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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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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의 자손들은 종려가지같이 번성하여
 글쓴이 : 관리자
 
시편 92:7-15, 37:25-26, 신명기 32:7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이해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선열들이 조국을 위해서 흘린 피와 거룩한 희생을 묵상하고 예수 믿는 복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일사각오 신앙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1922년 24세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졸업 후 29세에 목회를 시작했는데 부산 초량교회에서 6년(1925-1931), 마산 문창교회에서 6년(1931-1936)을 목회하고, 1936년 7월, 40세에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했습니다. 1938년 2월, 그곳 헌당예배 드리기 3시간 전에 평양경찰서 고등계 형사가 와서 포승줄로 손을 묶어 구금시켰습니다. 1938년 총회에서 신사참배 가결을 하게 됐는데, 그때 “신사참배는 십계명에 위배되는 죄”라고 주장하다가 2차 구속되었습니다.
1939년 7월, 3차로 경상북도 의성경찰서에 구금되어 7개월 동안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1939년 9월에 4차로 연행되고, 1939년 12월 19일 목사직 파면, 면직을 당했습니다. 그 당시 신사참배가 죄가 아니라고 하는 목사들은 일본 경찰의 옹호를 받으며 쌀 배급도 풍족히 받으며 살았습니다. 이러한 목사들이 십자가의 사람이고 진리의 종들입니까? 주기철 목사님이 정말 이단입니까?
그들은 ‘사신우상에게 절 해도 죄가 아니라는데 왜 고집을 부리냐’며 교단에서 주기철 목사님을 쫓아냈습니다. 1940년 3월 24일 당회원들이 산정현 교회 집회를 폭력으로 자진 해산시키고, 엄동설한에 오정모 사모님과 네 명의 아이들을 사택에서 추방시켰습니다. 1942년 주기철 목사님은 평양 형무소로 이감되었고,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평양 형무소에서 온몸이 찢겨서, 손톱, 발톱은 하나도 남지 않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채 처참하게 순교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이것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음성인데 어째서 목사님들은 우상숭배가 죄가 아니라고 합니까? 성경을 똑똑히 보시오!”라고 외치며, 순교신앙의 길을 걸어가신 주기철 목사님. “신사참배는 십계명의 제1계명에 위배되며 하나님께 대한 배약, 배신이며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이라는 내용이 산정현 교회 주기철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였고, 그는 그 설교대로 일사각오의 신앙을 끝까지 내려 놓지 않았습니다.
1931년 9월, 경남 노회 주기철 목사 주동으로 신사참배를 절대 반대한다는 결의서를 발표한 적이있습니다. 그러나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27회 총회장이었던 홍택기 목사를 선두로 총회 산하 모든 목사들이 신사참배를 결정했습니다. 이것은 주기철 목사가 일본인들에게 죽음을 당하기 전에 이미 총회, 노회, 각 교회의 장로와 목사들이 먼저 죽인 것과 같습니다. 1938년 2월 9일 평양 평북 노회 회장 김일선은 가장 먼저 시국을 인식하고 전 교인에게 신사참배를 해도 죄가 아니라고 설교했고, 같은 해 총회 23개 노회중 17개 노회가 다 이에 동의했고, 감리교, 천주교, 장로교까지 신사참배령에 자진 굴복했습니다. 그 당시 총회 결의의 성명서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기독교 진리에 위해 되지 않은 본의를 이해하고 애국적 국가 의식임을 자각하고, 또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수범 이행하여, 따라서 국가정신 총동원에 참가하며 비상 시국 하에 최후 황국 신민으로서 정성을 다하기로 기합, 우를 성명함”
-소화 13년 9월 10일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주기철 목사님은 신앙의 정절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온갖 고문으로 몸이 찢기고 손, 발톱을 다 뽑히고, 하루에도 몇 번씩 기절하면서 배고픔, 영하 25도의 추위,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기다가, 해방 1년 4개월을 남겨 놓고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감언이설로 회유했지만 진리의 파수꾼으로서 거기에 동의하지 않고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다음은 주기철 목사님 마음에 자문자답한 것입니다. 질문하기를,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내 말씀을 통해서 기뻐하고 소망하고 편안하게 살지 않았었느냐? 그런데 내가 준 고난의 잔이 힘들다고 나를 모른다고 하겠느냐? 네가 나에 대해서 끝까지 신앙의 정절을 지킬 수 있느냐?” 답하기를, “주님을 위하여 이 십자가, 주님이 주신 십자가를 내가 피하겠습니까. 주님이 이 다음에 너는 내가 준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 물으실 때 내가 무슨 대답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때 주님 얼굴 쳐다볼 수 없겠죠. 나는 끝까지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가겠습니다.” 그리고 의성경찰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기를 썼습니다. “오직 나에게는 일사각오만 있을 뿐이라. 오직 예수님만 있을 뿐이다. 우리 주님은 나 위해 십자가 고초 당하고 죽으셨는데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주님을 모른다고 하겠습니까. 여기 들어온 것도 주님의 은혜고, 내가 매 맞는 것도 주님의 은혜고, 고백 안 하는 것도 주님이 나를 지켜 주시고, 도와 주시고, 주님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러한 모진 고문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기 때문에 주님, 이 고난의 가시밭길을 걷겠습니다.” 그리고 또 “나는 이 세상을 떠나서 주님을 따라서 가는 이 죽음은 나의 소원입니다.
순교자는 초인이 아닙니다. 다만 주님이 우리를 대속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그 사랑에 대한 감사할 마음밖에 없습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가 납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숨김없이 다 바치면서 주님 따라 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주기철 목사님이 옥중에서 늘 기도하던 ‘다섯 가지 나의 기도의 소원’(로마서 8:18-32)이 있는데, 이것은 그의 마지막 설교이자 유언이 되었습니다.

첫째, 살아 계신 주님,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두 번째, 장기간의 고난을 끝까지 참고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 번째, 나이 많은 노모를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네 번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옵소서.
다섯 번째, 하나님, 내 영혼을 하나님 손에 부탁합니다. 그리고 사모님이 면회 끝나고 돌아서면서 마지막으로 할 말 없냐고 물으시니 감방이 얼마나 추웠던지 ‘따뜻한 숭늉 한 그릇이 마시고 싶다’고 하시고, “여보, 나 위해 기도해줘. 하나님의 나라, 영광의 나라 나 빨리 갈 것 같아.”라고 하시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곧 나의 나라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곧 나의 고향이요, 아버지의 집이 곧 영원한 나의 집입니다. 더러운 땅을 밟던 이 내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의 황금 길을 걷게 하신 것이 주님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입니다.
나를 온전케 하사 하늘나라의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여 끝까지 주님 향한 일편단심 믿음 변치 않게 해 주시고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합니다. 아멘”하고 그 말을 마치셨다고 합니다. 1944년 4월 21일 진달래 피던 봄에 세상을 떠났고, 평양 형무소 간수들이 관도 없이 리어카에 시체를 실어 왔는데, 온몸이 다 찢기고, 배가 허리에 붙을 정도로 해골이 되어 있고, 입의 가죽이 안으로 기어 들어가 보기 처참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모든 나무가 다 불타고 사라져 없어져도 그 그루터기가 남아 있는 것과 같이 주기철 목사님도 신앙의 그루터기가 되어 십계명을 가지고, 봄에 묵은 대지 위에 새싹이 올라오듯 한국교회의 신앙의 정절을 다시 한 번 지켰습니다. 우리도 그 사실을 기억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깨닫고, 신앙의 정절을 끝까지 지킬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2007년 6월 10일 주일 2부 예배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