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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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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을 이기는 비결은 범사에 감사 생활과 하나님의 은혜
 글쓴이 : 관리자
 

욥기 1:1-21

사람들은 교회 나와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일상생활에서도 그러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늘 순전(純全)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욥기 1:1).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이 복을 주셨기 때문에 그럴 뿐”이라며 견디기 힘든 시험을 퍼부었습니다. 욥의 일곱 아들과 세 딸이 한꺼번에 횡사했습니다. 그 많던 종들과 7천 마리의 양, 3천 마리의 약대, 5백 겨리의 소, 암나귀 5백 마리를 연달아 잃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은 문둥이 같은 악창이 나서 기왓장으로 긁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아내는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며 배신하고 떠나버렸습니다. 그토록 친하던 친구들조차도 욥이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라며 비난했습니다. 동방 우스 땅의 큰 부자, 존경받던 욥이 갑자기 알거지가 돼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마치 전쟁에서 폭격을 받아 모든 것이 폐허가 되듯 “내가 전쟁을 만났다.” 할 정도였습니다 (욥기 7:1). 그런 상황에서 누가 예배드리고 찬송하겠습니까. 아들을 잃은 집에서 누가 찬송하자고 하면 마음이 편한 부모가 있겠습니까. 잿더미 속에 아내의 배신, 친구의 조롱, 격한 환난을 만난 욥을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은 짧은데 환난은 너무나 많습니다. 잘 차려입고 허허 웃으며 다니지만 속에는 누구나 근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극한 상황 속에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자신이 어머니 뱃속에서 아무 것도 없이 적신(赤身, 벌거숭이)으로 나왔음을 고백하며 돌아갈 때도 적신으로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주신 분도, 거둬 가신 분도 하나님이니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을 받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어리석게 입을 놀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욥의 인내를 배우라”고 하셨겠습니까. 그 결말이 얼마나 아름다우냐고 하셨습니다. 욥은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받았던 것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밥을 먹으나 물을 마시나 항상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영광 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자의 임함은 노아 때와 같습니다 (마태복음 24:37-39). 노아는 닥쳐올 홍수를 깨어 예비한 사람입니다. 욥도 그와 같았습니다. 평상시 말씀 준비, 기도 준비에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옳게 살까’ 하는 마음가짐을 늘 가졌습니다. 농부는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김매고 가을에 추수합니다. 땀 흘린 결과로 풍성한 열매를 수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한시(漢詩)에 ‘소반에 놓인 밥은 쌀알 한 알마다 고생의 결과, 땀 흘린 결과인 줄 누가 알랴’ 했습니다. 인생의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 전에 우주 만물와 인류의 모든 문제를 예정하셨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자 구속(救贖)의 계약을 맺으시고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셨습니다. 여러 시대, 여러 모양을 통해 미리 말씀하신 대로 둘도 없는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히브리서 1:1-2). 그리고 구속하신 백성을 이 세상에서 연단시켜 다시 오실 주를 맞을 준비를 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난당할 때 갑자기 당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날이 올 줄 알았다.”고 고백하십시오. 그날을 위해 평상시에 성경공부를 하고 구역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공부하고 예배 때 말씀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이 올 때 “내가 이날이 올 줄 알았다. 오겠으면 오거라!” 하고 환난과 용감하게 대치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듣고 믿으면 평강이 강같이 흐르지만 (이사야 48:18, 66:12) 말씀을 믿지 않고 팽개치면 환난당할 때 하나님을 찾지 않고 도와줄 사람을 찾으러 다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했을 때 어떻게 구속하겠다는 법칙을 이미 창세 전에 세우셨는데 하나님께 지음과 속량을 받고 하나님께 힘입어 사는 인생이 그 법칙을 어기고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인생에게 준비와 수고와 고난을 통해 마음에 선함과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손과 발로 행함으로써 복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준 사람이 욥입니다. 그는 제단과 성별의 생활에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늘 제단에서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여러분도 퇴근하는 길에 교회에 들러서 기도한 뒤 집에 가는 습관을 들여 보십시오.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성도 여러분은 심판 때뿐 아니라 평소에도 하나님을 경배하고 의지하며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생활을 통해 가족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예배 생활, 기도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을 때 악에서 떠나게 됩니다. 내가 마음먹는다고 악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와서 기도하면 벌써 악에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기 1:5). 일시적으로나 순간적으로, 기분 내키는 대로가 아니라. 항상 준비하는 생활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환난이 와도 당황하지 않고 평상시 들었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경으로 하나님께 친근히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친근히 하는 사람을 붙잡아 주시고 환난 날에 찾으면 도와주겠다고 하십니다 (시편 25:14). 항상 성경 읽고, 주일 잘 지키고, 기도 생활, 십일조, 전도, 구제, 충성, 사랑하는 사람은 환난이 와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습니다. 욥은 갑자기 환난을 맞은 것이 아니라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세상 것은 없어지고 죽고 만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변화무쌍하고 결국은 없어질 세상에 정 붙이면 안 되겠다는 다짐이 있었습니다. 부모에게서 올 때 아무 것도 안 가져왔으니 돌아갈 때도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적신(赤身)의 신앙이 있었습니다 (욥기 1:20-21). 참으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세상의 형적(形迹)은 다 사라집니다. 그래서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고린도전서 7:29-30) 라고 하신 것입니다. 갑자기 환난을 당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지만 평소 준비와 결심대로 환난을 당하면 자신과 가정과 직장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정녕 그날이 있다더니 왔구나’ 하면서 ‘내가 말씀으로 준비하길 잘했구나. 기도해야겠다.’ 하는 다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의미 없이 환난을 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제가 평소에 말씀을 들었는데 이제 이 말씀이 이뤄집니다. 알겠습니다. 저의 찬송을 받아 주시고 나약하고 불초한 종이 기도할 때 들어주시고, 이 환난이 오래 가지 않도록 좀 짧게 해주십시오.”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환난의 날을 감해 주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지혜 있는 자의 집에는 기름과 보배가 있지만 미련한 사람은 이것을 다 삼켜 버립니다 (잠언 21:20)


아담이 본연의 상태일 때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웠습니까. 그런데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처절하고 불쌍해졌습니다. 해만 뜨면 마를 무화과나무 잎을 입고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죄가 있으면 숨게 됩니다. 감추고 거짓말합니다. 그러나 죄가 없으면 떳떳합니다. 얼굴을 내놓습니다. 그 아름다웠던 아담, 천하의 미남자였던 아담이 죄 진 뒤 다 가리고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 가린 것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곧 본색이 드러나고 마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을 만나는 지경은 적신으로 만나는 지경입니다.

아무것도 없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면 안 됩니다. 다 하나님 것입니다. 욥은 아내와 자녀, 종과 가축을 다 잃었지만 바로 그때 적신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떠날 때 10원짜리 한 개 가져가지 못합니다 (디모데전서 6:7). 하나님께서는 오직 잊어버렸던 말씀만 가져오라고 명령하십니다. 말씀 안에 우주 만물이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14:2-4).

무엇을 가지려 하니까 불평, 불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32). 적신의 신앙이 아니면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돈 생기면 교회 가겠다”는 건 어리석은 말입니다. 인생이 인생 된 가치는 바로 적신입니다. 오늘 말씀으로 결심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7장 31절을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거래하는 사람은 세상과 거래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극한 환난을 당한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극한 정성의 표시입니다.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입니다. 환난 날에 우리가 할 일도 오직 하나님 앞에 일어서는 것입니다. 주저앉아서는 안 됩니다. 일어설 때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주저앉아서 어떻게 가겠습니까. 하나님만 믿고 찬송하고 결심하며 기도하고 회개하고 충성하는 동안 환난은 지나갑니다. 환난을 걱정할 것 없습니다. 욥같이 엎드려 경배할 때 아주 간단히 지나갑니다.


인생은 처자식이나 나귀, 소, 양, 세상 물건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도 자식도 재산도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만족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차를 타고, 재산이 많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적신입니다. 언제 다시 가져가시더라도 마음 상하지 않아야 합니다. 욥이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욥은 생의 시작도, 진행도, 마침도 적신이었습니다 (욥기 1:21, 시편 49:17, 전도서 5:15). 그런데 왜 인생은 적신 자체로 만족 못하고 명예, 재물, 부귀, 영화에 눈독 들이고 가지려 합니까. 명예와 재물이 있다고 해서 웃음이 나오고 튼튼해지고 살맛이 나고 감사하고 노래가 나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 가진 적신으로도 만족하고 감사했습니다. 지음 받을 때 그대로 몸뚱아리 하나였습니다. 인생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동행할 때 기쁨과 웃음과 즐거움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그때 나귀와 약대와 소와 처자는 저절로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과 있을 때 우주만물의 축복이 따라옵니다.


우리 삶의 근본적 초점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소원대로 축복해 주십니다. 죄의 세력은 우리에게 탐심과 우상과 사욕과 정욕을 심어 놓았습니다. 욥이 환난 속에 머리털을 밀고 하나님께 경배한 것은 이것들에 대한 승리입니다. 적신이 된 것입니다. 영국의 시인 테니슨은 친구의 죽음을 겪고 나서 유명한 시 ‘인 메모리엄’ (사랑하는 친구를 잃은 슬픔으로부터 하나님의 힘으로 희망을 되찾아 평화를 얻고 광명으로 나아가는 ‘영혼의 길’을 걸어가는 내용을 담은 시)을 썼고, 단테는 사랑하는 여인 베아트리체의 죽음 이후 불후의 명작 ‘신곡’을 썼으며, 밀턴은 44세에 시력을 잃는 시련 속에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면서 ‘실낙원’과 ‘복락원’을 썼습니다. 욥은 적신이 되어가는 기막힌 환난을 만난 덕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다시 체험하고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는 고도의 체험을 한 것입니다 (욥기 42:5). 이것은 주님의 재림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재림은 고사하고 우리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인간은 자신을 믿는 어리석음 속에 삽니다. 자신을 믿는 사람이 제일 가련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나의 생사화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나의 시작도 마침도 결과도 하나님입니다. 나로 시작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인간이 자신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은 병통(病痛)입니다. 세상 것을 추구해 봐야 두더지 인생입니다. 아무리 파 봐도 땅속입니다. 얼마 가지도 못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왔다” 하는 고백은 얼마나 근원적 인생 철학이요 진리입니까. “주신 이도 가져가신 이도 하나님”이란 고백은 얼마나 위대한 생의 혁신이고 승리의 외침입니까. 욥은 자신의 인생 마무리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정리했습니다. 아담처럼 숨지도 숨기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가라 함은 어찜이뇨” (시편 11:1).

우리에게 닥쳐올 환난이 앞으로 무수하게 많습니다. 인간으로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환난도, 태풍 같은 환난도 있을 것입니다. 땅에서, 하늘에서, 사람에서, 교회에서, 친구, 친척에게서 환난이 올 것입니다. 그때 “난 너 그럴 줄 몰랐어.” 하지 마십시오. “이날이 올 줄 알았다.”하며 욥같이 일어나 적신의 신앙으로 경배하고 찬송하십시오.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환난은 아름다운 신앙을 준비하게 합니다. 유익을 줍니다. 과거에 믿지 못하고 정직하게 살지 못한 것을 회개시킵니다. “환난 전에는 하나님을 잘 몰랐습니다. 환난 당한 뒤 하나님 뜻 알았습니다.” 하고 고백하게 만듭니다. 오늘 적신의 신앙을 결심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적신 상태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환난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결재 아래 있습니다. 환난은 아무리 무겁다 해도 내가 지은 죄보다 가볍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믿음으로 전환 시키십시오.

극한 환난의 파동 속에서 알몸의 욥은 하나님과 평화로운 대화를 나눴습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잃어버린 것, 사기당한 것, 빼앗긴 것, 망한 것...적신의 신앙으로 보면 그런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본래 없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 것도 매개시키지 않은 본연의 상태에서 창조주와 만나게 하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깨달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믿음을 일으킵니까. 큰 사랑을 알게 합니까. 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소망을 줍니까. 환난은 우리에게 이런 큰 진리를 알게 합니다 (시편 119:67,72,75). 환난은 성도의 것입니다. 환난이 오기만 하면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믿고 끝까지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014년 3월 9일 주일 2부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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