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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년을 맞아 (2010년 4월호)
 글쓴이 : 관리자
 

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년을 맞아  
신명기 32:7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내 시신을 국내에 옮기지 마라. 나는 천국에 가서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가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그곳에서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안중근 의사

2010년 3월 26일안중근 의사가 돌아가신 지 1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910년 한일합병 조약으로 조선의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긴 이후, 1945년 8월 15일 하나님의 은혜로 연합국이 승리하고 대한민국의 광복이 있기까지 200만 여 명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3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상을 입든가 산 속에 숨어 살았습니다. 성씨마저 바꾸게 하니 쉽게 말하면 주인이 종이 되고, 종이 주인 행세를 한 것입니다. 학교에서도 한국말을 쓰지 못하게 했으니, 언어와 자유를 빼앗긴 생활은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생활이었습니다.
일제 말엽에는 160만의 우리나라 청년들을 제1선에 세워 전쟁의 총알받이 노릇을 하게 하고, 20만 명이 넘는 한국의 처녀들을 일본군의 위안부로 잡아가 하루에 100명 이상과 성관계를 맺게 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러한 역사를 알지 못한다면 저주를 받습니다. 나라가 망하는데 내 자녀, 내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안중근 의사(義士)는 자신의 몸은 생각지 않고 오로지 조국 독립을 도모하며 살았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생애
안중근 의사는 1879년 고종 16년 9월 2일, 황해주 해주에서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의 큰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몸에 배에서부터 가슴까지 큰 일곱 개의 점이 북두칠성 모양으로 있어 생각하는 위인들이나 선비들은 그가 보통 아이가 아님을 예견했습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안의사의 부모는 이러한 연유로 아이의 이름을 ‘안응칠’이라 지었습니다. 안 의사는 어릴 때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무용(武勇)이 남달리 뛰어나 말을 잘 탔습니다. 활로 나는 새를 떨어뜨리고 땅의 짐승을 백발백중 맞추니 황해주 해주에서는 안응칠이 어려운 시국에 나라를 구원할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여겨 이러한 소문이 일본 순사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가문을 볼 때, 5대조 안기옥부터 할아버지 안인수 때까지 일곱 번이나 과거(科擧)에서 무과에 급제했습니다. 안 의사의 생애는 크게 네 가지로 규정할 수 있는데, 첫째, 큰 상무(尙武), 곧 무예를 중히 여기는 자였습니다. 당시에는 글을 중히 여기고 무예를 천대했지만, 일본이 한국 침략을 위해 칼을 갈고 있는 시국에 나라를 지키는 무기가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한 안 의사는 무예를 중히 여겼습니다. 둘째, 큰 신앙가로서 하나님을 철두철미하게 믿었습니다. 그의 민족의식은 투철한 신앙심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셋째, 큰 애국자로서 전체 우리 국민이 애국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집에 있는 살림을 팔아 학교를 세웠습니다. 넷째, 큰 교육가로서 머슴살이하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돈이 없어서 공부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조선 왕조 말엽, 조선의 실태
조선 왕조 말엽 조정은 완전히 썩어 있었습니다. 권력 싸움과 당파 싸움에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이 시끄러웠습니다. 몇 가문의 일족이 세도 정치를 자행해 백성이 죽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탐욕이 많고 행실이 깨끗하지 못한 관리가 많아, 돈만 주면 벼슬을 살 수 있었습니다. 나라의 기강이 날벼락 맞듯이 무너지는 소리를 벼슬아치들은 듣지 못했지만, 백성들은 듣고 있었습니다. 사리사욕으로 인해 국고가 완전히 말라 버려 군졸들에게는 13개월이나 생활비를 주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지만, 글만 숭상하고 외세 침략에 대비하는 무기는 작대기 하나 준비하지 않는 것이 당시의 국가 정책이었습니다. 가난한 시민들에게는 세금을 가중시키니 농사가 잘 되지 않으면 가산과 집을 다 내놓고 산중으로 도망가 명화적(明火賊)이라 불리는 불한당이 되기도 했습니다. 관청을 습격해 양반들을 죽이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부잣집의 쌀을 나눠주는 일들이 있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러한 때에 야수 같은 일본은 조선 침략을 계획하고, 1895년 10월 6일, 이에 걸림돌이 되는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칼로 벤 후, 처참하게 불에 태워 죽였습니다. 1905년 11월 17일에는 어전회의에 군인 300명을 배치시켜 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는 을사늑약을 맺게했습니다. 1907년 7월 31일에는 대한민국의 마지막 버팀돌이었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습니다. 1910년 8월 29일에는 민족사에서 가장 치욕적이라 할 수 있는 한일 합병조약이 이완용과 데라우찌에 의해 불법으로 맺어졌습니다. 조선에 대한 통치권을 영구히 일본 정부에 맡기기로 한 것입니다. 불법으로 맺어진 조약임에도 일본은 각국 언론을 통해 조선 사람들이 일본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조선의 통치권을 맡긴 것으로 선전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조선왕조는 27대, 519년 만에 완전히 망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독립운동
“한 번에 이루지 못하면 두 번, 두 번에 이루지 못하면 세 번, 그렇게 네 번, 열 번에 이르고, 백 번을 꺾여도 굴함이 없이, 금년에 이루지 못하면 내년, 내년에 이루지 못하면 후년, 그렇게 십년, 백년이 가고, 또 만일 우리 대에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아들 대, 손자 대에 가서라도 반드시 대한제국의 독립권을 회복하고 말리라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 그리하면 큰일도 기필코 이루어질 것이다.”- 의병 출전 격려사 中

안중근 의사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중국 상해로 망명해 망해 가는 고국의 소식을 전하며 국권 회복에 힘쓸 동포들을 모았습니다. 1907년, 일본이 우리나라 군대를 해산시키자 소련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의병을 조직하고 참모중장이 된 안중근 의사는 20-30대 청년 20명을 모아 놓고 나라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동의단지회’라는 비밀결사대를 만들고, 손가락을 잘라 ‘대한독립’이라는 혈서를 쓰고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때 안중근 의사와 동료들은 조선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을 3년 안으로 죽이지 못하면 함께 자결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 역에 도착한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권총을 구입해 날짜를 기다렸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한 안중근은 환영식에 들어오는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세 발을 쏘았습니다. 그러고는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쳤습니다. 그 후 30분 만에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한독립은 내 삶의 목적
안중근 의사는 그 뒤 경찰과 헌병, 검찰관으로부터 신문(訊問)을 받았습니다. 직업을 묻는 질문에 그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다. 나는 대한민국 참모중장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것이지, 내 개인의 생각으로 그를 죽인 것이 아니다.”의연하게 머리를 숙이지 않고 눈을 똑바로 뜬 채 구둣발로 걷어 차여도 다시 벌떡 일어나면서 의기양양하게 답했습니다. 안 의사가 법정에서 열린 공판에서 담당 검사에게 “대한독립은 내 삶의 목적이요, 평생의 나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나는 총 한 발로 만인이 보는 앞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을 성토하여 동양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라며 의기당당하게 두려움 없이 이야기 할 때, 일본 헌병과 검사들은 고문을 당하고 매를 맞아도 저렇게 말할 수 있느냐며 감탄했습니다. 일본 검사 미조부치가 안중근 의사를 고문하고 여섯 번째 재판을 진행하는 중에 왜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냐고 묻자, 안 의사는 거침없이 열다섯 가지 죄 때문에 그를 죽였다며,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고종 황제를 폐위시킨 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동양 평화를 파괴한 죄 등의 열다섯 가지 죄목을 당당하고 논리 있게 말했습니다. 이에 안 의사를 보고 있는 일본 재판관과 검사 및 모든 사람들의 간이 떨렸다고 합니다.
사형을 하루 앞두고안 의사는 동생들에게 “우리 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내 시신을 국내로 옮기지 마라.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그러다가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그곳에서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내가 죽는다 해도 마지막에 살 것이므로 나는 두려움이 조금도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여섯 차례 재판에도 의연하고 꼿꼿했던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사형을 집행당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의 대한민국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풍요롭고 자유로운 지금, 우리들의 삶의 근원에는 수많이 분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먹지 못하고, 입지 못 하고, 산으로 굴로 도망하면서 대한민국을 위해 일한 분들의 충성스러운 마음가짐과 영혼! 나라가 없는 서러움으로 많은 순국선열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좌파로 기울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6·25가 북침이라고 주장하며, 미 제국주의자들 때문에 대한민국이 통일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현실 가운데 우리 자녀, 손자들에게 우리나라의 역사를 똑바로 가르쳐야 합니다. 거짓말 할 필요 없이 제대로 가르치면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분명히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공산당이 지구에 있는 이상 편안하지 않습니다. 북한에서는 당과 수령을 위해 부모를 죽여도 죄가 안 되고, 언어의 자유, 이사의 자유, 여행의 자유가 없습니다. 공산주의 사상은 사람을 죽이고 파괴시킵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에는 신앙의 자유, 언어의 자유, 거주의 자유, 출판의 자유가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호를 통해서만 우리 모두가 자유를 누릴 수 있고, 신앙생활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일사각오의 순교정신을 가지고 복된 나라 대한민국을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키시기를, 자녀들에게 올바른 역사 교육을 시키되, 애국애족의 혼, 이 나라의 독립투사들이 생명을 바쳐 순국한 정신과 사상을 가르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나라를 위해 순국한 분들과 그 가족들을 위해 꼭 기도하시고, 우리 대한민국이 우리의 신앙 가운데 세워질 수 있도록, 우리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또 자식들은 자기 후손들에게 물려줄 때, 대한민국이 다시는 어둡지 않고, 싸움이 없는 나라, 복된 나라,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나라, 감사하는 나라가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10년 3월 21일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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