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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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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티김의 신앙과 음악 이야기
 글쓴이 : 관리자
 



세상에 부러운 게 있습니까?

있어요. 외국 아티스트들이 부러울 때가 아주 많아요. 연주, 편곡, 조명기술, 음향기술 등 모든 여건이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화려하고 정확하죠. 주변에서 “패티김이 온돌방이 아니고, 최소한 다다미에서라도 태어났다면 운명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분들도 있어요. ‘예술인’에 대한 인식이 없던 시절, 너무너무 힘들었지요.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서기까지 정말 비참할 정도였어요. 이미 뉴욕의 카네기 콘서트홀, 호주의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등을 모두 거쳤는데, 한국인이 한국에서 한국 노래 부르기가 이리도 어려울까… 권위의식에서 비롯된 차별의 결과죠. 영국의 엘튼 존 같은 가수는 卿(Sir)이라는 호칭까지 받았잖아요?

보통 사람으로서 부러운 것은 없나요
보람 있었고 흐뭇한 삶이라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히트송도 많고. 8남매인 우리 형제가 다 건강하고 두 딸도 다 잘 자라 주었고 아직 팬들의 사랑이 있구요. 패티김으로서는 대단히 만족하지요. 다만, 개인 김혜자(본명)는 패티김 뒤에 서서 매번 양보하고 손해를 봐야 했죠. 저는 50년 동안 노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노래에 나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들로부터 벽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게 점점 높아져 언젠가 나를 둘렀고 그 안에 혼자 있더라고요. 어마어마하게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살았죠.사람들은 정상에서 별 굴곡 없이 지낸 사람이라고만 생각하죠 정상의 위치를 오래도록 지켜 나가는 일이 얼마나 노력과 끈기가 필요한지는 나 자신 외에는 정말 몰라요. 혼자서 천 명, 삼천 명, 때로는 몇 만 명과 맞서는 일입니다. 모든 눈과 귀가 나 하나만 지켜보고 있지요. 그래서 저는 종종 무대에 서는 일을 링에 서는 권투선수에 빗대곤 합니다. 노래가 한 곡에 3-4분 정도죠. 예컨대 세종문화회관 4,200석을 마주보고 초반에 노래 한두 곡으로 압도할 것이냐, 서로 주고받으며 끌고 가다 결정타를 날릴 것이냐… 승부는 순식간에 납니다. 그게 가수의 삶입니다. 예쁜 옷입고 노래만 잘 부르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팬들의 눈과 귀는 항상가수보다 수준이 높습니다. 얼렁뚱땅 시간만 메꿔서는 안 되죠.



유명인사가 새로 신앙을 갖는 데 대해서는 사회적 관심이 지대하게 마련입니다. 어떻게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까
어머니로부터 시작됐어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의식, 그것이 항상 저를 무겁게 짓눌렀고 지금에까지 이르게 했습니다.그는 어머니에 대한 사모가 각별했다. 지금도 머리맡에 어머니 사진을 놓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마음속으로 인사하고 감사한다고했다.

어떤 분이셨나요
어질면서도 굉장히 강한 성격을 가졌던 분이고 그 옛날 숙명여전을 3년 다니신 엘리트셨죠. 어머니를 생각하면 아침마다 곱게 빗은 머리에 깨끗한 모시 저고리 입고 신문을 보시던 모습이 떠올라요. 말씀은 적으셨지만 한 말씀 하시면가슴에 팍 들어오는 그런 분이셨죠. 아버지는 일본 유학을 하셨지만 제가 노래하는 것을 심하게 반대하셨지요. 어머니가 저를 감싸 주고 두둔해 주시고 후원해 주셨어요. 뚝심이 있고 끈기 있는 저의 성격을 어머니가 잘 아셨어요. 제 정신적 지주셨죠.

어머니와의 약속은 어떤 것이었나요
어머니는 늘 “네 좋은 목소리로 교회에서 찬송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하셨어요. 집에서 가끔 어머니와 찬송가를불렀거든요. 어머니가 먼저 부르시면 좇아서 부르고 부르고… 왜 어머니의 그 바람을 이뤄 드리지 못했는지, 왜 어머니 손을 잡고 교회를 가지 못했는지… 그게 머리를 떠나지 않는 거에요. 언젠가 어머니를 위한 찬송 앨범을 내리라 다짐했고, 그것이 어머니의 소원이었어요. 그것이 한참 뒤에서야 이뤄진 거죠.

그래서 앨범을 만들고 바로 교회에 나오셨나요
아뇨. 사실 음반을 만들고는 “어머니, 저 약속 지켰습니다.”하며 끝내려 했어요. 그런데 찬송 부르다 전도됐습니다. 녹음을 위해서는 노래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많이 듣고 또 연습해야 합니다. 먼저 60~70곡을 추천받아 제 마음에 편한 것으로 14곡을 추렸지요. 차 안에서, 안방에서 몇 개월을 듣고 들었는데…, 멜로디가, 가사가 이렇게 좋구나… 찬송가가 너무나 아름답구나 하는 것을 느낀 거예요. 평강제일교회에서 종종 불렀던 곡 있지요?  “내 영혼이 은총 입어~”.이 찬송을 부르는데 가슴이 콱 막힐 정도로, 눈물이 날 정도로 좋더라고요. 찬송 연습하면서 감동받고 그런 거에요.



그리고 바로 교회를 나오셨나요
아뇨. 못 했어요. 용기가 없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신의 존재를 믿었고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용기가 없었어요.

용기가 없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혼자서 교회를 찾아가기 쉬운 일인가요. 그런데 제 어머니는 그렇게 하셨어요. 참 용기 있으신 분이에요. 어머니는 원래 철저한 불교 신자셨어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아침마다 교회 종소리 들으시면서 반 년 이상 괴로워하셨대요. 그러다 혼자서 그냥 가신 거예요. 동네 교회에. 그리고는 철저한 크리스천이 되셨죠.

사실 저도 한때 많이 방황했어요. 절에도 가 보고 신부님도 수녀님도 만나 보고 유명한 스님을 따로 찾아가기도 했었죠. 그러다가 하여튼 교회를 가야겠다 했는데 어디를 가야 할지도 몰랐고, 우선 용기가 안 났지요. 저를 전도하려는 사람은 참 많았어요. 너무 많아서 늘 “언젠가는 교회를 갈 겁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전도하려 하지 마세요.”라고 말할 정도였어요. 사실 저는 아주 조그맣고 가난한 교회에 다니려고 했었어요.
실제로 패티김은 그런 교회를 많이 찾아 다녔다고 했다. 유명한 목사님도 만나 보고 여러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고 한다.

평강제일교회는 어떻게 오게 되셨나요
마음을 못 잡고 방황하다 한 번 나오게 됐죠. 제 동생이 3~4년 먼저 다니고 있었죠. 그런데 제 동생은 저를 전도하려들지 않았어요. 제가 자존심 강하고 고집이 세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요. 저는 마음이 결정되기 전까지는 누가 뭐래도 요동하지 않는 고집이 있어요. 그래서 손해 보는 것도 많지만요. 동생은 한 주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가더라구요. 제가 교회를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을 보고는 “내가 가는 교회 가 볼래?”라고 한 마디 한 것이 전부였지요. 2004년 5월에 제가 먼저 “나, 교회 나갈 준비됐어.”라고 얘기했죠.



정착하게 된 과정은요
동생 따라 나왔다가 원로목사님을 만나게 됐는데… 목사님하고 저하고 뭔가 팍 맞은 거 같아요. 그래서 계속 나온 거에요. 정말 얼떨결에 평강제일교회 성도가 된 것 같아요. 그런데 교회를 나간다 하니 그렇게 좋아하던 주변 사람 가운데 몇 분이 평강제일교회라는 말을 듣고 걱정을 하는 거에요. 처음에는 주춤했어요. 제 이름이 걸린 일이기도 하니까요. 만약 평이 좋지 않다면 제 직업과 명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그래도 결국은 계속 나오고 있지 않아요? 전 무엇보다 원로목사님의 설교에 진정성이 느껴졌어요. 누구보다 성경 위주였고 상업적이지 않았고요. 직접 와 보니 주변 일부의 얘기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았지요. 종교인들의 질투와 시기가 말도 못할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지요.

인터뷰를 수락하기가 쉽지만은 않으셨겠군요
제가 평강제일교회에 나온 지 벌써 만 6년이 되어 가고 있지 않습니까. 저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시는 것들도 참 많을 텐데. 궁금증을 다 풀어 드리지는 못하더라도 무엇보다 한 마디로“나는 평강제일교회에 나오는 성도다”라는 것을 알려 드리고 싶었어요.

요즘은 어떤 기도를 하세요
기도가 참 어렵더군요. 내 속으로 하는 건데도. 맨 처음에는 ‘하나님’, 하고 부르고는 말문이 막히는 거에요. 기도하다 ‘이런 건 안 되지’하고는내 속으로 지워요. 그리고는 “하나님, 하여튼 제 뜻을 아시겠죠? 알아서 잘 해 주세요.”하는 식이었지요. 그러다 감사로 모든 것이 다 합쳐졌어요. 얼마 전 원로목사님이 하신 “범사에 다 감사. 그 이상 더 좋은 이야기는 없다”는 내용의 설교 있죠? 그 말씀이 뇌리에 박혔어요. 구구절절 ‘잘 되게 해 주십시오.’그런 기도 여태 안 하기도했지만, 이제 ‘감사합니다’로 통일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도 일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까지 내가 열정적으로 노래할 수 있는 거, 건강에 감사하고… 요즘은 감사만 되풀이하게 돼요. 참된 성도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2시간 가깝게 이어진 인터뷰에도 패티김은 전혀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강한 눈빛과 다양한 표정, 제스처로 끝까지 분위기를 압도했다. 그와의 인터뷰 이후, 그를 ‘전도한’ 찬송가가 실로 달리 다가왔다. ‘찬송은 곡조 있는기도’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된 데에 감사한다.

글_이지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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