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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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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의 자식들은 종려가지 같이 번성하며
 글쓴이 : 관리자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이해서 저는 이번 기회에 평생 일사각오 정신으로 살다 가신, 주기철 목사님의 책,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읽어 보았습니다.

그 책을 읽는 내내 메말랐던 내 눈가에 왜 그렇게 눈물이 흘러내리는지, 시종일관 눈물이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주기철 목사님의 자손들의 기록을 읽으면서, ‘아, 의인의 후손들은 망하는 법이 없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의인의 자손들은 결코 하나님께서 외면하지 않고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받는다는 사실을 제가 친히 보았습니다.

주인공 주기철 목사는 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창원군에서 주현성(朱炫聲)씨의 4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웅천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안북도 오산중학교에 1913년에 진학했습니다.

1917년, 평북 정주 연희 전문학교 상과(연세대학교 분교)에 진학했는데 어렸을 때 앓았던 안질 병 때문에 공부를 못하고 낙향을 했습니다. 1919년 3.1 운동 때 독립 만세 부르고 국기를 만들다가 잡혀서 3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과 매를 맞고 풀려나왔습니다.

1922년, 경남노회 의천서를 받고 평양신학교에 24세에 입학했습니다. 졸업하자마자 부산 초량교회에서 6년(1925-1931), 마산 문창교회에서 6년(1931-1936) 목회 후, 1936년 7월, 40세 되던 해 평양 산정현 교회에 부임했습니다.

1938년 2월 헌당예배 드리기 3시간 전에 평양 경찰서 고등계 형사가 와서 포승줄로 손을 묶어서 구금 시켰습니다. 헌당 예배를 앞두고 당회장 되시는 주기철 목사가 갑자기 구금당했으니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 신도가 2천명인데 말할 수 없는 고생이 많았습니다.

1938년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 문제를 두고, 2차 구속됐습니다.

주기철, 이승훈 목사 몇 사람은 ‘신사 참배는 10계명에 위배되는 죄’라고 주장했고, 그로 인해 신사참배 가결이 되지 않자 일본 경찰, 심지어 헌병까지 동원돼서 구금시켰습니다.

그 당시에 ‘총회적으로 신사 참배가 죄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총회장 홍택기 목사, 23개 노회, 천주교, 감리교는 다 굴복 당했습니다.

1939년 7월, 3차로 경상북도 의성경찰서로 구금당해서, 고문을 받으며 차라리 죽는 게 낫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1939년 7월 3차로 의성경찰서로 7개월 동안 구금되었다가

1939년 9월 달에 4차 연행되어

1939년 12월 19일 목사직 파면, 면직을 당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목사 아니고 이단입니까?

신사 참배 죄가 아니라고 하는 목사들은 오히려 일본 경찰의 옹호를 받고 잘 살았습니다.

그분들이 진리의 종입니까?


1940년 3월 24일, 당회원들이 산정현 교회 집회를 자진 해산시키고, 오정모 사모님과 자녀 네 명을 사택에 있지 못하도록 엄동설한에 추방시켰습니다.

1942년 평양 형무소로 이감 시켰습니다.

그리고 1944년 4월 21일 금요일입니다. 밤 9시, 평양 형무소에서 얼마나 맞았는지, 찢어지고 손, 발톱은 하나도 없고, 뼈만 남은채로 처참하게 순교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이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제1계명인데, 어째서 목사님들은 우상 숭배가 죄가 아니라고 합니까”라고 외치며 신앙을 끝까지 고수하고,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것이 산정현 교회 담임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일사각오(一死覺悟)!”


1931년 9월에 경남 노회 주기철 목사 주동으로 신사참배를 절대 반대한다는 결의서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제 27회 총회장이었던 홍택기 목사를 선두로 해서 총회 산하모든 목사들이 신사 참배를 결정하고, 주기철 목사님을 고발했습니다. 즉 주기철 산정현교회 담임 목사는 일본인들에게 죽음을 당하기 전에 이미 총회장 이하 총회 노회 각 교회, 장로 목사들이 죽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① 평양 평북노회 회장 김일선

1938년 2월 9일, 가장 먼저 시국을 인식하고 전 교인들에게 ‘신사 참배를 해도 죄가 아니다’라고 설교했습니다.

② 같은 해, 총회 산하 노회가 23개 노회가 있었는데, 17개 노회 굵직한 목사님들은 다 동의했습니다.

③ 감리교

1936년 6월 29일 총독부 초청에 양주삼 총리사, 목사 7명 등이 참석하여, ‘신사참배는 국민의 의무이니 누구나 참배할 것이니 구태여 총회에서까지 결정할 것이 뭐가 있느냐?’하고, 1938년 9월 3일 전국 교단에 통고문을 발송했습니다. 그렇게 지시함으로 자진 굴복했던 것입니다.

④ 천주교

1938년 5월 25일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신사참배는 애국심의 발로라는 칙령을 받고, 당시 노기남 주교가 천주교 전국에 통지함으로 또 자진 굴복했습니다.

⑤ 장로교

1938년 27회 총회장 홍택기 목사가 총회를 모아 놓고, 수백 명 목사들 앞에서 일본 고등계 형사 각본대로 결의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한지 금년 63년째입니다.

1944년 4월22일이니까, 해방 1년 4개월 남겨 놓고 먼저 세상 떠났습니다. 햇수로는 7년, 만 6년이 넘습니다. 온갖 고문으로 몸이 찢기고, 손톱, 발톱이 다 빠지고, 하루에도 몇 번씩 기절하면서, 배고픔과 영하 25도의 추위와 싸워야 했습니다.

육신의 고통,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겼지만 친척도 가족도 면회조차 갈 수 없었습니다. 총회 노회에서는 목사직에서 파면시켰고, 이단자로 몰았습니다. 면회 갔다가 교회가 화를 당할까봐 가지도 못했습니다.

온갖 감언이설로 회유했지만 진리의 파숫군으로서 거기에 동의하지 않고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의성 경찰서에서 유치장 안에서 주기철 목사님은 일기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내 말씀을 통해서 기뻐하고 소망하고 편안하게 살지 않았었느냐 그런데, 내가 준 고난의 잔이 힘들다고 나를 모른다고 하겠느냐,

네가 나에 대해서 끝까지 신앙의 정절을 지킬 수 있느냐.”


주기철 목사님 마음에 자문자답한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이 십자가, 주님이 주신 십자가를 내가 피하겠습니까.

주님이 이 다음에 너는 내가 준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 물으실 때에 내가 그때 무슨 대답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때 주님 얼굴 쳐다볼 수 없겠죠. 나는 끝까지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가겠습니다. 오직 나에게는 일사각오만 있을 뿐이라. 오직 예수님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 주님은 나 위해 십자가 고초 당하고 죽으셨는데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주님을 모른다고 하겠습니까. 여기 들어온 것도 주님의 은혜고, 내가 매 맞는 것도 주님의 은혜고, 고백 안하는 것도 주님이 날 지켜 주시고 나를 도와주시고 주님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러한 모진 고문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기 때문에

주님, 이 고난의 가시밭길을 걷겠습니다.”


하루는 오정모 사모님께서 형무소 안에 내용도 모르고 햇솜을 두툼하게 해서 가지고 왔는데 주기철 목사님이 말하기를 “여보, 당신이 나 추울까봐 해와서 고맙지만 그게 아니야. 얼마나 무섭게 패는지 살이 찢어지고 고름 나고 피가 날정도야. 살에 솜이 붙어 찬물을 끼얹으면, 솜바지가 얼어. 그러면 얼어서 뻣뻣해 가지고 붙은 살이 떨어지면 더 아파 죽겠소! 솜바지 가지고 오지 마! 그냥 홑껍데기만 있으면 돼. 매 맞으면 마루에 피 흐르고 쏟으면 되고.”

물과 피가 솜바지에 묻으니까나 이거 떨어질 때마다 얼마나 아픈지 견딜 수가 없다고, 아들 된 장로님이 그걸 듣고 눈물로 고백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고백합니다.

“나는 이 세상을 떠나서 주님을 따라서 가는 이 죽음은 나의 소원입니다. 순교자는 초인이 아닙니다.

다만 주님이 우리를 대속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그 사랑에 대한 감사한 마음밖에 없습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가 납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숨김없이 다 바치면서 주님 따라 가겠습니다.”


주기철 목사 마지막 설교 가운데,

롬 8:18-32 “다섯 가지 나의 기도의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옥중에서 늘 기도하던 다섯 가지 제목인데, 이것이 그의 유언이 되었습니다.

첫째, 살아계신 주님,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두 번째, 장기간의 고난을 끝까지 참고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 번째, 나이 많은 노모를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네 번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옵소서.

설교한 후에 찬송가 197장 큰 소리로 부르고,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 주의 은혜로 대속하여서 피와 같이 붉은 죄 눈같이 희겠네”

다섯 번째, 하나님, 내 영혼을 하나님 손에 부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곧 나의 나라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곧 나의 고향이요, 아버지의 집이 곧 영원한 나의 집입니다.

더러운 땅을 밟던 이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의 황금 길을 걷게 하신 것이 주님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입니다. 나를 온전케 하사 하늘나라의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여 끝까지 주님 향한 일편단심 믿음 변치 않게 해 주시고 내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합니다. 아멘”하고, 그 말을 마쳤습니다.


1944년 4월 21일 밤 9시에 세상을 떠났고, 평양 형무소 교도관들이 리어카에다가 관도 없이 집에 찾아왔는데, 진달래가 다 피었지만 누구 하나 도와줍니까. 따뜻하게 물을 데워 다가 수건으로 몸을 닦는데 전부다 상처고 배가 허리에 붙어 눈뜨고는 차마 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기철 목사님이 지은 노래 ‘서쪽 하늘 붉은 노을’이 있습니다.

1절/ 서쪽하늘 붉은 노을 영문밖에 비치누나/ 연약하온 두 어깨에 십자가를 생각하니/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 옷/ 힘없이 걸어가신 영문 밖의 길이라네

2절/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걸어가신 자욱마다/ 뜨거운 눈물 붉은 피 가득하게 고였구나/ 간악한 유대병정 포악한 로마 병정/ 걸음마다 자욱마다 가진 포악 지셨구나.

3절/ 눈물 없이 못가는 길 피 없이 못가는 길/ 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복락 얻으려면 이길 만은 걸어야 해/ 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

4절/ 아픈 다리 싸매주고 저는 다리 고쳐주사/ 보지 못한 눈을 열어 영생 길을 보여주니/ 칠전팔기 할지라도 제 십자가 바로지고/ 골고다의 높은 고개 나도 가게 하옵소서

5절/ 십자가에 고개턱이 제아무리 어려워도/ 주님가신 길이오니 내가 어찌 못가 오랴/ 주님 제자 베드로는 거꾸로도 갔사오니/ 고생이라 못 가오며 죽음이라 못가오리

아버지의 기도로 아들 주광조씨는 그 하는 사업이 번성하여 지금 영락교회 장로님으로 시무하시면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의인의 자손은 절대로 버림을 당하거나 망하는 법이 없고,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번성하는 큰 축복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시편 37편).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오늘날 한국교회에게 전달하고 있는 그 장면을 믿음으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모든 나무들이 다 불타고, 사라져 없어져도 그 그루터기가 남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기철 목사님의 신앙을 그루터기 삼아 다시 십계명을 가지고, 봄에 묵은 대지 위에 새싹이 나고 순이 올라오듯이, 우리 한국교회가 다시 한 번 신앙의 정절을 지킨 것을 기억해야 겠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신이고, 만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참 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오직 예수만을 섬기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7년 6월 10일 주일 2부 예배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