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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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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권세 깨뜨리고 부활하신 산 소망의 새 아침
 글쓴이 : 관리자
 




마태복음 28:1-10, 고린도전서 15:12-20

유월절 양으로 죽임 당하신 예수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창세기 3장 15절의 예언대로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생애 30년과 공생애 3년을 보내신 뒤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새 아침이 바로 오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비참한 종살이를 하다가 430년 만에 탈출했습니다(BC 1446).
출애굽 직전, 하나님은 유월절 양을 희생시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셨습니다. 장차 메시야께서 유월절 희생양으로 인류를 살리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예표입니다(요한복음 1:27, 고린도전서 5:7). 놀랍게도 출애굽 직전 유월절 양을 잡은 것이 목요일이었고 예수님도 목요일 자정 즈음에 잡히셨습니다. 1400여 년 전에 예언된 그 날짜가 그대로 이뤄진 것입니다.



유다에게 주셨던 마지막 기회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 열 두 제자와 성만찬(聖晩餐)을 하셨습니다. 떡을 떼시면서 ‘내 살이라’ 하셨고, 포도주를 주시면서 ‘언약의 피니 받아 마시라’ 하셨습니다. 제물이 되셔서 대속(代贖)을 위해 흘리는 언약의 피(마태복음 26:28)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내가 너희 열 두 제자를 택했지만 하나는 마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술렁이자 “나와 함께 떡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나를 팔 자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가룟 유다가 손을 넣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예수를 팔기로 굳게 결심했었다 하더라도 그 순간 마음을 돌려 먹었으면 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을 듣고도 떡 그릇에 손을 넣었습니다. 불쌍한 인간입니다. 이미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고 있었던 가룟 유다. 돈을 사랑해서 헌금을 빼돌려오다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던 자였습니다(요한복음 12:6). 예수님을 넘기는 대가로 은 30냥을 받아 이틀 동안 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 마음에 찔려 그 돈을 써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나무에 목을 맨 새끼줄마저도 그를 용납하지 않아 낭떠러지로 떨어져 배가 터지고 창자가 빠져나오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가 대제사장을 찾아가 도로 놓고 나온 은 30냥은 성경의 예언대로 나그네의 공동묘지 땅값이 됐습니다(마태복음27:3-10, 사도행전 1:18-19).

삼라만상이 소생하는 봄에 맞는 부활의 아침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뒤 노아 홍수 때 죽은 영혼들에게 가서 전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3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부정모혈(父精母血)로 태어났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나신 분, 하나님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죽음 속에 갇혀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부활은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삶의 목적과 의미가 없습니다. 사는 자체가 지옥이고 죄를 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약동하는 봄, 삼라만상이 소생하는 계절입니다. 겨울 동안 움츠리고 적막해져 죽은 것같이 됐던 이 강산에 봄기운이 돌아 생명의 동산을 이루는 이 때에 주님의 부활절을 맞이하게 된 것,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부활(復活),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은 이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한복음 14:19). 예수님만 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두 제자가 마음이 엄동설한같이 얼어붙어 낙담하면서 고향 엠마오로 내려갈 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무슨 일로 얼굴들이 그렇게 울상이 돼서 근심합니까?”
“모르오?”
“무슨 얘긴데?”
“메시야란 분이 왔는데 우리가 이 분을 믿고 있다가 그분이 대항하지도 못하고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3년 동안 따라다니다가 고향 부모 뵙기도 면목 없지만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아니, 선지자들이 그분이 죽었다 살아난다고 말씀하신 것을 모르오? 그분은 죽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주시니 실의와 낙담은 사라지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열한 번이나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네 시간이나 나흘도 아니고 40일! 이스라엘 전역에서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500명이 모여 있는 장소에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감람산에서 천사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주여 언제 오십니까?”
“너희 본 대로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데리고 가겠다.”(마태복음 24장, 마가복음 14장, 누가복음 21장, 요한복음 18장).
얼어붙었던 우리 마음에도 부활의 소망이 생긴 것 입니다. 사망 권세를 깨뜨리신 예수님이 전 인류에게 산 소망이 되신 것입니다. 산 소망!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確證)하셨습니다(로마서 5:8, 8:32). 인간들이 하도 믿지 못하니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이기까지 하시면서 증거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깨달은 뒤 “나는 예수를 안 뒤 부터는 예수의 죽은 것을 내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
(고린도후서 4:10-11)고 고백했습니다. “부활은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다.”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열두 제자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3년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으면서도 믿지 못해 다 달아났던 그들입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다면 완전히 인생을 바꿔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 앞장서다가 결국은 순교까지 했겠습니까. 피조물이 생명 자체이신 창조주를 어떻게 죽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백 번 죽이면 백 한 번 살아나시는 분입니다. 다만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걸머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같이 가지고 오신 것은 인성으로 죄를 걸머지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죄를 몽땅 맡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리마대 요셉의 새 무덤에 장사됐습니다. 그는 당시 국회의원이었습니다. 큰 자산가였습니다. 뭐가 아쉬워서 빌라도 총독에게 당당하게 들어가서 요구했겠습니까. 부활이 없다면 말입니다.
“예수의 시신을 나에게 넘겨주시오!”
“아니 의원님, 예수와 무슨 관계요?”
“나 예수의 제자요.”
천하가 동원돼서 산헤드린 의사당에서 예수를 죽이기로 가결했을 때도 아리마대 요셉만은 벌떡 일어서서 “나는 반대합니다!” 외쳐서 대제사장의 간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피가 낭자한 시신에서 못을 뽑고 가시관을 벗기고 피를 닦아 새 무덤에 장사 지내는 그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26번이나 다시 살아나실 것을 미리 말씀하셨고 그 말씀대로 살아나셨습니다(마태복음28:6). 예수님의 부활은 구약에도 기록돼 있습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시편 16:10).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린도전서 15:16-1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이 없고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뿐이라면 우리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고,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18-19).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업이 실패하고 망해도 헌금하고 십일조 바치고 감사하는 성도의 삶이 불쌍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에 성도에게는 산 소망이 있습니다.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소망, 없어지지도 망하지도 않는 소망입니다(베드로전서 1:3-4, 디도서 2:11-14).

믿는 자에게는 무덤이 없다
‘낳고 죽고’ 라는 한마디로 요약되는 인류의 역사지만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사람 사는 곳에는 어디에나 무덤이 있지만 예수님만은 무덤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부활을 믿는 성도 역시 무덤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가 잠든 곳에는 ‘묘’, ‘무덤’이라고 써서는 안됩니다. ‘000의 집’이라고 해야 합니다. 무덤은 죽은 사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갇혀 있는 곳, 감옥입니다.
멸망의 표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는데 우리에게 어찌 무덤이 있습니까. 우리 육신의 장막 집이 무너졌을 때(고린도후서 5:1) 임시로 자는 집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주님 재림하실 때 총 부활합니다(고린도전서 15:51-52, 데살로니가전서 4:13-16).

인류를 지배하는 사망, 이길 힘은 믿음뿐
사망의 파괴력은 무섭습니다. 지금도 인류를 지배하고 있는 죽음. 그 죽음의 원인은 죄입니다. 죄값은 사망입니다.(로마서 6:23, 요한계시록 20:15) 죄가 사람을 찌릅니다. 온몸을 찌릅니다. 독침과도 같습니다.
죄가 죄지은 사람을 독침으로 찔러 죽게 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속여 넘기기 위해 죄가 달콤하게 보이도록 하고, 손이 갈만큼 탐스럽게 만듭니다. 그래서 따먹게 합니다. 마침내 죄를 짓고 나면 벌거벗은 것처럼 다 드러나게 하고 망신시킵니다(요한계시록 17장). 그런 뒤 불에 사릅니다. 죄 때문에 사람이 죽고 나면 사탄이 손뼉을 칩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죄와 죽음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예수를 믿는 믿음입니다. 믿을 때 죄가 없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의인이 영원히 승리할 것을 보여주는 산 소망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사도행전 2:24)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인간은 ‘본래는’ 무덤으로 가게 돼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죄 때문에 무덤이 생긴 것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하셔서 무덤이 생긴 것입니다. 인생이 허무해진 인간들은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는 데 몇 천만 원도 쓰고 몇 억 원도 씁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주님은 살아 계신 분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죄 짓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아가게 돼 있습니다(요한복음 5:25-29)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모시고 있으면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요한복음 8:51).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이 사망을 이긴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인류의 산 소망입니다. 못 믿겠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제가 이렇게 말합니다. “믿지 못했다가 나중에 죽었는데 하나님 나라가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갔다가 없으면 그때 포기하면 될 것 아닙니까.” 얼마나 답답하면 이렇게라도 말하겠습니까. 내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데 얼마나 감사하고 기쁩니까. 돈 드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이십니다(골로새서 2:3).
지혜와 지식, 보화와 보배가 그분 안에 감춰져 있습니다(골로새서 2:2-3). 만세와 만대 동안 감춰져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부활을 믿는 우리 인류에게 산 소망으로 나타나십니다(골로새서 1:27). 저는 성경 읽을 때마다 가슴이 뜁니다. 얼마나 감격스런 말씀입니까. 땅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땅의 소망은 썩습니다. 쇠합니다. 날아갑니다. 없어집니다. 사기를 당합니다.

“내가 살았기 때문에 너희들도 살아야 한다.”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한복음 14:19) 이 말씀을 영원히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헬라어 원어로보면 “내가 살았기 때문에 너희들도 살아야 한다. 내가 살았기 때문에 너희들도 꼭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 감사의 박수라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을 믿기 전까지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깨닫고 믿으면 편안합니다. 뭘 두려워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걱정을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모든 삶에 그림자 없이 사시기 바랍니다. 정오 12시, 태양이 정수리 위에 있으면 동서남북에 그림자가 없습니다. 그림자 없는 신앙, 잘 믿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예표(豫表)로 나사로를 살리셨고(요한복음 11:17-44),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셨으며(누가복음 7:11-17) 회당장 야이로의 외동딸을 살리셨습니다(마가복음 5:21-24). 통곡과 슬픔이 환희로 바뀌었습니다.

살아날 것은 살아나고 망할 것은 망하고야 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 로마제국이 3백년동안 기독교인 수만 명을 죽였습니다. 불에 태워 죽이고 찢어 죽이고 짐승의 밥을 만들어 죽였습니다. 오죽하면 기독교인들이 땅 위에서 견딜 수 없어 지하 몇백 미터 되는 땅굴을 파서 숨었습니다. 카타콤입니다. 잡으러 들어간 로마 군인들이 문을 못 찾아서 죽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300년이 지난 AD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틴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깨닫고 믿어 기독교를 공인했습니다. 콘스탄틴의 믿음의 승리로 기독교는 부활했고 기독교를 핍박한 로마는 마침내 망하고 말았습니다. 옛 소련은 75년 동안 수많은 기독교인을 죽였지만 끝내 망했습니다.


생명의 주님은 땅에 묻혀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따뜻한 바람이 대지를 소생케 하는 이 봄처럼, 주님의 부활이 우리 믿는 자들과, 가정과 직장과 사업, 교회와 겨레에 산 소망의 바람을 불게 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까지 우리의 삶이 그늘 아래서 악취 나는 삶이었을지라도 “내가 살았으니 너희도 살리라!” 하는 그 말씀대로 이제는 향기 나는 십자가의 부활의 향수를 만방에 뿌리면서 전도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겠습니다. 오늘 부활의 영생의 바람으로 살아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부활의 축복과 사랑의 선물이 성도들의 가슴 속에 뜨겁게, 뜨겁게 활활 타올라서 부활의 새 생명으로 마지막 그 나라 갈 때까지 모든 생활에 악한 어둠을 물리치고 질병을 물리치고 영육간 강건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힘차게 일하고 사랑하고 또 남을 미워하지 않고 주님의 뜨거운 사랑과 뜨거운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일에 열심을 다하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겠습니다.

2011년 4월 24일 부활주일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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