈추고 싶은데도 그야말로 홍수처럼 쏟아졌었어요. 그때 이후로 마음 중심에 음악 대신 하나님이 들어왔어요. 그리고 제대해서 새롭게 만든 밴드 이름을 ‘믿음소망사랑’이라고 지었지요.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하나가 마음에 들어오면 푹 빠지는 성격이에요.



“하나님의 구속경륜으로 제 삶의 모든 억울함과 화해할 수 있었죠”


군대 전 방황한 얘기가 놀랍네요
지금이야 큰일 날 소리이지만 제가 지금 50대 중턱이니 30년 전 일이잖아요. 그때만 해도 그런 것에 대한 법적 제재가 지금 같지는 않았어요.
당시 저는 삶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찼었어요. 아버지 사업이 실패하면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되었거든요. 음악을 한 것도 남는 시간이 너무 심심해서 하루 종일 기타랑 놀던 것이 시작이었고요.
처음엔 음악이 저를 위로해 주었어요. 자칫 건달이 되었을 수도 있는데 저는 기타 실력을 늘리는 데 몰두했으니까요. 그런데 음악 일을 하다 보니 퇴폐적인 공간으로 이끌어질 때가 많더라고요. 세상에 대한 불만과 호기심 외에 저를 붙잡아 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나중에는 몸이 너무 나빠졌는데도 도저히 끊어지지 않았어요. 저를 군대로 이끄시고 찾으셨던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저는 이미 오래전 약물에 찌든 송장이 되었을 거예요.

신앙인으로서 록 음악 연주자로 산다는 것은 상충되는 일들이 많을 것 같아요
그렇죠. 그래서 음악을 그만둘까도 생각했었어요. 그때 기독교방송에서 한 흑인 가수의 록 가스펠을 듣고는 내가 하는 음악으로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 쓸 수 있겠구나 하는 소망을 얻었어요. 그럼에도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순간은 여전히 많았어요. 유명한 밴드와 함께하는 기회들도 있었지만 갈등 끝에 그만두는 일들도 있었고요. 제가 벗어 던진 과거의 삶을 여전히 반복하고 있는 동료들과 함께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유흥업소에서 일을 할 때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너무나 괴로운 마음에 모든 업소를 그만두고 대리운전을 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세상에서 음악인으로 성공하는 것보다는 하나님 안에서의 삶에 성공하고 싶었어요. 어쩌면 세상의 끝까지 가봤기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세상에서 얻는 자유는요, 사실 구속(拘束)이에요. 벗어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도 놔주지 않더라고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는 지금이 가장 자유롭고 넉넉하지요. 그러고 보면 음악을 한 것 자체가 나란 사람을 구속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救贖) 경륜이었나 봐요. 음악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던 아버지 사업 실패까지, 사실 이런 깨달음으로 모든 제 삶의 억울함과 화해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평강제일교회로 나오시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나요
10년 전 같이 음악 하는 선배인 김경수 집사의 부탁으로 왔어요. 어느 날 청년3부 요셉선교회의 음향 문제를 도와 달라고 했던 것이 시작이었는데 그건 미끼였던 것 같아요. 그 후로는 장애인 선교회 베데스다의 찬양 인도를 하게 되었는데, 너무너무 좋은 거예요. 예배드리는 요일이 바뀌기 전까지 몇 년간 계속 했었는데 무척 소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맡겨진 일들이 좋아서 계속 다니다보니 말씀이 들리기 시작했어요. 이전에는 교회를 다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좋은 말씀인데 저를 향한 말씀은 아닌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지난 10년 사이, 어느새 하나님의 말씀이 저의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어요. 사실 아직도 생활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2년 전부터 십일조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로는 꼭 필요한 것들을 지속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어요. 감사한 일이에요. 참, 또 다른 체험은 담배를 끊은 거예요. 아무리 노력해도 끊어지지 않았는데요, 자연스레 끊어졌어요. 놀라운 건 담배를 끊은 것도 평강제일교회를 다닌 것과 같이 10년이 되었다는 점이에요.



십일조를 드리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그냥 단순해요. 어느 날 문득 신앙생활을 하려면 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후로 계속 한 거예요. 당연한 일이잖아요.

교회에서 ‘아멘 청소년 윈드 오케스트라(구 브라스밴드)’ 에서 기타를 가르치신다고요
제가 할 줄 아는 유일한 것으로 교회 안에서도 조금이나마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니 감사하지요. 지방 공연 때문에 레슨을 못할 때는 아이들이 아쉬움의 문자를 보내기도 해요. 그럴 땐 정말 행복해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음악인으로 사는 많은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조언이 있나요
사람 좋으라고 하는 음악에는 한계가 있어요. 결국은 내가 좋아하는 음악에 진심이 담기고 그래야 행복해지지요. 제 진심의 중심에는 이제 말씀이 있어요. 성공이요?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으니까 당연히 하고 싶지요.
하지만 결국은 행복해야 성공인데 행복하기를 원하는지, 행복해 보이기를 원하는지를 잘 봐야 해요. 저는 강요하고 싶진 않아요. 각자의 그릇과 역량과 주어진 사명이 다 다를 테니까요. 저란 사람이 워낙 보수적인 면이 강해서 더 갈등을 많이 했던 걸 수도 있고요.

록 음악이란 온몸을 흔들며 ‘내 마음이 이래!’ 라고 외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가 그래야 하는 거 아닐까. ‘하나님 아버지, 내 마음이 이래요!’ 라고 목청 다해 스스로의 모든 추악함을 감추지 않고 고백하고 매달리는 것. 3월 새로운 앨범과 함께 더 열심히 도약하려는 최훈 성도와 그의 밴드를 응원하고 기도한다.

글_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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