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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첫 부르심
 글쓴이 : 관리자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첫 부르심
창세기 3:1-11



신,구약 성경 전체는 구속사(救贖史: 구속의 역사)의 기록입니다. 아담 타락 이후 족장 시대, 사사 시대, 열왕 시대, 바벨론 포로와 귀환 시대, 신구약 중간 시대, 신약 시대까지 성경의 모든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절정을 이루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이 되심으로써 구속사를 완성하셨습니다. 세계사 전체도 구속사입니다. 세계사는 예수님을 전후로 주전(主前)과 주후(主後)로 나뉘었습니다. 예수님이 역사의 분기점 입니다. 신약의 시작인 마태복음 1장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고 선포하신 말씀은 예수님이 역사에 실재(實在)하셨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구속사의 절정인 예수님은 말씀 자체이십니다. 역대 선지자들도 말씀대로 증거했고 예수님의 열 두 사도도 말씀으로 임명됐습니다. 성령(聖靈)께서도 말씀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 3위 1체가 바로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노아를 본 적도 없지만 말씀을 통해서 알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벗 삼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은 구속사를 통틀어서 첫 번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배우려고 합니다. 천지창조부터 인간의 타락까지를 기록한 창세기 1, 2, 3장은 성경의 핵심입니다. 신학자들은 이 부분을 ‘성경이자 주석(註釋)’이라고 말합니다.
이부분을 알면 성경의 반을 아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창세기 1-3장은 우주와 인생과 구원의 기원(起源)입니다. 인생과 신앙의 근본원리를 밝혀줍니다.



자기 위치를 떠난 아담, 뱀에게 유혹된 하와

아담의 아내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세기 2:17) 하신 말씀을 하나님께 직접 듣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명령하신 후 하와가 창조받은 것입니다. 하와는 남편 아담에게 그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 동산을 ‘다스리라’, ‘지키라’는 두 가지 임무를 주셨습니다(창세기 2:15). 유혹자인 사탄이 올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탄은 아담 타락 전에 먼저 배신(背信), 배약(背約)한 타락자입니다. 발붙일 곳이 없던 존재입니다. 그런 사탄, 즉 뱀이 하나님이 제일 사랑하시는 아담과 하와를 유혹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뱀은 아담이 없을 때 하와를 찾아갔습니다.
간사스럽게, 조용히, 말초신경이 녹을 정도로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한 것이 뱀이라고 했습니다(창세기 3:1). 간사하고 요사스럽고 이간질하는 존재입니다. ‘간교하다’는 히브리 원어로 ‘영리하고 지각 있고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뱀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한 내용이 무엇이냐. 동산의 모든 나무 실과를 먹지 말라하시더냐.”(창세기 3:1)
고 하와에게 물었습니다. 그때 하와가 “네가 알아서 무엇하겠느냐. 하나님과 우리의 언약이니 알고 싶으면 하나님께 물어라.”하고 잘라 버렸다면 인류는 영원히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험에 한 번 합격하면 다시는 시험이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시험을 이기지 못함으로써 죄가 들어왔습니다. 오만가지 질병도 다 죄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질병을 이기지 못하고 수많은 인류가 모두 죽어갔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마서 6:23).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 1:15).

하와에게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동산의 각종 나무 실과를 다 주셨는데 만족하지 못하고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욕심냈습니다. 욕심이 잉태해 죄를 낳았고 죄가 장성해 사망에 이른 것입니다. 하와가 뱀에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고 대답하자 뱀은 하와에게 “결코 죽지 않는다. 하나님이 거짓말하는 것이다.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라고 이간질했습니다(창세기 3:4-5).
피조물이 어떻게 창조주와 같이 되겠습니까. 뱀이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속이고 이용하는 것’이라고 선동했습니다. 무서운 죄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한복음 8:44).



뱀은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전면적으로 도전하도록 부추겼습니다. 꼬임에 홀린 여자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니 전과는 달리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습니다(창세기 3:6). ‘먹음직하다’는 것은 육신의 정욕(情慾)입니다(요한일서 2:16). 자꾸 손이 가는 것입니다.
‘보암직하다’는 것은 안목(眼目)의 정욕입니다(민수기 11:4). 세상의 것들을 보고 욕심이 불타 오르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는 것은 이생의 자랑입니다(야고보서 1:15). 마음과 온 정신이 손을 명해서 따오게 할 정도로 탐스러워 보였습니다. 마치 귀신에게 홀린 것 같았습니다. 나약한 여자가 결국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먹고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달리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편 아담에게도 줬습니다. “내가 먹었지만 죽지 않았어. 하나님이 우리를 속이는 거래. 당신도 먹어.” 아담도 먹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죽지 않았습니까. 죽고 말았습니다. 욕심이 우상숭배이고 욕심이 죽음을 불러 옵니다(골로새서 3:5, 욥기 15:35, 31:25-26, 시편 49:6, 7:14,이사야 59:4, 33:11).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 자기들이 벗은 줄 알았습니다. 전에는 벌거벗어도 부끄러운 줄 몰랐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보니 서로 부끄러워졌습니다. 망측하고 흉측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무화과 나뭇잎을 따서 가렸습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햇볕에 말라 부스러졌습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아침의 풀끝 이슬 같습니다. 해만 뜨면 사라지는 이슬 말입니다.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사는 삶입니다(잠언 27:1).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삶입니다. 천사가 인도하는 삶입니다(에스겔 10장). 그들이 죄 짓는 순간부터 천사도 오지 않았습니다. ‘아차’ 하는 순간 이미 늦은 것입니다.
떨리고 불안한 마음으로 있던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을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창세기 3:8). 마치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덜덜 떨며 놋 땅으로 도망간 것과 마찬가지 모습입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과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아담,하와가 숨은 것을 성경에서 처음 나타나는 ‘양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양심은 ‘자기 행위에 대해 옳고 그름,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죄 의식을 느끼고 도망간 것입니다.



숨어 있는 아담과 하와를 찾으시는 즉각적인 구속사의 첫 음성

숨어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이 즉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참 사랑입니다. 죄 지은 아담이 괘씸하지만 그래도 바로 찾아와 불러주신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구속사의 첫 음성입니다. ‘아담’은 히브리어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아’ 부르시는 음성은 ‘사람아’ 부르시는 것입니다.

‘아담이 어디 있는지 정말 몰라서 부르신 것’(독일 신학자 헤르만 군켈)이라고 오해한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입니다.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모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한 분입니다(시편 139:7-10, 예레미야 23:24-34). 만물이 그분 앞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히브리서 4:13). 솔로몬은 하나님이 우주 공간을 꽉 채우시는 분이라고 말했습니다(열왕기상 8:27). 우주에조차 끝이 있지만 하나님은 우주를 만드신 분, 만유(萬有)보다 크신 분입니다(사도행전 7:49-50, 17:24). 부부 사이라도 모르는 우리의 속마음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를 가릴 수 없습니다(예레미야 11:20). 우리가 이불 속에서 말한 것, 속으로 생각한 것조차도 하나님은 다 아시고 그대로 이루십니다.

우리는 아담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답해야 합니다. 아담만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부르시는 음성입니다(로마서 5:12). 아담은 답했습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 숨었나이다”(창세기 3:10).
‘두려워’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어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공경, 존경, 경외,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관련돼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敬畏:공경하고 두려워함]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잠언 1:7). 오순절에 120문도에게 성경이 내리자 그들이 세계 각국의 언어로 말했습니다. 평생 공부해도 다 배울 수 없는 세계 각국의 언어를 말입니다.
둘째는 인간의 공포와 두려움을 뜻합니다. 아담이 ‘두려워하여’ 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뜻입니다. 아담은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얻었던 지혜는 다 잃어버리고 대신 공포와 두려움을 얻고 만 것 입니다.
히브리 신학자 랍비 잘만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을 “너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무엇을 했느냐. 내가 네게 부여한 일이 어느 정도 성취되었느냐.” 라는 물음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깨달은 뒤 20일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신학자는 “너는 어찌 내 말을 듣지 않고 뱀의 말을 들어그 행복한 자리에서 사망으로 향하는 길로 떨어졌느냐.” 하는 쌀쌀하고 비웃는 질문이라고 해석합니다. 또 어떤 신학자는 아담을 설득하려는 물음이라고 해석합니다. “너는 어찌해서 나를 그리도 빨리 떠났느냐. 뱀의 말을 들은 이유가 무엇이냐. 우리 한번 조용히 얘기해 보자.” 하며 회개로 인도하기 위해 진지한 대화를 원하는 물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깊이 있는 해석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그리고 인류를 너무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시면서 ‘내가 너를 살려 줄게. 용서해 줄게.’ 하시는 음성,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구속사적 부르심으로 보는 것입니다. 끝까지 우리를 살리겠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선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누가복음 15:10, 로마서 5:8). 굶주리고 헐벗고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비난을 받으시면서도 잃어버린 자를 찾으셨습니다(마태복음 9:13, 누가복음 15:7, 요한복음 9:39, 이사야 53:6, 시편 119:176, 예레미야 50:6).
하나님은 자기 위치를 멋대로 떠난 아담을 위협하거나 책망하시지 않고 무한한 사랑과 용서를 가지고 물으신 것입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는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사랑의 시작은 하나님입니다. 먼저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요한일서 4:10, 19).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하나님이 문 밖에서 두드리십니다. 우리가 문을 열면 “내가 네가 어릴 때부터 너를 찾았다. 내 음성을 이제야 네가 들었구나.” 하십니다. 비난하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줄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나무가 이것이다.” 하시면서 주십니다. 얼마나 행복합니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음성은 오늘도 죄인들 마음 속에, 우리 성도들의 마음 속에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제가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해도 “안다. 내 아들의 십자가가 있지 않느냐. 어떤 죄도 철두철미하게 회개하면 십자가 피로 다 사해 준다. 너 죄 없다. 내가 기억도 하지 않겠다. 걱정하지 말아라.” 하십니다. 그 음성, 얼마나 감사합니까(베드로전서 2:24-25). 아담처럼 두려워 떨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의 온기를 느껴야 합니다(요한복음 15:4-7). 시골 어머니들이 열무를 뽑아서 흐르는 물에 씻고 파를 손으로 자르고 마늘을 대충 찧어서 소금만 뿌려 반찬으로 내놓아도 자녀들이 먹고 토실토실 살이 오릅니다. 어머니의 사랑의 온기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의 온기가 우리를 감싸 주십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하고 말씀에 순종하면 영생 복락이 여러분 개인과 가정과 직장과 자손만대까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과 절망의 그림자를 헌 이불 말 듯 걷어치웁니다. 비참한 상태에 처한 인간에게 베푸시는 일방적인 호의입니다(요한복음 3:11).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변동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확신이 없고 정성 다해 예배 드리지도 못하고 다른 목적 때문에 교회에 왔다 갔다 해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래도 불러 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성도 여러분!
사랑의 부름을 받은 우리는 이제 잃어버린 자를 찾는 일에 나서야 합니다. 세계사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전개되는 현장입니다.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잃어버린 자를 끝까지 찾는 하나님의 종들이 돼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야 될 텐데.’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괴롭고 답답할 때라도 ‘하나님이 나에게 뜻을 두셨는데 내가 왜 이러지.’ 하면서 다시 잃어버린 자를 찾아 나서면 됩니다.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마태복음 18:14).
주님은 구속사가 성취될 때까지 기어코 잃어버린 자를 다 찾아내고 마십니다. 평강제일교회와 한국 교회의 존재 의의와 가치, 목적은 잃어버린 자를 찾는 데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다른 사람들 위에 왕같이 군림하는 교회가 돼선 안 됩니다. 상거지 대접을 받을지언정 말씀 중심으로, 오직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가지고 잃어버린 자를 찾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괴로우나 슬프나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의 모든 소원을 성취시켜 주고 형통의 복을 주십니다. 아침에 눈 뜨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부르심을 기억하십시오. 그 안에 담긴 “잃어버린 자를 네가 찾아야 할 것 아니냐. 지금까지 무슨 일을 했느냐. 맡긴 일을 얼마나 성취시켰느냐.” 하는 음성을 들으십시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忠誠)입니다. ‘충(忠)’은 가운데 중(中)과 마음 심(心)이 합쳐진 글자이고 ‘성(誠)’은 말씀 언(言)에 이룰 성(成)이 합쳐진 글자입니다. 말씀을 중심해서 말씀을 이룩해 드려야 합니다. 십자가를 모르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늘 모시고 전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2년 4월 22일 주일 2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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