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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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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의 디바 박수진 (2009년 7월호)
 글쓴이 : 관리자
 



*디바 : 유명한 여성 성악가, 여가수를 지칭하는 말 

‘그 날,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이스라엘 사람 손에 들려진 뿔은 악기인가? 무기인가? 여호수아는 군악대장으로서였나? 군대장관으로서였나?’

박수진 지휘자와의 만남이 새삼 떠올린 물음이다. 뿔이 어떤 역할을 했는가의 문제인데, “찬송가는 전투가”라는 그의 정의를 기준으로 하면 무기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
그는 시종 전투를 강조했다. 그저 말에 그치지 않았다. ‘전투 전문가’로서 고도로 훈련되고 무장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로 ‘신앙은 집중의 훈련’이라는 사실을 순간순간 강하게 느끼게 했다.

찬송과 성가대는 무엇이라 할 수 있습니까?
찬송가는 전투가입니다. 은혜를 찬양하는 부드러운 곡일지라도 그렇습니다. 전투 자세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일 뿐입니다. 전투자의 자세에서 부를 때 엄청난 은혜를 불러오는 찬양의 위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좋은 것을 드릴 수 있는 제사가 되게 합니다. 찬양은 그런 점에서‘길을 닦는 불도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밭 가는 작업이기도 하고요. 밭에 떨어진 씨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말이죠.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사람의 마음 자세는 저마다 다르지요. 찬양은 이 마음들을 하나로 만들 수 있습니다. 강한 것을 부드럽게 만들 수 있는 그런 힘이 있지요. 예배 시간에 찬송 악보는 누구나 들고 있고, 그 위에 콩나물 악보와 가사가 있지요.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어떤 마음으로 부르고 듣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

병사와 군대에도 ‘군기’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영적 전투인 찬송에서의 군기는, 1차적으로는 호흡과 연결됩니다. 이 호흡은 ‘감정’을 유지하는 훈련이기도 합니다. 노래 곡의 길이는 보통 3~5분입니다. 초 다툼의 시간 예술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집중하면서 감정을 유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를 부를 때 끝까지 같은 마음을 갖고 노래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마음 안에 큰 건물을 지을 수도 있지만, 그 건물이 순식간에 사라져 황폐해지는 곳도 마음이잖아요? 의식적 호흡, 작정하고 내쉬는 숨은 달라집니다. 이것은 군대의 제식 훈련과도 같습니다.

호흡을 좀 더 설명해 주신다면?
기본적으로 노래는 ‘성대 1%에 호흡 99%’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리의 빛깔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습니다. 저마다의 성대는 정해진 소리가 있지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습니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호흡을 어떻게 들이쉬고 내뱉는지에 있습니다. 의식하지 못해서 그렇지, 말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절하지 못하면 호흡 곤란을 겪기도 하고, 머리가 어지러워지기도 하지요. 이 호흡이 집중할 수 있게 하고 감정을 유지하게 해 줍
니다. 그러니 호흡을 잘 쓰는 사람이 노래를 잘 하게 됩니다. 오페라 무대에 설 때도 그렇습니다. 가사의 단어와 문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표현하느냐의 문제라는 점에서는 연기자와 다름없죠. 예컨대, 아기를 잃은 어머니의 심정이나, 첫사랑의 마음, 생의 마지막 순간, 은둔자의 처지 등을 표현할 때 감정 훈련이 중요하지요. 기본적으로 시를 곡화해서 만든 것이잖아요? 제일 어렵고 안 되는 것이 이런 훈련들입니다. 무대를 들어가서 나올 때까지 같은 감정을 가질 수 있도록 호흡을 통해 마음을 컨트롤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찬양을 잘 했을 때와 못 했을 때의 마음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오늘 찬양을 잘 했다, 못 했다 그런 것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1대 1 대화가 아닙니까? 결과에 있어 잘하고 못하고는 없습니다. 꼭 찬송가가 아니어도 저에겐 음악 자체가 기도입니다. 무대에서도, 무대 뒤에서도, 객석에서도 늘 저에게는 기도였습니다.
지금껏 늘 긴장하며 노래를 했습니다. 무대에서 힘들고 노래하기 싫을 때도 있지만 서야 합니다. 감기약을 먹고라도 서야 합니다. 내 몸 사정이 이러니 양해해 달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지요. 감당해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로 단련해 왔다는 생각입니다

지난 5월 첫 주부터 4부예배 지휘를 맡으셨는데, 찬양을 할 때와 뭐가 다른가요?
지휘 역시 손만 흔드는 게 아닙니다. ‘기술적인’측면을 얘기하더라도 지휘 역시 호흡입니다. 지휘의 모양은 수없이 많지만, 호흡이 실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지요. 성악과 호흡과의 관계나, 지휘와 호흡과의 관계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가대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정립해 본 적이 없습니다. 혹 음악적 기술이 불필요하다는 얘기냐고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핵심은 ‘곡조 있는 기도’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그는 어려서부터 꿈이 어린이 합창단을 이끄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지휘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교회지휘법’을 익힐 기회도 많았다. 독일유학 시절 오페라단 솔로로서 누린 혜택 가운데 하나가 훌륭한 지휘자들과 개인적인 접촉을 갖는 것이었다.)



신앙은 언제부터인가요?
모태 신앙입니다. 1979년 노량진 대성교회에 어머니와 함께 나왔습니다. 1981년 집안 일로 부산에 내려가게 된 뒤 외할머니가 피난생활을 하며 다닌 교회에 적을 두기도 했지요. 뒤에 부산지교회에 다녔습니다. 개척교회인 만큼 모든 예배의 피아노 반주를 도맡았는데, 주일이면 지하실 교회에 새벽별을 보고 들어가서 밤별을 보고 나왔습니다.

음악과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나요?
4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지요. 노래도 어려서부터 했구요. 목청이 좋았는데 외탁한 것입니다. 어머니가 외할아버지를 닮아 목청이 좋으셨죠. 제가 볼 때 재능으로 보면, 저나 제 동생(박창준 전 지휘자, 성남시립합창단원)보다 저의 어머니가 더 뛰어나셨던 것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반과 학교 대표로 노래를 부르게 됐고, 초등학교 3학년부터 6학년까지 부산시립소년소녀합창단 소속이었습니다. 조직과 규모 면에서 당시 전국적으로 3번째로 활성화된 단체였습니다.
뒤에 진로를 놓고 고민을 많이 했는데, 결국 예술고등학교는 가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원로목사님께 달려가 기도를 부탁하고 하지만, 당시 부산에 있어서 그러지도 못했지요. 어머니가 “기도하는 대로, 열리는 대로 하자.”고 권유하셨고, 그렇게 했지요.
이후 일생을 통해 정말 ‘기도하는 대로 열리는’ 일들이 거듭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은 상황과 여건이 저절로 풀리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이렇고 저렇다고 묘사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분명했다.”고 강조했다. 부산여대 성악과를 입학, 졸업하고 성악가로 활동하면서 ‘넘지 못 할 산들을 넘게 하신’ 신앙적 체험이 넘치고 넘쳐났다고 했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국립합창단에 입단, 6년간 재직했다. ‘지방대’출신으로 입단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거기서도 5년간 솔로를 맡았다. 선배들은 유례가 드문 일이었다고 말했다. 1997년 동아음악콩쿠르, 1998년 중앙음악콩쿠르에서 각각 1등 없는 3등을 하는 등 국내 유수의 음악콩쿠르대회에 입상을 한 것도 넘기 어려운 산이었다. 명문대 출신들이 상을 휩쓸어 가는 풍토에서 1, 2차 예선을 거쳐 3차 본선에 오르기도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대웅 콩쿠르’라고도 하는 한국성악콩쿠르에서 여자대학부 1위를 한 적도 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분명한 신앙적 체험”이었다고 했다. 이 체험은 계속된다.독일로 건너가서 아헨음악대학에서 학위를 따고, 쾰른음악대학에서 오페라 최고 연주자 과정(Konzertexamen)을 이수했다. 음대에서도 최소 6학기를 해야 했지만 3학기 만에 끝냈다. 이 역시 녹록치 않은 일이었다. 동시에 아헨극장에서 2년간 솔리스트로 일할 수 있게 됐다. 전문 소속가수로 계약서까지 썼는데, 객원가수로 일하는 사례가 가끔 있을 뿐, 학생을 정식 채용한 전례가 거의 없었 비자전환도 마찬가지였다. 3년을 학생비자로, 2년을 워킹비자로 체류했는데, 비자 전환도 힘들었고 학생 신분을 유지하며 일하기는 더욱 어렵던 시절이었다. 외국인관광청이 워낙 고압적이어서 하나를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가깝게 지내던 다른 두 유럽 친구들도 결국 하나는 일을, 하나는 공부를 포기했어야 했다. 그는 외국인관광청에 가서 담당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외국인으로서 당신 같으면 공부와 일을 같이 해야 할 때 무엇을 포기하겠느냐? “둘 다하고 싶지 않겠느냐?”는 답이 돌아왔다. “나도 그렇다.”고 했다. 그러고 나니 담당자는 순순히 “공부 열심히 하길 바란다.”며 문제 삼지 않았다. 그 뒤로 관광청을 무시로 편하게 드나들게 됐다.

주변에서 말하는 성악가 박수진의 장단점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약하고 드라마 틱하지 못한’것이 단점인 것 같다고 쉽게 답한다. 파워풀하지 못하다는 뜻이냐고 물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한다. “무대에서 키도 작고, 힘도 독일 사람에 비해 크게 달린다.”고 쉽게 설명해 준다. 장점으로는 편안함과 집중감이 꼽혔다고 했다. 그럼에도 거듭 질문을 이어 갔다. 호흡과 소리, 음성, 감정, 집중… 이해가 갈듯 말듯 손에 잡히지 않아서다. 자세하게 설명하면서도 신앙으로 연결 짓는 일을 잊지 않는다.

소리, 음성도 기호식품 같은 것이라 생각해요.
저마다 매력을 느끼는 목소리는 다르지요. 한국 사람들은 다 노래를 잘 해요. (그렇습니까?)
그럼요.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어요. 일반적으로는 한국 사람들이 민족적으로 흥도 많고 그런 점에서 원인을 찾지만, 전 그렇게만 보지 않습니다. 예컨대, 지금 음악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한국 문화가 세계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은 한국 사람들의 신앙의 역량이 밖으로 표출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내적인, 영적 활성화가 문화를 통로로 드러난다고 보는 것이지요.

유럽에서는 전문적으로 직업적으로 노래하고자 하는 사람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성악도 3D 업종 비슷해졌어요. 땀 흘리고 고달프고 몸쓰는 일에 도전하려는 사람이 줄고 있지요. 꽤 오래된 얘기예요. 신문에서도 심각하게 다루고 그랬어요. 음악의 저변이 무너지고 있다는 기사였어요.
사실 오페라라는 이태리어의 어원에는 작업(work)이라는 뜻도 들어 있어요. 오페라가 힘들어서 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듭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등 이른바‘3테너’이후 그만큼 인기를 끌고 있는 가수들이 눈에 띄지 않는 것도 사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물론 수요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독일, 미국 사람들은 시간 날 때 오페라극장에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주민 수가 일정 이상이면 법적으로 학교, 교회, 극장을 지어야 하지요. 이런 구조 속에서 한국을 비롯한 동양 사람들이 많이 진출하고 있지요.

한국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는 찬양을 하고, 교회 밖에서는 노래방을 가지요. 사회 전체적으로‘도레미파솔라시도’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잖아요? 외국은 안 그래요. 노래방도 없지만 우선 교회를 안 가요. 독일에서는 보통 일생에 교회를 3번 간다고 합니다. 나서, 결혼하고, 죽을 때이지요. 여기에 더해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에 가는 정도입니다. 사실상 교회가 죽어있지요.

음악 자체가 기도라는 음악가. 생활 자체가 기도인 셈이다. 그는 요즘 귀국독창회를 준비 중이다. 광주대 외래교수로 출강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글_이지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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