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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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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본래대로 계신 예수님
 글쓴이 : 관리자
 

마태복음 19:3-12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죄와 허물로 얼룩진 이 세상에서는 동서남북 사방, 지구 팔만리의 땅덩이 어디를 가도 위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안심이 되지 않고 마음이 괴롭습니다. 남편은 병들고 아이는 속을 썩이고 벌이도 시원치 않습니다. 하늘을 봐도 땅을 봐도 소망이 없습니다. 우환을 덜어 보려고 사람의 손으로 깎아 만든 형상에게 절을 하고 빌어 보기도 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인격적 존재인 사람이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나뭇조각이나 돌에 대고 빈다는 것이 얼마나 허탄한 일입니까.

이런 인생들에게 하나님은 ‘본래’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래’! 국어사전에는 ‘본디’, ‘사물이 전해 내려오는 그 처음, 원래, 원시’, ‘그대로 있는 것’으로 풀이돼 있습니다.
사람은 이랬다 저랬다 합니다. 피를 나눈 형제도 이익이 걸린 문제가 생기면 얼굴을 바꿉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늘 ‘본래대로’입니다. 늘 본심입니다. 변함이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습니다(야고보서 1:17, 말라기3:6). 만 년 전이나 만 년 후나 여전하십니다(히브리서 1:12).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똑같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동일합니다(히브리서 13:8). 한 치도 오차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베레아 남단 요단강 지경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평생의 도전자였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다시 도전해 옵니다. 예수님을 올무에 엮기 위해 가당찮은 질문 공세를 펼친 것입니다. 주제는 이혼 문제였습니다.
“결혼했다가 아내를 헌신짝같이 내버리는 것이 옳은 일이요?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예수님이 답하셨습니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율법에 능통하다는 바리새인들이 반박합니다.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 내어버리라 했습니까?”
신명기에 기록된 모세의 말을 가지고 트집을 잡은 것입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내었거나”(신명기 24:1-3).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 때문이지 ‘본래’는 그렇지 않다”(마태복음 19:8).

그렇습니다. 실상 모세의 이 율법은 이혼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이혼을 제한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던 ‘본래’의 원리로 답변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배우자가 다른 상대와 정을 통하면 이혼 요건이 된다고 가르쳤지만 율법의 본 정신은 ‘용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하면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놓고 인류 죄를 거기 다 집어넣어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당신의 의를 줘서 우리를 의인 만들고, 하나님의 친 아들딸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 ‘본래’의 정신을 알지 못했습니다. 무슨 약점이 있나 꼬투리 잡기에 바빴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건을 취급할 때 그 ‘본래’, 즉 근본과 태초를 생각하셨습니다. 사건의 진행과정을 ‘본래’ 속에서 눈여겨보시고 ‘본래’에서 해결의 기틀을 잡으셨습니다. 사건의 궁극적 해결점도 ‘본래’에 맞췄습니다. 언제
나 ‘본래’에 뿌리를 박고 문제의 답변을 말씀하셨습니다.
직장을 잃고 생활은 어렵고 아이는 셋이나 되고 몸도 아파 일할 수 없게 된 사람이 친구를 속였습니다. 친구는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 고 합니다. “몇 년을 도와줬는데 은혜도 모르느냐?”고,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때 ‘본래’를 생각하면 친구를 용서할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이 생깁니다. 나를 서글프게 한 사람이지만 본래는 착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용서의 마음으로 선하게 타이르면 본인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해결방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본래가 아닌 현상을 보고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죄 지은 사람을 감옥에 보내는 것이 인간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죄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내가 정죄해서 내쫓으면 그 사람은 도둑이라는 오명과 딱지가 붙어 평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말할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요한일서 4:7).
하나님께는 어떤 죄인도 용서받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모든 사람을 본래, 즉 성경 말씀에 두고 관찰해야 합니다. 이 땅에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로마서 3:10). 인간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며 손과 발은 피 흘리는데 빠릅니다. 성경을 볼 때 나도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그런 지경에 처한다면 내 친구보다 더 무서운 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의 본래를 알려줄 뿐 아니라 마지막 결론까지 다 들어 있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본래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때도 예수님은 ‘본래’를 들어 그들의 오해를 지적하셨습니다. “모세 율법에 사람이 자식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해 후사를 세우라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칠 형제가 차례로 죽어 한 여인이 칠 형제에게 다 아내가 됐다면 부활 때에 그 여인이 누가 아내가 되겠습니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하였다.”고 답하십니다. 본래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인간 본래의 생명은 영원한 것이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도록 창조됐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천국의 기쁨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마태복음 22:23-33).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자 실의에 빠져 낙향하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본래’의 말씀으로 성경을 풀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누가복음 24:13-35). 본래로 돌아갈 때 항상 마음이 뜨거워지게 돼 있습니다.

본래로 돌아가면 이해가 생깁니다. 이해가 부족할 때 오해가 생기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성도는 사람을 너그럽게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신령한 쓰레기통이 돼야 합니다. 이 사람의 비난, 저 사람의 험담들을 다 들어 주고 담아 주는 쓰레기통이 되되 더 이상 그 말들을 유통시키지 말고 한데 묶어서 쓰레기차가 오면 내어버려야 합니다. 그런 너그러운 아량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악인도, 어떤 죄를 지은 사람도 용서하십니다(야고보서 1:17). 부모의 마음은 알파와 오메가, 즉 처음과 나중입니다. 자식이 죄 지은 줄 알지만 한사코 덮어 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본래’의마음입니다. 자식에 대해 변치 않는 긍휼과 자비, 측은한 마음을 느끼며 사랑하고 감싸 주고 가슴에 안고 삽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죄를 사해 주신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은 언제나 본래입니다. 우리를 대하시는 것이 언제나 여전합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나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은 내가 고생하고 빚지고 병들어도 돈이 없어 병원에도 못 가는 것을 나보다 더 안타깝게 생각하십니다(이사야 63:9).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가 먹지 못하고 고생하고 의지할 데가 없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예레미야애가 3:33). 우리가 본래로 돌아가기만 하면 그런 일이 없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은 이렇지 않았습니다. 참 아름다웠습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파괴되고 가시와 엉겅퀴, 저주와 탄식이 가득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 땅과 우주만물, 일월성신을 다 만드신 뒤 보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래로 돌아가야 합니다. 본래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의 본래, 종교의 본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돌아갈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요한복음 14:6). 하나님은 사람의 본래 모습을 제일 좋아하십니다. 우리의 본래를 찾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래를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본래를 회복해야 합니다. 잊어버린 본래를 찾아와야 합니다.

인간이 본래를 찾는 방법은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 구원을 위한 성령님의 기록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한복음 5:39).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마태복음 4:7).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마태복음 4:4).

인간의 본래는 성경의 거울 앞에서 바로 보고 찾을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너는 본래의 사람이다. 네 마음과 생활이 다 본래로 돌아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성경대로 믿고 살다가 망한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이 당신을 걸어서 고소하라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성경을 따라가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본래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우리의 본래 형상을 찾아주기 위해 본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 짓기 전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원수가 굶주리거든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갚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평강제일교회 성도들은 그 나라 갈 때까지 원수지지 말고 모두 형제같이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한 형제입니다. 아니, 이웃 나라 사람들도 한 형제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으로 대하면 악의 세력이 물러나고 의의 태양이 비추어서 대한민국의 앞날에 서광이 비추고 어둠이 달아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구를 탓하지 마십시오. 먼저 나를 탓하십시오. 내가 본래를 찾지 못하니 보는 것, 듣는 것이 다 원수가 되는것입니다. 본래로 돌아가면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습니다. 남의 험담을 하지 마십시오. 늘 정직하고 성실하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전에 세 번 생각하고 말하십시오. 가난한 이웃, 불쌍한 이웃을 도와 주십시오.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십시오.
하나님과 사람과 만물 앞에 추호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진실한 마음으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신앙 생활을 해서 본래를 찾고 본래의 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2년 9월 23일 주일 2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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