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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번 10377. 노병이 증언하는 역사의 막전 막후
 글쓴이 : 관리자
 

육사 3기 동기회장 조혁환 예비역 장군



*육사: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로 시작, 1946년 5월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6월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1948년 9월 육군사관학교로 바뀌었다.(위키피디아)

*여수·순천반란사건: “1948년 10월 19일에 일어난 여수·순천 사건은 제주 4·3 사건과는 달리 국군 1개 연대가 순식간에 무기고를 점령하고 반란군으로 돌변, 여수 지방 남로당원들과 합세하여 대한민국 정부에 맞서서 총부리를 돌린 국가적으로 위험천만한 사건이었습니다.…10월 24일 이승만 대통령은 지하공작으로 전국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공산주의자를 단호하게 숙청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했습니다.”(「근현대사 시리즈」 3권 100쪽)


‘군번 10377’.
육사 3기생의 군번임을 말해 준다. 성적도 들어 있다. 3기 입교생 340여 명 가운데 1등의 군번이 10375번이었으니 3등의 것이다. 군번 10377의 주인, 조혁환(曺赫煥) 예비역 장군. 육사 3기 동기회장이다.

군에는 어떻게 들어가셨나요?
먼저 군과의 인연을 좀 말씀해 주시지요. 해방 때 일본군에 있었어.
일본이 패전을 하고 나니 보건국과 상훈국을 제외하고는 모든 군대가 그냥 저절로 해산되더군. 보건국은 귀환 군인을 관리했거든. 내가 있던 연대에 한국인, 대만인 합해서 (식민지국 군인이) 10명이었는데 연대장이 “연락선을 대지 못하니 기다리라.”라는 거야. 해방되고 두 달쯤 지난 10월이 돼서 연락선과 기차 일정이 잡히더라고. 그날 마지막 저녁 회식을 했는데 50세를 넘긴 대좌가 말하기를 “조선은 독립이 된다. 군대도 기술이다.
독립된 조국에 가서 나라 세우는 일에 군인으로 봉사하라.”고 훈시를 하더라고. 그때 군인으로 봉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일본군은 어떻게 가시게 됐나요?
전남 진도가 고향인데 큰 형님이 돈 벌러 일본으로 떠날 때 따라갔어. 15살 때. 거기서 학교를 다니다가, 1943년 징병령이 떨어졌어. 1924년생이 징병1기고, 1925년생이 징병 2기야. 그 무렵 관내를 담당한 일본 형사가 매번 공군 간부후보생 같은 데에 지원하라 하더라고. 전쟁 말기 공군병력이 줄어드니까 공군 특별간부후보생이 많이 필요했던 거지. 사병으로 가면 아무래도 죽기가 더 쉬웠지. 1943년 12월에 육군항공대 시험을 치르고 1944년 3월 입교해서 8월초에 1개 중대 200명을 배치하는데 남방군 사령부로도 가고, 중국으로도 가는데 마지막 12명은 이름을 부르지 않는 거야. 한국인은 나 하나인데. 나중에 중대 인사계가 「시모노세키」에 가게 된다는 거야. 일본 안이니까 ‘그래도 위험은 면했구나.’ 생각했지. 쌍발전투기 비행연대 대공 무선 중계중대였어. 통신연대 레이더 부대인데, 일본은 그때도 레이더 같은 게 있었어. 미제 B29에 맞서는 쌍발전투기와의 대공통신을 중계하는 중대였어. 그런데 400km밖에 탐지가 안 되는 거야. B29가 시속이 900km니까 30분 정도밖에 탐지가 안 되지. (미군의) 폭격 많이 당했지. 일본 국내에서만 왔다갔다 하다 해방 때는 도쿄에 있었어.

귀국 이후 바로 군에 들어가신 건가요?
고향에 돌아왔더니 좌익의 인민위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여기저기 안 좋은 소리가 들려. 그러던 차에 대학교 다니던 친척 형님하고 서울에 들렀다가 군정청으로부터 군 모체가 생긴다는 얘기를 들었어. 1945년 12월이야. 형님은 군사영어학교로 갔고 난 하사관으로 임관하게 됐지 처음에. *광주 4연대로 갔지. 창설요원이야. 1946년 2월초였어.

*광주4연대: 여수순천 반란사건의 불씨가 되는 영암 군경충돌사건(1947년 6월)을 일으킨다. 여순반란 부대인 여수14연대의 모체가 되며 뒤에 여순반란 진압중 4연대에도 내부 반란이 발생한다.

인민위원회는 반드시 나갔어야 했나요?
해방되고 돌아오니 세상은 완전히 여운형의 세상이었어. 조선총독부가 나가고 미군은 늦게 들어왔잖아. 조선총독부가 임시정부를 김성수 씨 같은 지도자들에게 넘기려 했는데, 다들 거절하고, 여운형이 자기가 하겠다고 해서 여운형이 인수한 거지. 군, 면단위까지 다 여운형이 접수했지.
45년 12월에 서울 갔을 때도 완전히 여운형이 장악을 했더라고. 모스크바 3상회의 직후였는데 신탁통치 문제로 난리가 났었어. 처음에는 좌우익이 모두 반대하더니 좌익은 3개월 지나더니 찬탁을 하더라고. 참 내. 농촌에서도 인민위원회에서 매일 저녁 모아놓고 공산주의와 막스 레닌주의 그런 교육을 시켰어. 프롤레타리아니, 부르주아니 농촌의 젊은 친구들까지 모이면 날마다 그런 얘기를 하는 거야. 농사짓는 친구들까지 그러니 나는 대화에 끼이지도 못했지. 이게 무슨 얘긴가 해서 스스로 느끼기에도 멍청이 같았어.



그 정도로 좌익의 힘이 셌나요? 왜 그랬을까요?
1차적으로는 소련의 영향이 컸어. 특히 일제 말기 독립운동 하려면 사회주의 조직에 들어가지 않으면 활동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어. 돈도, 조직도 없었으니까. 소련은 여기에 돈을 대줬고. 그러면서 사상에 물들어간 거지. 공산주의 이론에 혹했던 거야. 마르크스 레닌주의 책이 선풍적인 인기였어. 일본 유학 간 한국 학생들도 다들 그 책을 봤고, 일본 학생들도 그랬거든. 전부 사회주의였어. 난 일하느라 그런 책을 보질 못한 거고.

그런 사회 분위기로 보자면 공산화가 안 된 게 차라리 이상한 것 아닌가요?
6·25가 났잖아
(예?)
6·25가 나면서 공산주의 환상에서 깨어난 거야. 배운 것과는 달리 공산당이 지독했거든. 북한에 점령당한 3개월 동안 그 실체를 보게된 거지. 세상에 벼이삭을 세어가는 걸 보고는 질린 거야. 그러니 ‘일본놈보다 더하다.’는 소리를 들은 거야. 이런 사회가 되면 살 수 없다는 걸 분명히 알게 된 거지. 지금도 감언이설에 금방 속는 건 몰라서 그러는 거야. 역사 알면 그럴 수가 없지.
소련이 70년 만에 망했잖아? 고르바초프가 집권하고 공장 창고가 다 빈 것 보고 나서 다 거짓말인 것 안거야. 노태우 대통령한테 40억 달러 차관 받아갔잖아. 제주도 와서. 공산주의 허망한 거야. 중국은 등소평이 공산주의 경제 버리고 실용주의 노선으로 살려놓은 거야.



육사에는 어떻게 들어가셨나요?
당시 장교가 되는 길은 군사영어학교가 유일했는데 입교 기회가 거의 없었어. 100여 명뿐이었어. 이후 일선 부대에서 시험을 봐서(또는 추천을 받아) 태릉(육사)으로 보내면 거기서 또 시험보고 했지. 육사 1기 응시생 보낼 때 내가 있던 4연대에서는 데모가 났어. 2명이었는데, 불공정했다는 거라. 나중에 보니 주동한 사람들이 전부 다 그 계열(남로당) 사람들이었어. 4연대, 참 데모 많았어. 결국 영암충돌사건 나고 20연대로 바뀌었지. 참 가슴 아프지. 창설 멤버인데. 대구 6연대도 없어지고. 여봐, 그거 알어? 4연대, 14연대 그렇게 사고 난 뒤로 4자 들어간 연대가 없어.

숙군 때 3기가 가장 많이 적발된 이유는 뭘까요.
사관학교 생도대장은 지금도 장성(준장)이 하지? (남로당원이었던)
오일근 생도대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 당시 생도대장은 ‘하늘’이었어. 일상 내무생활에서부터 임관까지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었거든. 물론 당시 교수부장 조병권 등도 상당한 역할을 했지.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졸업 한 달 전부터 하나둘씩 개인면담에 불려가기 시작하더라고. 매일 저녁에. 나중에 숙군 과정에서 밝혀진 일이지만 “너 내무 성적이 나빠서 임관되기 어려워”라고 협박을 했다더군. 그러면 생도들은 임관하게 해달라고 사정을 하게 마련이고, 그때 이름을 적으라고 했는데, 그것이 남로당 가입원서였어. 특히 성적이 좋으면 반드시 불려갔지.

실제로 임관이 안 된 사람들이 있었나요.
수십 명 됐지. 대부분 말 안 듣는다고 쫓겨난 거야. 오일근 등이 집요하게 공산화 작업을 한 결과 대부분 포섭됐고 61명이 숙군 때 걸려들게 된 거지.

성적이 좋았는데, 왜 장군님은 불려가지 않았을까요.
글쎄. (한참 뒤에) 아마 일기(日記) 때문인 것 같아. 생도시절 일기를 매일 쓰게 하고 그걸 정기적으로 검사하곤 했어. 그런 게 하나의 기준이 되지 않았을까. (예컨대 일기의 내용에 따라 포섭대상을 선정하는 등) 일기를 가장 모범적으로 썼던 것 같아. 일본군 시절 매일 습관적으로 일기를 쓰게 해서 일기 쓰는 훈련이 돼있었거든. 동기들이 빌려가기도 하고 그랬어.

생도대장 오일근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키가 크고 몸매가 좋았고 아주 잘생겼고 게다가 똑똑했지. 남자가 봐도 반할 정도의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어. 오일균은 나중에 제주 반란 토벌장교로 제주 9연대에 자원해 가서는 포로수용소를 관리하면서 포로들을 그냥 풀어줬어. 이런 행적들이 뒤늦게 알려져서 사형 당했는데, ‘대한민국 만세’ 하고 죽었다는 거야. 그래서 다들 비겁한 놈이라고 했지.

동기인 홍순석, 김지회는 어땠나요.
동기지만 잘 몰랐어. 눈에 띄는 사람들이 아니었어. 어데 나설 만한 사람들도 아니고. 김지회는 우리가 알기로는 남로당원이었던 광주도립병원 간호원과 연애를 했는데, 그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된 줄 알았어. 그런데 박윤식 목사님의 「근현대사 시리즈」를 보니 함경도에서 내려왔고, 원래 빨갱이였고, 그래서 남로당원 여성하고 가까워진 것으로 기술하고 있더라고. 홍순석은 더 몰라.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어. 그런데 군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랬던 것 같아. 홍순석은 지창수 상사에게 얹혀간 거야. 지창수의 상사 계급으로서는 총지휘가 되지 않으니까.

여순반란사건을 촉발한 것이 군경 갈등이었는데, 당시 상황은 어땠나요?
당시 국군이 생기기 전 여러 설이 있었어. (1) 경찰이 국군으로 재편될 것이라거나 (2) 이범석 장군이 이끌던 민족청년단이 국군의 모체가 될 것이라는 얘기 (3) 국군경비대가 국군으로 편성될 것 등의 말들이 많았지. 그런데 경비대는 당시 경찰한테 천대받고 늘 얻어맞고 그랬지. 지구대마다 그런 일이 흔했어.

당시 경비대 상황은 어땠나요?
미군 방침으로 신병 모집할 때 사상 검증을 못하도록 했어. 신체 건강하면 무조건 경비대에 들어올 수 있게 해줬거든. 그 결과 남로당 출신들이 판을 쳤지. 해방 이후 좌익으로 지명수배를 당한 사람들이 피신처로 우르르 경비대에 들어오기도 했고, 남로당원이 군인 포섭을 위해 군 내부에 침투해 포섭 작업을 벌이기도 했고.

숙군은 불가피한 것이었겠군요.
그랬지. 수사하다 누구 이름만 나오면 끌려가서 두들겨 맞고 했지.

장군님은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모양이죠?
거의 다 불려갔는데, 난 아니야. 동기생들이 운이 좋다고들 해.

억울한 사람들도 많았겠네요.
그랬지. 언젠가 *채병덕 장군한테 직접 들은 얘기야. 6·25 전에 남대문, 서대문 형무소를 순시할 때면 “장군님 저는 아닙니다.”라고 호소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거야. 채 장군은 “3분의 1은 억울한 것 같더라.”고 했어. 동기들 중에도 있었지. 노무현 정부 때 생긴 「과거사진상위원회」가 억울한 사례를 접수받았는데, A라는 동기가 그걸 신청하려 했어. 그때 내가 ‘너는 이미 누명을 다 벗었는데, 굳이 그런 것 필요 없지 않느냐.’했더니, 수긍하더라구.
억울한 사람 많았지만, 그래도 숙군은 정말 잘한 것이야. 숙군하지 않았으면 6·25때 큰일 났을 거야. 대대장, 중대장이 부대를 이끌고 이북으로 넘어가고 그랬잖아. 더 넘어갔으면 전쟁은 끝났어. 그런 상황이면 미국의 지원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지. 숙군에도 공과(功過)가 있는 거야. 잘못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공(功)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어.

그 동기분은 어떻게 누명을 벗었다는 거죠?
다른 동기생 하나가 강원도 10연대 소속으로 오대산에서 인민군 유격대 무장게릴라를 소탕할 때 소극적이었어. 조사 끝에 빨갱이로 판명 나고 파면당했지. 그래서 광주에 머물러 있었는데 6·25가 나고 인민군이 내려왔다가 퇴각할 때 같이 월북을 하더라고.
아까 그 A도 실제로 빨갱이였다면 퇴각 때 월북했을 것 아닌가. A는 아니니까 안 간 거야. A가 살던 동네의 경찰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러니까 보호해 주고 한 거야. 우리는 누가 진짜고 가짜인지 잘 알잖아. 「과거사진상위원회」 활동 결과 중에 엉터리가 너무 많아. 구제돼서는 안될 사람들이 너무 많이 구제됐어.

특무대장 *김창룡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숙군에 공이 탁월했는데, 일반 업무에 손을 대면서 그렇게 됐어. 어쨌거나 동기끼리 그렇게 돼서 참 비애가 컸어. 우리들은.

평강제일교회와는 어떻게 인연이 닿은 거지요?
알지 못했어. (지난 6월 나라사랑 웅변대회에) 「근현대사 시리즈」 저자가 초대한다기에 갔는데 세 가지에 놀랐지. 이렇게 큰 교회가 서울에 있는가 싶었고, 그런 교회에 80 넘은 원로 목사가 집도 없이 교회에서 산다기에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나.’ 하고 놀랐지. 제일 크게 감명 받은 건 애들이 부른 노래(역사가)였어. 듣고 깜짝 놀랐어. 역사와 국가 관념이 확실한 것 보고 좋은 교회라고 생각했지. 성인들이 더 잘 알아야겠다고 생각했어. 나중에 「근현대사 시리즈」를 읽어보니 잘 썼더라고. 내 고향 진도에 초·중·고에도 보내고 주변 사람들에게 150부 보냈어. 민간 학자들이 역사서를 쓰지 않아. 편향된 역사서만 나오는데 가짜로 써. 역사인식이 바로서야 국가관념이 서지.



조혁환 장군은

3사단장을 지내고 1969년 8월 준장으로 예편했다. 당시 18개 사단 가운데 전군지휘검열 등 다방면에서 우수 부대로 선정돼 대통령표창, 국방장관표창 등을 수상했고, 사단이 위치했던 철원 주민들은 주민생활 향상에 크게 기여한 그를 기려 송덕비를 세웠다.
조 장군은 군 생활 초기인 1950년 7월 춘천지구 전투에서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고 왼쪽 팔의 신경이 마비됐다. 왼쪽 어깨를 관통해 폐의 맨 윗부분이 손상되고 굳어졌다. 다리 부상으로 절뚝거리게 된 군인 가운데 장성이 세 명이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사단장은 되지 못했다. 팔을 정상적으로 쓰지 못할 정도의 부상으로, 장성은 조혁환 장군이 유일하다. 1925년생으로 최근 미수(米壽·88세)연을 가졌으며 후진에게 역사를 알려주기 위해 자서전을 냈다.


인터뷰는 나라사랑 웅변대회 참석을 계기로 6·25 특집으로 게재하려 했으나 시기를 한차례 놓쳤다. 관악구 봉천동 자택과 자택 주변의 식당에서 2시간 남짓 2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중요한 순간이면, ‘이봐!’ 하면서 주위를 환기시키며 굉장히 구체적인 수치와 정황 묘사로 당시 상황을 전달하는 조 장군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책으로는 접하기 어려운 역사 그 자체였다. 충분히 다루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글_ 이지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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